포옹 제2권 지은이: 문순태 출판사: 삼진기획 6. 핏줄 최지훈의 어머니는 한 달만에 다시 하동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녀는 부산을 떠나오기 전에 정매한테 전화를 걸어 마지막으로 원주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으니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해보았으나 거절을 당했다. 오히려 정매는 여지껏 부산을 떠나지 않고 뭘 하고 있었느냐며 신경질을 부렸다. "하동에 내려가서 열심히 희망을 갖고 사세요. 언젠가 한 번 원주 데리고 가겠어요." 정매는 전화로 그렇게 말한 후 앞으로는 편지나 전화 같은 것 하지 말고 부산도 오면 안 된다고 거듭 당부를 했다. 다시 하동으로 돌아온 지훈 어머니는 오랫동안 빌붙어 살았던 역 뚱보 아주머니 식당에 들어가서 주방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러나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는 것이었다. 눈앞에 원주의 모습이 어른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제 아들 지훈을 잃은 슬픔을 말끔히 잊은 채 원주 생각에만 매달려 있었 다. 머리 속이 온통 원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도 울컥 원주가 보고 싶 은 마음이 불길처럼 뻗질러 오르면, 후두두 밖으로 뛰어나와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곤 하 였다. 그런 지훈 어머니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그녀가 옛날 같지 않고 어딘가 이상해졌다고 들 쑥덕거렸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것이었다. 주가 보아도 확실히 그녀는 이상해졌다. 하동으로 내려온 자 열흘쯤 지나서 지훈 어머니는 정매에게 편지를 썼 다. 원주 대리고 언제쯤 하동에 올 것인지를 묻고, 하동에 내려올 때 미리 연락을 주면 마중 을 나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보낸 지 열흘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답장이 없 자 지훈 어머니의 마음은 불이 붙은 듯 초조하고 다급해졌다. 미칠 것 만 같았다. 그녀는 끝 내 역으로 잘려가 정매한테 전화를 걸었다. 정매가 없다기에 원주를 바꿔달라고 했다. 파울 부가 누구냐고 꼬치꼬치 따져묻기에 하동 할머니라고 거짓말을 해서야, "아이고마, 원주 외 할머님이신 게로구먼요. 퍼뜩 바꿔드리겠심더." 하고 너스레를 떨고 나서 원주를 바꿔주었 다. "할머니? 나 원주야." 이내 원주의 탱글탱글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가깝게 울려나왔 다. 그녀는 순간 목이 메어왔다. "할머니, 엄마는 창주랑 선생님 만나러 가셨어요." 지훈 어 머니 쪽에서 말이 없자 원주가 다시 쟁쟁한 목소리로 나불거렸다. 지훈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러다가는 끝내 울컥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할머 니, 왜 그래? 할머니, 울어?" 지훈 어머니를 외할머니로 알고 있던 원주가 다급하게 소리쳤 다. 지훈 어머니는 울음을 그치려고 하였으나 감격과 슬픔이 한꺼번에 복받쳐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우리 강아지, 달 있었나? 할미는 괘않다. 그라믄... 우리 원주 잘 있그래이. 할 미는 우리 원주보고 잪어서 미치겠다마." 지훈어머니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 지훈 어머니는 답답한 마음을 삭일 수가 없어 죽은 아들의 친구인 박 문호를 불렀다. 박문호는 마침 겨울방학을 맞아 집에 와 있었다. "문호 너한테 할말이 있어 왔데이."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박문호를 그녀의 셋방으로 데리고 왔다. 그렇지 않아도 지 훈 어머니가 실성기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의 행동이며 말투 하 나 하나에 신경을 쓰며 후미진 골목의 막다른 집으로 옮겨온 그녀의 셋방까지 따라 왔다. "나 미치겠고마. 우째야 좋을지 모르겠능 기라." 마주앉자 지훈 어머니는 한숨을 섞어 푸념 처럼 말했다. "애 그러싱교? 그 동안 무신 일이 있었능교?" 박문호가 조심스럽게 지훈 어머 니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나 그 동안 부산에 가 있었던 것 알고 있제?" "예, 얼마 전에 식당에 들렸더니 부산으로 이사를 가셨다 카데예. 그래, 부산에는 와 가셨능교? 부산에서는 우예 살으셨능교?" "다시 하동으로 다시 오쎴다고요? 난 또 그란 줄도 모르고..." "문호야, 니 말이다. 그 정매라 카는 아 알제?" "알고 말고요. 그란듸 그것은 와 물으시능교?" 박문호 의 물음에 지훈 어머니는 한동안 대답을 못하고 턱을 쳐들어 천장만 쳐다보았다. 그녀는 원 주의 이야기를 문호에게 해야 좋은지 하지 말아야 할지를 곰곰 따져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 다. 문득 정매의 당부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그 사실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자신이 부산을 떠나올 때 한 번만 원주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숨 넘어 가듯 사정을 하였으나, 끝내 거절을 하고 만 그 소이가 괘씸하게 생 각되기도 하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하동에 내려와 편지를 했으나 답장조차 보내오지 않는 것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괘씸한 것, 지훈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정매를 원망하였다. "문 호 니, 우리 지훈이하고 정매흐고 을매나 깊은 사이였는가 아는 대로 말해 보그래이." 박문 호는 지흔 어머니가 느닷없이 죽은 지훈이와 시집가서 잘사는 정매와의 관계를 묻자 이상한 예감이 들어 이내 대답을 못하고 지훈 어머니의 표정만을 살피고 있었다. "갑자기 그것을 물으싱교?" "알아볼 것이 좀 있어서 안 그러나." "알아볼 것이 있다고요?" "우리 지훈이 살 았을 때 적에 그마가 너한테 무슨 비밀 말한 거 없었드나?" 지훈 어머니가 재차 물었지만 문호는 여전히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박문호로서는 지훈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갑작스럽게 지훈이와 정매와의 사이를 따져묻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짐직할 수가 없었다. "정매 씨 가 어머니한테 무신 말을 하던가예?" "그라이, 지훈이가 살았을 적에 무신 비밀 말헌 것 없 냐고 묻고 있지 않나?" "비밀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예." 박문호의 말에 지훈 어머니는 잠시 얼굴 표정이 굳어지는 듯싶더니 몇 번이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박문호는 그런 지훈 어머니 를 보고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 지훈 어머니는 누구에겐가 쫓기고 잇는 듯싶었던 것이다. "우리 지훈이흐고 정매 사이에 얼라가 있다 카이." 지훈 어머니는 서너 차 례 자리를 고쳐 앉더니 뚜벅 입을 열어 그렇게 말했다. 박문호는 얼핏 들은 그 말에 대해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어머니, 그기 무슨 말씀잉교?" "지훈이 핏줄이 있다 카이." "뭐라 고예? 지훈이 핏줄이라니예?" 박문호는 아무래도 지훈 어머니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별 로 놀라지 않은 말투로 가볍게 반문하였다. 그제야 문호는 지훈 어머니가 안절부절못해 하 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노?" "정매 큰 아들 원주가 우리 지훈이 핏줄이라 카드라. 정매가 나 헌테 직접 말했다 카이. 그래도 내 말을 못 믿겄나?" 박문호는 너무 눌라 할말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 것이었다. 정매가 시집을 갈 대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만은 모든 속내를 털어 놓은 지훈이도 그런 귀뜸을 한 적은 없었다. "정매씨 입으로 직접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 까?" 문호는 지훈 어머니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랬다 카이. 그 래서 부산으로 안 갔었나. 부산에 가서 지훈이 놈 핏줄 원주도 만났다 카이."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갑자기 눈시울이 크렁하게 젖었다. 그제야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란듸 말이 다." 지훈 어머니는 박문호에게 정매와 지흔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였 다. 그녀는 눈물을 훌쩍이며 정매를 원망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내가 말이다, 우리 지훈이 핏줄이 바로 그 원주놈이라 카는 정매의 말을 듣고부텀 죽을 생각일랑 집어치와뿔고 정매 말마따나 새 희망을 갖고 살락 안 했나. 그래서 부산으로 옮겨간 그제. 그란듸... 세상에 그 란듸, 우리 원주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그렇게나 눈물로 사정을 했건만 그 인정머리 없 는 것이 편지 답장도 안해주고..." 지훈 어머니는 마침내 눈물바람을 하면서 하소연을 하였 다. 지훈 어머니는 좀처럼 눈물을 거두지 않았다. "내사 우리 원주놈 보고 잪어서 몸살이 나 겄다 카이. 이를 우야면 좋겠노. 눈을 떠도 감아도 원주놈 얼굴이 눈에 선하게 밟혀 몬살겠 는듸 우야면 좋겠노."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가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문호를 보며 입을 열 었다.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는 한 동한 아무 말도 없이 박문호의 얼굴만을 짯짯이 들여다 볼뿐이었다. "이러시지 마셔요. 지훈이 핏줄이... 어머니 손주가 있는데 뭐이 서러워서 우시 능교? 이르케 우실일이 아니라 덩실덩실 춤이라도 춰야 하지 않겠능교." 박문호는 그렇게 지훈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라제. 그래서 내가 죽을 생각도 않고 다시 옛날 맹키로, 지난날 떡장사 함시로 지훈이 핵교에 보낼 때맹키로, 다시 살아볼라고 이리 안 허둥내노."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울음을 멈추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나서 다시 박문 호를 마주보았다. "원주라 카는 아이는 분명히 어머니의 손주놈이로구만료. 정매씨 입으로 그리 말을 했다니 틀림없지 않겠능교. 그라이 아무 걱정 마시고 원주가 잘 자라기만을 기다 립시오. 그라믄 언젠가는 원주가 커서 할머니를 찾아올 거 아니겠능교." "참말로 그럴까? 우 리 원주가 나를 찾아올 끼가?" "찾고 말고요." "아이다. 원주가 핼미를 찾아올 때꺼정 우예 참노. 내는 우리 원주를 당장에 찾고 싶은 기라. 그래서 내 손으로 키우고 싶은 기라. 옛날 내가 떡장사 함시로 우리 지훈이 핵교에 보낼 때맹키로 맣이다. 나 늙기는 했지마는 아직 원주를 키울 자신이 있능 기라. 내 힘으로 대핵교꺼정 보낼 자신이 있능 기라." 지훈 어머니 가 큰 소리로 흥분하여 말했다. 박문호는 할말을 잊고 그런 지훈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였다. "문호 니는 내가 다 살았다고 생각흐지 말그라이. 내 나이 이제 쉰 여섯 살 아이 가." 이제부터라도 또 세상을 살아갈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버틸 희망만 있다면 또 한 인생 을 살아갈 근력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만약 원주만 옆에 있다면 지난날 지훈이 때문에 고달품을 잊고 살아왔던 것처럼, 원주를 위해 몸이 바스러질 때까지 악착스럽게 일 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떡장사를 해서라도 원주 하나쯤은 훌륭하게 키워 대학까 지 보낼 자신이 있었다. 생각하면 그녀의 고달픈 생애에서 그래도 지훈이를 위해 열심히 살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았다. 지훈 어머니는 그 오달진 행복을 다시 맛보고 싶었 다. 그것은 고생이 아니라 삶의 보람이었던 것이다. 지훈이를 들쳐업고 하동으로 나와 떡장 사를 하면서 아들을 대학까지 보냈던 그 시절이 참으로 행복했던 것이다. 그 시절 그녀는 눈물 대신 땀을 흘렸기 때문에 삶의 고통과 슬픔이 무엇인지조차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때처럼 눈물 대신 흘리면서 삶의 보람을 찾고 싶었다. "내가 다 살었다고 생각하지 말그라이." 지훈 어머니는 원망하는 말투로 다시 말했 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나이가 이제 쉰 여섯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였다. "어머니, 와 내가 그것을 모르겠능교. 허지만 그 아이를 데려다 키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 데이. 그마는 정매씨 한테서 지금 행복하게 잘 자라고 있지 않능교. 그라고 정매씨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낀데, 어떻게 그 아이를 데려온다는 말인교?" 박문호는 고개까지 내 저으면서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원주를 데려다 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판단되었다. 설령 원주가 지훈이의 핏줄이라 해도 지금의 정매 남편이 그것을 용납해 줄 리 없을 터였다. "그라이 걱정이 아니겠나. 네 생각에 우찌하면 우리 원주를 데려올 수가 있 겠나?" 지훈 어머니는 박문호 옆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매달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말씀드렸지 않았능교. 우선 원주라는 아이가 지훈이의 핏즐이라는 것을 뭘로 내 세우겠능교?" "그마의 에미가 말헸다 카이. 나헌테 찾아와서 원주가 우리 지훈이의 자슥이 라고 똑똑히 나헌테 말했다 카이."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데이." "와 안되노?" "글세요, 그런 문제는 변호사를 찾아가서 물어봐야 안 되겠능교. 아마 친자확인 소송을 해서 재판을 해야 할 깁니다." 재판을 해야 한다는 문호의 말에 지훈 어머니는 크게 낙심한 표정이었다. "벤호 사를 찾아가야 헌다 이그제..." 지훈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박문호는 그말에 대꾸 를 하지 않았다. "재판을 해야 헌다 이그제..." 박문호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지훈 어머니가 다시 중얼거렸다. "재판을 하시려면 돈이 많이 들 거인디... 그라고 정매씨가가 원주는 지훈 이 자식이라는 거를 증언해 주어야 할끼고.. 보통 문제가 아닌 기라예." 박문호는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가 만약에 변호사를 찾아가서 법원에 친자확인 소송이라도 한다면 어쩌나 싶어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일이 그렇게 되면 정매가 그 큰 고통을 어떻게 감당해 날까 걱정되 었다. 그리고 정매가 재판정에서 원주가 지훈의 핏줄이라는 것을 증언해 줄 것 같지도 않았 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일을 벌이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박문호는 생각했 다. "벤호사를 만날라믄 어디로 가면 되는 기가?" 한참 후에 지훈 어머니가 고개를 번쩍 쳐 들고 큰 결심을 한 듯 뚜벅 물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변호사를 만나서 손자를 찾을 수 있 는 길을 알아보기라도 하려는 듯 자리를 고쳐 앉았다. "부산에 가야 하나?" "진주에 가시면 변호사는 만나실 수가 있지예. 그렇지만 괜히 헛수고만 허실 거니까 그만두시는게... 지훈이 도 그거를 원치 않을 거구만예." "니 무신 말을 그리 하나. 제 자식 찾아준다는디 와 지훈이 가 마다카겠나?" "그렇게 되면 정매 씨가 너무 불쌍하지 않응교. 정매씨가 어머니한테 비밀 로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는디... 그것을 세상에 까발린다면..." 그 말에는 지훈 어머니도 달 리 할말을 잃어버린 듯 대꾸가 없었다. 박문호의 말마따나 원주가 지훈이의 핏줄이라는 것 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정매가 크나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뻔하지 않은가. 지 훈 어머니는 입장을 자신과 바꾸어놓고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정매라 해도 그것은 감당키 어려운 일일 터였다. 그러나 지훈 어머니는 정매에 대한 원망스러운 생각이 울컥 솟구쳤다. 원주 사진 한 장만 보내달라고 해도 마다하고, 부산을 떠나올 때 한 번만 원주를 만나보게 해달라고 눈물로 하소연을 했건만, 독살스러은 정매는 끝내 모른 척하지 않았던가. "재판을 하자면 돈이 을매나 드나?" 지훈 어머니가 잠시 후에 다시 물었다. "참말로 재판을 하실랑 교?" "을매나 드나?" 이번에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많은 돈이 들 겁니데이." "논 한 마지기 값이면 되겠나?" 박문호의 말에 지훈 어머니가 되물었다. 지훈 어머니는 논 한 마지 가 값으로 재판을 걸어서 원주를 찾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몸을 토막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 돈을 마련해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논 한 마지기 값이라..." 지훈 어머니는 자신의 힘 으로 논 한 마지기 값을 벌자면 대충 몇 년이나 걸릴까 어림해 보았다. "논도 논 나름이지 예." "그라제. 글치만 아무리 상답이라 캐도 한 마지기 값이 사오백 만원 더 나가겠나?" "천 만원이라 캐도 겁 안난다. 억수로 벌어야제. 집 팔아서 지훈이 약값 외상 가프고 남은 돈으 로 게우 셋방을 얻고 오십 만원이 안 남았나. 그걸 밑천으로 삼아서 벌어야제. 오십 만원 밑 천으로 오백 만원 아니 천 만원을 맹글자면 몬해도 한 오년은 안 걸리겠나. 원주가 보고 잪 아도 오 년 동안 꾹 참겠고마."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에게 더 할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런 지훈 어머니를 말리지 않기로 하였다. 재판 비용을 마련하는 동안은 아무 탈없이 열심 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에 서서히 지훈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호 자신이 정매를 한 번 만나서 지훈 어머니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지훈 어머니의 말마따나 원주의 사진이나 한 장 주도록 하 고 1년에 한두 차례씩 만날 수 있게 해준다면, 지훈 어머니의 생각도 조금은 누그러질 것이 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미한테는 그일을 섣불리 꺼낼 수도 없는 일이라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렇다면 어머니, 어찌 하실랑교?" 박문호가 천천히 일어서며 물었다. "당장에 낼이라도 변 호사부텀 만나봐야겠고마. 그런 다음에 떡장사를 해서라도 재판 비용을 맹글어야 안 쓰겄나. 그라이 내 걱정은 말그라. 내 늙었으니 몸은 팔 수 없으니께, 몸이 아니라면 뭣이든지 팔게 고마. 내 쓸개라도 떼어서 팔 끼다." 박문호한테 속내를 털어놓았다가 아무 도움말도 얻지 못한 지훈 어머니는 약간 냉엄한 투로 말했다. "어머니, 그라믄 제가 내일 진주에 갈 일이 있으니 한 번 변호사를 마나보고 오겠심더."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를 직접 변호사아 만나게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재판 문제를 알아보겠다고 나섰다. "참말로 그래 줄 끼 가?"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닙니데이. 어떻게 하면 원주를 다시 찾아올 수가 있으며, 재판을 하게 되면 그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물어보는 것이 뭐 어려운 일이겠심꺼." "고맙다. 그라믄 낼 니가 진주에 좀 댕겨오그라. 내는 당장에 셋방부터 뺄란다. 그래야 떡장사를 시작할 수 안 있겠나."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지훈 어머니에게 다음날 진주로 변호사를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을 한 박문호는 부산행 버스를 탔다. 변호사 대신 정 매부터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지훈 어머니에게는 변호사를 만나고 왔노라고 거 짓말을 할 계획이었다. 그는 부산행 고속버스에서 정매를 만나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마음 속으로 준비를 하였다. 불쑥 지훈 어머니가 원주를 찾기 위해 재판을 걸겠다고 하더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재판을 걸어오기 전에 원주를 지훈 어머니에게 돌려주 라는 말은 더더구나 입밖에 내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버스를 내리자마자 터미널에서 정 매내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그녀가 받았다. 정매는 박문호의 전화를 받자 약간 놀 라는 목소리였다. 박문호는 그녀의 건조하게 가라앉는 목소리만 듣고도 그것을 가늠할 수가 있었다. "일부러 정매씨를 만나려고 올라왔심더. 시간이 있겠능교?" 박문호는 전화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를 만나려고 하동에서 일부러 왔다뇨? 무슨일인데료?" "만나보면 아 십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끼고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만 시간을 좀 내 주시이소. 그러면 여기 터미널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겠심더." 정매는 박문호를 만나주겠다고 하였다. 박문호는 터미널 안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그날로 되짚어 하동으로 돌아갈 양으로 두 시간 후의 버스표를 산 다음 정매와 약속한 다방으로 갔다. 정매는 박문호가 다방에 들 어가 10분쯤 기다리자 이내 모습을 나타냈다. "무슨 일인가요?" 정매는 자리에 앉으면서 다 급하게 물었다. 그녀는 이틀 전 둘째 창주를 데리고 선생님을 만나고 온 사이에, 외할머니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는 원주의 말을 듣고 무슨 일인가 싶어 하동 친정에 전화를 걸어보았었 다. 그러나 그녀의 친정 어머니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원주한테 울면서 전화 한 사람은 그녀의 친정 어머니가 아니라 필시 지훈 어머니라는 것을 알고 은근히 불안해하 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박문호가 일부러 그녀 자신을 만나러 부산까지 왔다고 하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무슨 일 있었어요?" 정매는 다시 물었다. 그녀는 지훈 어머 니한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지훈이 어머님한테 약간..." "그렇군 요." 정매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고 불안이 뒤엉킨 눈으로 박문호를 마주보았다. 그러 나 그녀는 박문호에게 지훈 어머니한테 무슨일이 생겼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훈이 어머님께서 부산에 한 달 동안이나 계셨다면서예? 나는 그것도 몰랐심더." 한참 후에야 박문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매는 그말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 쪽에서 먼저 핵심을 말해 주기를 기 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 지훈이 어머니께서는 아주 열심히 살지 않았능교. 모두가 정매 씨 덕택이라 캅디다. 정매씨가 용기와 희망을 주었기 땜에 죽기를 포기하고 그 동안 열심히 살 았다 캅디다." 박문호는 정매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매는 박문호의 그 말 에 다소 놀랐다. 박문호가 무엇을 말하려고 그렇게 서두를 꺼내고 있는 것인지 두려웠다. "희망을 주다니요?" 정매는 탐색적인 눈으로 박문호를 살피면서 물었다. 정매의 그 물음에 박문호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그렇게 되면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암튼 정매 씨가 아니었더라면 지훈 어머니는 아마 사는 것을 포기하고 지금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기라예. 지훈이 어머님께서 다시 옛날과 같이 식당에 나가 서 일을 하시게 된것도 다 정매 씨 덕이 아니겠심니꺼." "그래, 지금은 어떠신데요?" 정매가 시선을 빳빳하게 세우며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옛날로 돌아감심더. 정매 씨를 만나기 전 으로 말입니다. 다시 음식을 전폐하고 드러누워 삐렀다 아닙니꺼. 이러다가는 암만해도 초상 을 치게 될 것 같심더. 그라이 정매 씨한테 도움을 청하러 오지 않았능교." 그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게 도움을 청하러 오셨다구요?" 정매는 그렇게 반문하면서 얼마 전 지훈 어머니가 정매에게 보냈던 간절한 편지를 떠올려보았다. 그 편지에서 지훈 어머니는 원주의 사진 한 장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밤마다 원주 꿈을 꾼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원주를 만날 수 없다면 살아갈 기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전 화를 걸어서 언제쯤 원주를 데리고 하동으로 오겠느냐고 거듭 물으면서도 지훈 어머니는 계 속 울먹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매는 답장은 물론 하지 않았으려니와 지훈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도 말없이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던 것이었다. "제가 어떻게 지훈 씨 어머님을 도울 수가 있겠어요?" "지훈이 어머님을 이대로 돌아가시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겠능교. 다시 한 번 어머님을 만나주실 수 없겠심니꺼?" 박문호는 원주를 데리고 가서 지훈 어머니를 만 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말속에는 그런 뜻도 담겨져 있었다. 어쩌면 정매도 박문호 의 그런 말뜻을 헤아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박문호가 정매한테 다시 한 번 지훈의 어머니를 만나달라고 부탁을 하였으나, 그녀 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박문호는 그런 정매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 다. 그는 다만 지훈 어머니를 위해서 정매에게 부탁을 하러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언제쯤 이나 하동에 한 번 오시겠심니꺼?" 오랜 침묵을 깨고 박문호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글세 요... 아직은..." 정매는 애매하게 대답하였다. 박문호에게는 그것은 하동에 갈 수 없다는 말 과 같이 들렸다. 사실 그녀는 하동에 간다 해도 지훈 어머니를 만나보고 싶지는 않았다. 더 구나 원주를 지훈 어머니께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지훈 어머니를 가까이 하면 할수록 돌이킬 수 없는 상처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기실 지금까지도 그랬다고 생각했다. 지훈 어머니에게 삶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하여 한 말이 이렇게 감 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과 파문을 일으키게 될 줄은 몰랐었다. "하동에 오시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는구만요." 박문호는 다소 섭섭한 말투였다. 정매는 박문호의 그 말에 즉각적인 반 응을 나타내기가 싫었다. "지훈 어머님은 지금 큰 위기에 빠져 있심더." 박문호는 차마 지 훈 어머니가 원주를 찾기 위해 재판을 걸 생각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놓을 수가 없어 이야기 를 뱅뱅 돌리고 있었다. "다시 몸져누워 계시나요?" "그것은 아닙니다만... 이대로 두었다가 는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심더." "일을 저지르다뇨?" "암튼 달라지셨심더. 옛날 지훈이 어머님이 아닙니다. 앞 뒤 사리분별을 못한다 이거라예. 그라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어찌 알 겠십니꺼. 사람들은 그런 지훈이 어머님을 이상해졌다고 안 합니꺼. 그러니 정매 씨께서 꼭 한 번 하동에 오셔서 지훈 어머님을 만나주시이소." 박문호는 정매가 눈치챌 수 있도록 암 시를 주며 다시 한 번 간절한 목소리로 사정을 하였다. 정매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 로 시선을 멀리 창밖의 잿빛 하늘로 던졌다. "내가 가서 뭘 어떻개 도와줄 수가 있겠어요?" 그녀가 창밖으로부터 시선을 회수하여 박문호를 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원주를 한 번 데리고 와서 그냥 만나주기만 하시이소." 박문호는 용기를 내어 원주의 이름을 담았 다. 그러고 나서 약간 떠름한 마음으로 정매의 표정을 날카롭게 살폈다. "원주를요?" 그렇게 반문하고 있는 정매의 표정에 돌덩이처럼 굳어지면서 갑자기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였다. 박문호는 정매의 놀라운 표정을 보고 그의 입으로 원주의 이름을 말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 러나 이미 쏟아놓은 물이 아닌가. 정매는 분명 박문호가 원주의 이름을 말했을 때, 무엇인가 무거운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지 않았던가. 정매는 그같이 놀라 는 표정으로 그에게 불안스럽게 묻고 있는 듯 싶었다. "지훈씨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 던가요?" 정매의 그 말이 마치, 우리 원주가 지훈 씨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말하던가요, 라고 되묻고 있는 듯싶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너무도 딱딱하게 느껴졌다. 박문호는 차마 그녀 의 표정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아이들 방학도 했으니까 잠깐 외가에 데리고 와도 괜찮지 않겠능교." 한참 후에야 박문호는 궁색하게 말했다. 그러나 정매 의 딱딱하면서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한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외가에 가 자고 안 합니까?" 정매가 말이 없자 박문호가 물었다. "예, 가자고 해요." 정매는 맥빠진 목 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것 보이소 . 그라니께 아이들 데리고 한 번 오시이소. 일부러 외서 지훈이 어머님을 만나보는 것도 이상하니 아이들을 데리고 외가에 오는 길에..." 박문호는 애써 옹색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글쎄요. 한 번 기회를 봐서..." 정매는 여전히 애매하게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오실라 카믄 빨리 오시이소. 오죽하면 내가 부산까지 이렇 게 숨가쁘게 달려왔겠능교? 그라이 내를 봐서라도, 아니 죽은 지훈이를 봐서라도 되도록이 면 빠른 시일 안으로 한 번 왔다 가시이소. 그리 해주시겠능교? 그래야 지훈 어머님을 다독 거릴 수 있다 아입니꺼." 박문호의 간절한 부탁에 정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가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정매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충분히 알아차렸다. "문호씨 말뜻 다 알겠어요." 한참 후에 그렇 게 말하는 그녀의 굳은 표정이 다소 누그러진 듯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 한 구석에는 어딘가 침울한 그림자가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박문호에게 지훈 어머니가 그에게 원주의 말을 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박문호의 입에서 원주의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아, 지 훈 어머니가 그에게 원주 이야기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라믄 내는 이 길로 내려가겠심더." "저어...저어..." 박문호가 일어서는 순간 정매는 무엇인가 그에게 물 어보려고 지싯거리면서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박문호는 정매가 말 을 하기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끝내 다른 말은 하지 않고, 한참 동안이나 지싯거리다가 천천 히 일어섰다. 박문호는 그때 정매가 그에게 어떤말을 물어도 대답을 해줄 각오를 하고 있었 다. "그럼 먼저 나가겠심더." 박문호는 정매에게 눈인사를 하고 카운터로 걸어가서 차값을 계산한 후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미리 사놓은 차표를 바꾸기 위해 매표소로 향했다. 생각보 다 빨리 정매와의 만남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차표를 바꾸고 돌아섰을 때, 그는 정매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아직 돌아가지 않았능교?" 박문호가 놀란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냥 가시게요? 이렇게 오셨다가 갑자기 가시다니..." 정매는 아직도 그에게 하고싶은 말이 남아 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가야지요. 십분 후에 차가 있다 카네요." 박문호 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정매도 박문호를 행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인 사말을 하였는데, 그 목소리가 어딘가 공허하게 들려왔다. "이 달 안으로 한 번 왔다 가시이 소. 꼭 부탁합니데이." 박문호는 개찰구를 빠져나가면서 마지막으로 정매에게 부탁했다. 정 매는 여전히 공허하게 웃어 보이며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슴어슴 날이 어두워지기 시 작할 무렵에 하동에 도착한 박문호는 그 길로 역 앞에 있는 식당으로 지훈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지훈 어머니가 그날 식당에 나오지 않았다기에 다시 집으로 찾아갔다. 지훈 어 머니는 집에도 없었다. 집주인 여자의 말로는 아침에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 다.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가서 불을 켜고 앉아 기다렸다. 지훈 어머니는 밤이 깊어서야 큰 함지를 이고 돌아왔다. 지훈 어머니는 함지를 들고 불이 켜진 방으로 들어와서 는 박문호를 발견하자, "문호 네가 와 있을 줄 알고 서둘러 왔는 기라. 내사 오늘부터 떡장 사를 시작 안 했나." 하면서 생기 넘치는 얼굴로 벙싯거리고 웃었다. 지훈 어머니는 조금도 지친 모습이 아니었다. 옛날 지훈이를 공부시키기 위해 고달픔 다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떡 장사를 하던 때 모습 그대로였다. 박문호가 보기에 지훈 어머니는 옛날 지훈이를 학교에 보 내기 위해서 새벽부터 떡함지를 이고 나가서 밤이 늦어서야 돌아오면서도 언제나 생기가 넘 쳤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싶었다. 박문호는 그런 지훈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았 다. "첫날인데도 오늘 장사는 잘했데이."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박문호에게 주려고 남겨왔 다면서 함지 안에서 비닐에 싼 찰떡 뭉치를 내놓았다. 옛날에도 지훈 어머니는 밤늦게 집에 돌아올 때마다 이렇게 떡을 남겨 가지고 와서는 지훈이와 그의 친구들에게 쥐어주곤 하였 다. "그래, 니 진주에 가서 벤호사 만나고 왔나?" 지훈 어머니가 박문호 옆으로 바짝 다가앉 으며 물었다. "예, 진주 갔다가 바로 어머니 만나뵈러 여기 오지 않았습니꺼." 박문호는 그 렇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찜찜하여 한사코 시선을 피했다. "그래, 뭐라 카드 나?" 지훈 어머니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박문호는 잠시 대답을 못하고 멀뚱히 앉아 있 기만 하였다. 이미 부산에서 고속버스를 타는 순간에 지훈 어머니에게 할말들을 준비해 두 었지만 막상 거짓말을 하려고 보니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뭐라 카드나? 원주 를 찾을 수 없다 카드나?" 지훈 어머니가 다소 불안한 표정을 해 보이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닙니데이. 원주를 찾을 수 있다 캅디다." 박문호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 기 참말이나? 그래, 벤호사가 우리 원주를 찾을 수 있다 캤다 그 말이제?" "그렇다니께요. 그란듸... 지가 말씀드린 것처럼 소송을 제기해야 할 것이라고 합디데이. 소송을 제기해서 친 자라는 거가 확인되어야 한다 캅디데이." "소송이라 카는 게 재판 아이가?" "맞심데이. 재판 을 해야 한다 카드만요." "나도 재판을 해야 원주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능 기라. 나도 마, 오늘 아침 나절에 대섯방에 찾아가서 알아봤능 기라." "대섯방에 가셨다고 했능교? 정매 씨가 낳은 원주가 어머니 손자라는 말을 했능교?"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가 대서소 사 람들에게 원주의 이야기를 까발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언성을 높이며 다급하게 물었다. 지훈 어머니가 대서소에서 그 이야기를 까발렸다면, 당장에 그 소문이 하동 시내에 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정매는 다시는 하동에 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박문호는 생각했다. "아이다. 원주가 내 손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비밀로 허구 싶구마. 원주를 찾을 때까지는 하동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지가 않구마. 숨기고 있다가 원주 를 찾은 다음에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구마." 지훈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젖은 얼굴을 꿈꾸 듯 말하였다. "그란듸 말입니데이, 원주 어무이가 재판정에서 원주는 지훈이 아들이라는 증 언을 해야 한다고 헙디다." 박문호의 그말에 지훈 어머니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 매 지 입으로 나헌테 원주가 지훈이 아들이라고 말했으니, 재판소에 가서도 그리 말 안해주 게겠나?" 지훈 어머니는 자신 있게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어진지 미심적은 듯한 그림자가 얼굴에 맴돌았다. 과연 정매가 재판정에서 원주가 지훈이의 핏즐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확신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지훈 어머니의 표정은 이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라이 어머니께서는 정매 씨를 너무 귀찮게 하지 마시이소. 정매씨를 성가롭 게 허시면 귀찮아서 증언을 안 할 끼 아입니꺼. 그라이 어째든지 그저 정매 씨 맘을 살살 얼러야 하는 기라예. 내 말 알겠십니꺼? 물론 저엉 정매씨가 증언을 하지 않겠다면, 혈액을 감정하는 방법도 있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정매씨 증언이 효과가 안 있겠능교. 만약에 어머 님이 원주 보고 잪다, 원주 사진 보내라 험서 정매씨를 귀찮게 한다 치면 증언을 번복하게 될지도 모르지 않겠심니꺼." 그러면서 박문호는 되도록이면 정매를 좋게 구슬리는 방법만이 도움이 되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지훈 어머니는 박문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가 이르 는데로 하겠노라고 약속을 하였다. "하믄 재판 비용도 알아봤나?" 한참 후에 지훈 어머니기 뚜벅 물었다. "알아봤심더. 예상했던 대로 돈이 많이 들겠드 그만요." "얼매나 들겠드나? 한 오백만 원이면 안 되겠드나?" 지훈 어머니는 마치 수중에 그만한 돈이 준비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우선은 그 정도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돈이 어디 있능교?" 박문 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훈 어머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니는 걱정 말그래." 그러면서 지 훈 어머니는 자신 있게 웃어 보였다. 박문호는 최근 들어 지훈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처음 본 것 같아,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그만힌 돈이 어디서 날랑교?" "그 돈 이년 동안이면 벌 수가 있고마. 내 오늘 얼마 벌었는 줄 아나?" 지훈 어머니는 그러면서 입고 있는 짙은 밤색의 통치마를 걷어올리고 속바지 주머니에서 지전 나부랑이들을 방바닥에 쏟아놓았다. 그러고는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 지전을 펴서 가지런히 모으고 100원짜리며 500원짜리 동전 들을 모아 셈을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떡장사해서 만사천이백원이나 벌었고마. 하루에 만 사천원이면 한 달이면 얼마꼬." 지훈 어머니는 손가락을 꼽아지며 셈을 하고 나서, "한 달이 면 사십이만원이고마. 삼십만원만 잡고라도 열 달이면 삼백만원, 스무 달이면 육백만원이 맞 제? 그라이 넉넉잡고 이 년이면 오백만원 벌어 갖고 우리 원주 안 찾겠나?" 지훈 어머니는 밝게 웃어 보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하였다. 박문호는 그런 지훈 어머니의 모습이 보기에 참 으로 좋았다. 그래서 그도 따라서 밝게 웃었다. 지훈 어머니는 다시 젊어진 듯 싶었다. 그녀는 새벽에 집을 나와 떡집에 가서 떡을 받아 서 함지에 이고, 역과 버스정류장을 한 바퀴 돌아 장터 쪽으로 나왔다. 역 대합실과 버스터 미널의 새벽 손님들을 상대로 떡을 팔아보려고 하였으나, 옛날 같지 않게 정류장에서는 별 로 재미를 보지 모사였다. 해가 머리 위로 덩싯하게 떠올라 한낮이 다 되어서 장터거리로 나왔는데도 아직 떡함지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훈 어머니는 걱정을 하지 않 았다. 장터거리의 옛 친구들이 해가 지기 전에 떡함지를 응근히 비워주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터거리에서 가게를 차리고 있는 사람들은 옛날 지훈 어머니와 함께 역 전에서 떡장사나 국수 장사를 하던 친구들이었다. 그녀들은 이제 어지간히 자리를 잡은 셈 이었다. 그들은 지훈 어머니가 다시 떡함지를 이고 나타나자, 옛날 정을 생각해서 해가 지기 전에 떡함지를 비워준 것이었다. 가게의 주인이 된 옛 친구들 중에는 벌써 손자를 보아 할 머니가 된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그들은 외아들 지훈을 위해 고생한 보람도 없이 아들을 잃 게 된 그녀를 무척이나 안쓰러워 하였다. "점백이, 퍼뜩 들어와서 손 좀 녹이그라. 떡 사묵 는 사람도 없는듸 와 청승맞게 정그장에는 들랑거려쌌노. 싸돌아댕기지 말고, 여그 앉아서 불이나 쬐그래이." 지훈 어머니가 장터거리 건어물 가게 앞을 지나자, 미리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한 듯 총무상회 여주인 충무댁이 밖으로 뛰어나오다시피 하며 떡함지 를 받아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지훈 어머니도 하는 수 없이 충무상회 안으로 따라 들 어갔다. "모두다 떡 사묵다 뒈졌능가, 와 이리 못 팔았노?" 충무댁이 떡함지를 받아들고 가 게 안으로 들어가 나무탁자 위에 놓고 들려다보며 말했다. "요새 젊은 사람덜은 떡을 묵을 줄 모르는 모양인갑다." "그라제, 우리 막둥이놈 말이, 요새 아이들이 제일 묵기 싫은기 밥 이라 하드라. 우리 시절에는 제일 묵고 싶은 것이 밥이고 떡이 아니었나. 그란듸 요새 아이 들은 밥이 제일 묵기 싫은 거라 카이 떡이 팔리겠노. 그래도 떡을 좋아했던 시절이 살 만했 제." 그러면서 충무댁은 떡함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떡을 한 움큼 집어내어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주었다. "봐라. 그 떡 처묵고 남도상회 아줌마랑, 쌀집 뚱뚱이, 그리고 길 건너 부 산식당 꼬맹이, 이발소 옆집 철물상회 함씨한테 가서 싸게 떡 묵으로 오라 하그래이." 충무 댁은 그러면서 그날의 떡은 모두 자기가 사겠다고 하였다. "떡값이 모두 을매가?" 충무댁이 돈궤에 손을 넣으며 물었다. 지훈 어머니는 난로 옆에 앉아서 감격스러운 눈길로 충무댁을 건너다보았다. 오늘만은 충무댁의 신세를 지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고 하였는데 또 붙잡히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였다. 지훈 어머니는 충무댁을 볼 때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이 더욱 한스러웠다. 충무댁과 지훈 어머니는 오랫동안 역 앞에서 나란히 쪼그 리고 앉아서 떡장사를 해왔었다. 지훈 어머니는 장사를 해서 모은 돈을 옹근히 지훈이 뒷바 라지에 댔고, 아들 둘에 딸 하나인 충무댁은 자식들 공부시키는 대신 돈을 번 족족 땅을 사 서 장터거리 요지에 가게를 잡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비록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두 아들은 모두 서울에 나가 돈벌이를 하여 기반을 잡았으며, 얼굴이 반반하게 생긴 딸도 진주에서 큰 식당을 하는 총각한테 시집을 가서 부족한 것 없이 잘살고 있는 터였다. "팔자 는 타고난다 카더니 충무댁과 나를 두고 헌 소리고마." 지훈 어머니는 부러운 눈으로 충무 댁을 바라보면서 푸념처럼 말했다. 남달리 욕심도 많고 오기도 만만치 않던 지훈 어머니였 다. 그녀는 떡장사해서 번 돈을 지훈이에게 옹근히 쑤셔박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두고 보래이. 후담에 우리 지훈이 출세하면 내 코가 한치라도 더 높아질 기고마. 꼭 두고 보그래 이,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공글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철썩같이 믿었던 지훈이가 감옥에 들어가고 출옥하자마자 세상을 떠나버리자, 그녀의 오기와 억척은 물안개처럼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러던 지훈 어머니가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 억척을 부리며 살아가려는 것을 본 그 녀의 옛 친구들은 크게 감동하였고, 어떻게 해서든지 힘이 되어주고 싶어했다. "어저께도 낮 에 떡 묶고 배가 더부룩해서 저녁에는 숟가락 잡아 보도 못했다 카이." "오늘은 집에 좀 싸 갖고 갈란데이. 그라이 한 오천원 어치만 싸 주그래이." 잠시후 남도상회 여주인이며 쌀집 뚱뚱이, 그리고 부산식당의 땅딸보 아주머니가 충무상회로 들어섰고, 그 뒤로 광양철물점 안 주인도 손을 휘젓고 들어왔다. 모두 옛날 지훈 어머니와 함께 떡장사며 채소장사, 국수장사 를 하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돈을 어지간히 모아 살기가 제법 택택해졌다. 지훈 어머니는 그들 옛 친구들을 하나하나 부러운 눈으로 보았고, 그들은 지훈 어머니가 안쓰러워 다독거 려 주었다. "그래, 어서 떡이나 묵어보자꾸나. 떡 묵기 시합을 한다면 왕년에 떡장사 당할 사람이 있겄나." 충무댁, 지훈의 어머니 등과 함께 떡장사를 같이 했던 철물점 여자가 떡함 지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녀 역시 다른 친구들과 같이 아직 50줄인데도 젊어서 고생들을 많이 한 탓으로 60이 훨씬 넘어 보였다. 그 중에서도 지훈 어머니가 가장 겉늙어 보였다. "오늘은 내가 살 끼고마. 내일은 뚱뚱이, 모레는 남도상회, 글피는 부산식당, 그글피는 철물 점이 사그래이. 그라믄 닷새 만에 한차례씩 안 돌아오겄나. 그래서 우리 불쌍한 지훈이 엄씨 떡집 하나 채려주자꼬마." "좋데이. 떡은 우리가 을매든지 묵어줄 끼다. 내 평생 떡 묵다 배 터져 죽었다는 소문 몬 들은 기라." 그러면서 초로의 늙은이들은 떡함지에 둘러앉아 떡을 먹기 시작했다. 지훈 어머니의 젊은 시절 친구들은 순식간에 떡함지를 비우고 떡값을 계산 해 주었다. 그녀들은 지훈 어머니가 달라고 한 떡갑보다 훨씬 후하게 계산을 해주고 나소 함께 어울려 시간을 보내고 날이 저물면 돌아가라고 붙잡았다. 그러나 지훈 어머니는 이제 신세가 축 늘어진 그녀들과 함께 어울려 노닥거릴 수가 없었다. 원주를 찾기 위해서는 하루 라도 빨리 재판 비용울 마련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옛 친구들에게 원주 말을 하고 재 판 비용을 도와달라고 하면 그만한 돈은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손자를 찾고 싶었다. "내가 여기 엎어져서 자네들하고 옛날 이야기하믄서 놀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허나 내가 자네들 모양으로 그렇게 한가헌 몸이 아닌 기라. 내는 이 년 안으 로 오백 만원을 맹글어야 하는 기라. 오백 만원을 맹글기꺼지는 잠시도 노닥거릴 여유가 없 다 카이."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빈 떡함지를 들고 일어섰다. "혼자 사는데 뭐가 그리 답 답해서 돈타령이여?" 지훈 어머니를 끌고 들어왔던 충무댁이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비쭉거 리며 물었다. "오백 만원을 맹글어야 헌다 카이." "오백 만원? 그 돈은 와?" "우리 원주..." 순간 지훈 어머니는 스스로 놀라며 말끝을 흐려버렸다. 그녀는 아직 친구들에게 지훈의 핏줄이 있다는 사실을 까발리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하였다. "원주가 누꼬?" 충무댁이 관심을 나타내 보이며 되물었다. "아이다. 아무것도 아니라 카이." 지훈 어머니는 다급하게 부인을 하며 충무상회에서 나가려고 하였다. "점백이네한테 무신 곡절이 있는 모양이라. 오백 만원 이 필요허다 캤는데 어디 쓸 것인지 말해 보그라이. 그까짓 오백 만원 친구들이 몬 도와주 겠나? 안 그러나 뚱뚱이." 충무댁이 지훈 어머니를 붙들어 세워놓고 나서 친구들을 둘러보 며 말했다. "점백이네, 말해 보그래이. 돈 오백 만원이 와 필요허나?" 쌀집 뚱뚱이도 안쓰럽 고도 애절한 눈으로 지훈 어머니를 보며 물었다. 그녀들은 젊었을 적에 정수리의 머리털이 닳아 없어지도록 임질을 해가면서 함께 고생 고생했던 처지로, 자기네들은 이제 이만 하면 살 만하다 싶어 기반을 잡았는데도 점백이네만 어렵게 된 것이 보기에 안타까웠던 것이다. "아이다. 아무것도 아니라 카이. 그라믄 오늘은 이만 갈란다. 내일 또 올 테니 떡이나 많이 묵어들 주그래이." 지훈 어머니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충무상회를 나왔다. "떡 사이 소. 인절미 콩떡 달떡 백설기 사이소." 지훈 어머니 점백이네는 떡집에 들러 다시 떡을 한 함지 받아이고 골목으르 누비며 목청껏 소리쳤다. 이 날따라 그녀의 목소리는 카랑카랑 생 기에 넘쳐 있었다. 그녀는 날 듯한 기분이었다. 지훈 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떡장사를 했 던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때처럼 고단한 줄을 모르고 덤성거렸다. "떡 사이소." 지 훈 어머니는 긴 골목을 휘어들면서 다시 목청을 돋구었다. 떡이 팔리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 았다. 그녀는 부잣집 아이들이 떡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되도록 이면 변두리를 꿰고 돌았 다. 변두리에는 옛날 사람들이 모두그대로 살고 있었으며, 그들 옛날 사람들은 떡을 아직 좋 아했다. 더러 그녀가 옛날에 떡장사 하던 시절에 낯이 익었던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아이고마, 여태 떡장사를 몬 면했능교? 그때가 은젠데예." 하면서 혀를 끌끌거리며 떡을 사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훈 어머니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우리 손자 때문에 안 그라요. 손자놈 대학꺼정 보낼라꼬 이라지예. 그 래도 하나도 고단하지 않고 재미가 옥실옥실허는 기라예." 라고 말하곤 하는 것이었다. 젊었 을 적에 떡장사 하던 점백이네를 알아본 초로의 노친네들은 어김없이 반가운 반 동정심 반 으로 떡을 사주었다. 그 재미로 그녀는 되도록 이면 변두리를 돌았다. 읍내 복판에는 외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옛날의 그녀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드물었으며, 그 만큼 떡도 잘 팔리지가 않았다. 그날도 지훈 어머니는 해가 설핏하게 기울어서야 두 함 지째 떡을 팔고 지친 몸으로 휘적휘적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몸은 비록 휘청거렸지만 마 음만은 조금도 지치지가 않았다. 요즘 같아서는 정말이지 사는 맛이 소태 껍질처럼 그렇게 쓴 것만은 아니었다. 완연히 밤이 되어서야 아무도 반기는 사람 없는 집으로 돌아오자 뜻밖 에도 정매한테 편지가 와 있었다. 까막눈인 그녀는 처음에 그 편지가 정매한테서 온 것인 줄도 모르고 무턱대고 겉봉을 북 찢었다. 그랬더니 편지 봉투 안에서 책가방을 메고 서서 활짝 웃고 있는, 그립던 원주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원주의 사진이 나오자 지훈 어머니는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넋을 잃고 우두커니 원주의 사진을 들여다 보다가는 눈시울이 펑 젖고 말았다. 그녀는 활짝 웃고 있는 원주의 얼굴을 볼에 대고 마구 비벼댔다. 그녀는 얼마 동안 그렇게 원주의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훌쩍이고, 그러다가 다시 눈물이 촉촉한 볼에 대고 비벼보기도 하면서 고달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그녀는 편지 봉투 안에서 짤막하게 씌어 있는 편지를 꺼내들고 밖으로 나왔다. "상길이 어마이, 이 펜지좀 읽어주이소." 지훈 어머니는 오른손에 원주 사진을 왼손에는 봉투 속에서 꺼낸 편지 를 들고 집주인의 부엌으로 띄어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마침 상길이 아버지는 조합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상길의 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다 말고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얼굴을 지 훈 어머니와 그녀가 들고 있는 편지며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이 펜지 좀 읽어주이소. 내가 까막눈이 아닝교." 지훈 어머니가 집주인 여자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상길의 어머니는 무심 히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읽었다. 그 동안 안녕하신지요? 원주의 사진을 보냅니다. 방학중에 원주데리고 하동에 한 번 내려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상길의 어 머니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지훈 어머니를 보았다. "무슨 이런 펜지가 다 있당교? 전보도 아니고 펜지도 아니고 원...." "그뿐잉교? 다른 말은 없능교? 우리 원주 언제 온다고 안 써 있능교?" 지훈 어머니가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물었다. "다시 읽어드릴 테니 잘 들어보이소." 그러면서 집주인 여자는 편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것뿐잉 기라 예. 그란듸 원주가 누구고 이 펜지를 보낸 사람은 누눙교?" "이놈아가 우리 원주라예." 지훈 어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원주의 명함 크기 만한 사진을 한참 동안 볼에 비벼대고 나서 상 길 어머니한테 넘겨주었다. "이 아가 누궁교? 눈빛이 번쩍이는 기 아주 영리하게 생겼구마." 집주인 여자가 원주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하자, 지훈 어머니는 오달진 생각에 연신 벙싯 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었다. "이 아가 누궁교?" 집주인 여자가 원주의 사진을 돌려주며 다시 물었다. "그 마가 우리 원주라예." "원주라 카믄 아주머니하고 어찌 되능교?" 지훈 어머니에게 일점 혈육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집주인 여자로서는 사 진 속의 아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기실 손바닥만한 하동읍 안에 서 지훈 어머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젊어서 홀몸이 되어 역 앞에서 떡장사를 하 며 외아들을 대학까지 보냈는데, 엉뚱한 사고를 저질러 감옥살이를 하다가 암에 걸려 출감, 끝내 세상을 뜬 후 의지가 없어 고단한 신세가 되어버린 그녀의 처지를 언짢게 생각하지 않 은 사람이 없던 터였다. 집주인 여자가 원주와 어떤 사이냐고 묻는 말에 지훈 어머니는 하 마터면 큰 소리로 자랑스럽게 내 손자라요라고 말해 버릴 뻔하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후유, 한숨을 몰아쉬었다. "점백이 아주머이허고 친척이 되능 교?" 지훈 어머니가 대답을 못하자 집주인 여자가 다시 반문하였다. "맞는 기라. 우리 친척 인 기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정 동생의 딸이 낳은 아들인 기라." 지훈 어머니는 엉겹결에 그렇게 대답하였다. "그라믄 점백이 아주머니가 갸의 이모할머니 되시는구만." "맞구마. 그 라이 내 손자 아이가." 지훈 어머니는 대답을 하면서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펜지에는 방학 때 조카가 원주라 카는 아이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드구만예. 점백이 아주머니한테 손자가 생겼으니 을매나 좋으시겠능교." "좋다마다. 어깨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다 아이가." 그 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정말 어깨춤을 추기라도 할 것처럼 사뭇 어깨를 들먹거리는 것이었 다. 그런 지훈 어머니의 모습에 집주인 여자가 킬킬거리고 웃었다. "핏줄이라는 기 그리도 질기고 중한 긴가..." 집주인 여자는 지훈 어머니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동안 사는 것 답지 않게 마지못해 시들어가고 있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점백이 아주머니가 요 며칠 사이에 전혀 딴사람으로 변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지훈 어머니는 원주 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잤다. 그녀는 새벽녘까지 원주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훌쩍거리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희번하게 동이 터올 무렵 얼핏 눈을 감았다. 그리고 꿈속에서 원주를 만나보았다. 꿈속에서 만나본 원주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다 큰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지훈이가 부산에 가서 대학교에 다니던 때와 비슷해 보였다. 그 러나 꿈속에서 청년이 된 원주가 장가를 들어 증손자를 낳는 것까지도 보았다. 그러나 꿈속 에서 정매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그렇게 다행스럽게 생각될 수가 없었다. 꿈을 꾸느라 그녀 는 해가 떠올라 햇살이 문틈으로 기어들어 방바닥을 핥아댈 때에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 러나 그녀는 꿈이 너무나 오달져 늦잠을 잔 자신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꿈 을 다시 꿀 수 있다면 또다시 잠들고 싶었다. 아니 영원히 잠들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기까 지 하였다. 원주의 꿈을 꾸느라 늦잠을 잔 지훈 어머니는 곧장 떡함지를 이고 나가지 않았 다. 그녀는 비닐로 주머니를 만들어 원주의 사진을 넣고 다시 긴 끈을 매달아 허리띠에 묶 었다. 그러곤 비닐 주머니 속에 넣어둔 원주의 사진을 언제든지 꺼내볼수 있도록 허리춤에 찔렀다. 그러고 나서야 떡함지를 들고 떡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떡집까지는 담배 한 대 참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으나, 그곳까지 가는 동안 다섯 번도 더 원주의 사지을 꺼내보았다. 그러느라 떡집에 이르기까지 평소보다 30분이 더 걸렸다. 원주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마치 원주와 손을 잡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혼잣말을 하곤 했다. "아이고 내 강아지, 아침밥은 잘 묶었나? 밥을 많이 묵어야 무럭무럭 크는 기라. 그라고 이 할무이 생각도 좀 했나? 할무이 생각 많이 했다꼬? 오야오야, 내 손자 참말로 착허데이. 내도 어젯밤에 네놈 장개 가는 것을 보았구마. 그리고 네 색시가 내 증손자를 안 낳았나. 니도 할무이 꿈 꾸었다고? 아이고 착허 데이. 내는 네노무 자슥 생각만 허믄 어깨츰을 덩실덩실 추고 싶은 기라. 원주야, 할무이 보 고 잪어도 쪼금만 참그래이. 할무이가 곧 너를 찾아올 끼다. 그때까지는 보고 잪아도 참허야 헌데이. 그 대신에 꿈에서 만나면 안 되겄나?" 지훈 어머니는 원주의 사진을 들여다보며서 중얼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러는 지훈 어머니를 보고 미친 여자 보듯 혀를 차면서 흘 끔거렸다. 그녀는 떡집에서 떡을 받아 읍내 변두리 마을을 돌면서도 몇 번이고 원주의 사진 을 꺼내보곤 하였다. 그 때문에 그날은 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나 다른 날에 비해 장사가 되 질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떡을 파는 것보다도 원주 사진을 꺼내보면 서 중얼거리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날은 꺼내보면서 중얼거리는 재미에 시긴 가는 줄을 몰랐다. 그날은 장터거리 옛 친구들에게 가지 않았다. 날마다 그 친구들을 찾아다 니며 신세를 지는 것도 미안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지훈 어머니는 해질 무렵에야 겨우 떡함지를 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터거리 옛 친구들을 찾아갔다. 그녀는 언제나 그 랬던 것처럼 충무상회로 먼저 찾아갔다. "오늘은 와 이제야 오나. 낮에부터 친구들이 안 기 다렸나. 뚱뚱이, 부산식당 떠벌이, 남도상회 악바리가 멫 번이나 점백이 안 왔느냐고 들여다 보고 갔데이." 옛 친구 충무댁은 언제나 변함없이 점백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면서 충 무댁은 언제나 그랬듯이 떡함지부터 받았다. "오늘은 떡함지가 와 이리 개봅나?" 충무댁이 떡함지를 들여다보더니, "와 빈 함지가? 와 떡장사 집아치와뿟나?" 하면서 지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와 오늘은 빈 떡함지가?" 충무댁이 떡함지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물었다. "내사 오늘은 떡장사 허로 온 기 아니고 친구로 온 거제." "와? 떡장사 하믄 친구가 아니란 말이 가? 우리가 은제 자네를 떡장사라고 친구 대접 안 헌적 있었드나? 나도 와 옛날에는 떡장 가 아니었나? 점백이네 그말을 들으이 참말로 섭섭데이. 우리가 은제 자네헌테 그리 섭섭케 대하드나?" 충무댁은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눈을 흘겼다. "아니라 카이. 내 은제 자네덜헌테 섭섭하다 캤나? 그기 아니라 오늘은 자네덜헌테 쏘주 한잔 살라고 맘묵고 왔는 기라." "뭐 라꼬? 우리헌테 술을 산다꼬? 그래 점백이네가 무신 일로 술을 사겠다 카나?" "암턴 친구들 다오라 그러래이." 지훈 어머니의 말에 충무댁은 심부름하는 아이한테 근처의 친구들을 모 두 불러오라고 시켰다. "야야, 오늘은 떡 묵으로 오라는 기가 아니고, 술을 마시로 오라 그 러래이." 충무댁은 가게를 나가는 아이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점백이한테 좋은 일이 란 뭐꼬? 우리헌테 술을 살 만한 일이 뭐꼬 잉? 어디서 영감쟁이도 하나 물었나?" 충무댁이 실실거리며 물었다. "이 나이에 영감쟁이라니... 내사 자네들헌테 아는 대로 지훈이 애비 뒈 진 뒤로 사나 살 냄새라고는 한 번도 몬 맡았지 않았나. 그런 내가 이제 무신 영감쟁이가?" "맞다, 맞다. 점백이네 수절한 기는 우리가 다 아는 일이고마. 그라믄 무신 좋은 일이 생겼 나? 오늘은 빈 떡함지를 들고 와서는 술을 사겠다 카이 무신 영문인지를 모르겠고마." 그때 지훈 어머니는 허리춤에서 원주의 사진을 꺼내들고 넋나간 사람 모양 짯짯이 들여다보기 시 작했다. 그런 지훈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충무댁은 지훈 어머니와 비닐 봉지 속의 원주 사진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그 아가 뉘꼬?" 충무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노무 자슥이..." 지훈 어머니는 말을 꺼내려다가 말을 이내 얼버무리고 말았다. 친구들에 게 아직은 원주의 이야기를 까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 아이 가 뉘간듸 비닐 주머니 속에 넣어갖고 댕기믄서 천덕을 부리노?" "천덕? 천덕을 부린다고?" 순간 지훈 어머니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다시 싱긋 읏으며 충 무댁을 마주보앗다. 잠시 후에 지훈 어머니의 옛 친구들이 충무상회로 모여들었다. "아니 오 늘은 슬을 마시라꼬? 와 점백이네가 떡장사 집어치우고 들병장사로 나섰나?" 지훈 어머니의 옛 친구들은 충무상회 안으로 들어서면서 한마디씩 퉁겨댔다. 그러나 그녀들의 말에는 담배 씨 만큼도 악의가 없었다. 그냥 점백이네가 술을 사겠다는 말에 적이 놀라는 표정들이 있었 다. "내사 오늘은 자네들헌테 술 한잔 살라꼬 맘묵고 안 왔나." 지훈 어머니는 기분 좋은 얼 굴로 옛 친구들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자신 있게 말하였다. "무신 일이가? 와 이노무 예편 네가 술을 산다 카노?" 뚱뚱이가 충무댁에게 대신 물었다. "내도 모르겠다마." 충무댁은 애 매한 얼굴로 지훈 어머니를 보았다. "와? 점백이가 사준 술을 마시믄 입이 부르트기라도 한 다 카드나?" 지훈 어머니가 밉지 않게 친구들을 흘겨보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의 검은 그림자 한 가닥 머물러 있지 않고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여러 친구들은 점백이네의 그런 얼굴을 참으로 오랜만에 본 것 같았다. 옛날 외아들 지훈이의 뒷바라지를 위해 떡함지 를 이고도 밝은 얼굴로 살아가던 그 모습을 다시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 런 점백이네가 보기에 좋았다. "좋다 카이. 술 사준다는데 누가 안 마시겠나. 그란듸, 이유나 알고 마셔야 될 거 아니가? 우리 점백이헌테 무신 좋은 일이 있어 술을 사는지 알고 마시믄 술맛이 더 안 나겄나? 혹시 점백이헌테 영감쟁이가 생긴 거 아니가?" 남도상회 여자가 버릇 처럼 작은 눈을 꿈적거리면서 말했다. "영감쟁이는 안 생겼다 카드라." 충무댁이 남도상회 여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충무상회에 모인 친구들은 일제히 눈을 꿈적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는 점백이헌테로 시선이 몰렸다. 그들은 점백이네 얼굴에서 무슨 큰 비밀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탐색적인 시선을 못박았다. 그때 점백이네는 허리춤에서 비닐 봉지에 든 원주의 사진을 꺼내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녀의 친구들이 점백이네 옆으로 바짝 다가앉아서는 그녀가 들고 있는 비닐 봉지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았 다. "이 사진 누꼬?" "이 아그가 누군데 그라나?" 그녀의 여러 친구들이 비닐 봉지 속의 원 주 사진을 들여다보며 한마디씩 물었다. 그러나 점백이네는 원주에 대해서 좀처럼 말을 하 지 않고 계속 사진에 입만 맞추었다. "점백이네가 와 이라나? 점백이네 으디 아프나?" 친구 들은 점백이네의 이상스러운 행동에 의아심을 품은 듯 하였다. 점백이네는 친구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듯한 눈길이 마음에 가시처럼 걸렸다. 아무래도 친구들이 자신의 행동을 비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네들, 이노무 자슥이 누군 줄 모르제?" 지훈 어머니가 친구들 앞 에 빌 봉지 속의 원주 사진을 디밀어 보이며 물었다. "누꼬?" 충무댁이 여전히 이상한 눈으 로 점백이네를 흠짓거리며 물었다. "내사 이노무 자슥 때문에 희망을 갖고 산다카이. 이노무 자슥이 아니었으면 내는 아마 칵 죽어뿔고 말았을 끼라. 이노마가 나를 살렸줬다 카이." "뭐 라꼬? 이 아그가 점백이를 살려줬다꼬?" 친구들은 점백이네의 아리송한 말에 다시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점백이네가 이상하다는 눈치들이었다. 그러면서 친구들은 애잔한 눈으로 점백이네를 바라다보았다. "그 아그가 어뜨케 점백이네를 살려줬다 카나?" 잠자코 있던 쌀장사집 여자가 뚜벅 물었다. "이노무 자슥이 힘이 되어준 기라. 그라 고 이노무 자슥이 내 희망이고마. 내는 이노무 자슥 땜에 살고 있고마. 내는 이노무 자슥 없 으면 죽고 말끼라." 친구들이 듣기에 그런 점백이네를 점점 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였 다. 친구들은 그런 점백이네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점백이네도 친구들의 그런 눈길을 얼 굴이 따끔거리도록 강하게 느꼈다. 점백이네는 친구들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게 더없이 답답했다. "그래, 그 아그가 누군데 그랬쌌나?" 충무댁이 다시 큰 소리로 약간 짜증스럽게 다시 물었다. 점백이네는 잠시 충무댁을 마주보았다. "이 자슥이 자로 내 손자인 기라." 지 훈 어머니는 끝내 가슴속에 깊이 파묻어 두었던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녀의 말에 친구 들의 시울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무도 점백이네의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점백이네 도 그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친구들의 눈빛을 보자 괜히 답답 하고 울화가 치밀면서 눈물이 솟구치려고 하였다. "이노무 자슥이 바로 지훈이 놈 핏줄인기 라 카이." 지훈 어머니는 울부짖듯 소리치고 말았다. 점백이네가 마치 큰 소리로 울부짖듯, 이노무 자슥이 바로 지훈이 놈 핏줄이라 카이, 라고 말했을 때, 그녀의 여러 친구들은 더욱 이상한 눈으로 지훈 어머니를 보았다. 친구들은 차마 입밖에 뱉을 수는 없었으나 마음속으 로는 저마다 점백이네가 미쳤고마, 미쳐도 단단히 미치고 말았고마, 하고 말하는 듯한 눈길 들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혀끝을 찼다. 그런 친구들의 표정을 빤히 읽고 있 던 점백이네는 정말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녀는 비닐 봉지 속에 든 원주의 사진을 자 신의 볼에 거듭 비벼댔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친구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이 서러웠다. "울지만 말고 차분히 한 번 말해 보그래이." 한참 후에 충무 댁이 두손으로 점백이네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부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점백이네 는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충무댁을 마주보았다. "자네도 내 말을 안 믿나? 이아가 우리 지 훈이 놈에 핏줄이라카는 내 말을 몬 믿것나?" 점백이네는 간절하면서도 슬픔이 가득한 눈 으로 충무댁을 보며 말했다. "아이다. 내는 점백이네 말을 믿는 기라. 그라이 차분하게 이약 을 해보그래이." "나도 처음에는 몰랐는기라. 이 세상에 내 핏줄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는 기라. 그래서 내는 지훈이가 죽은 후로 살맛이 없었서 아들 따라 죽고 싶었는 기라. 그란듸 얼마 전에 어떤 새악시가 내를 찾아와서..." 점백이네는 잠시 말을 멈첬다. 그녀는 친구들에 게 정매의 이름을 밝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어떤 여자라고만 말하였다. "그래서 우쨌노? 점백이네를 찾아온 그 새악시가 뉘기였나?" 뚱보가 다급한 목소리로 관심 을 나타내 보이며 말했다. "그 여자가 뉘긴 줄은 모른다 카이." "그래서 우쨌나?" 충무댁이 다음 말을 재촉하였다. 그제야 여러 친구들은 그녀의 말에 관심을 나타내 보인 듯싶었었다. "그 새악시가 하는 말이 자기는 지훈이가 살아 있을 적에... 그라이 지훈이가 감옥에 드가기 전에 서로 연애허는 사이였다 크믄서... 자기가 말이다..." 점백이는 다시 말을 끊었다. 그녀 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이 말을 해소는 안 되는데, 이 말만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고 되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가 뭐라 카드나?" "지훈이가 감옥에 드가기 전에 연애한 여자라문, 부산에서 대핵교 댕길 때가 아이가?" 점백이네 친구들이 한마디씩 하였다. 지훈 어머니가 다시 말을 잇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서 시선을 가게 밖으로 멀리 던지고 있자, 친구들의 성화가 불꽃 튀기듯 하였다. "그 새악시가... 아니 지훈이 애인이 뭐라 카드나?" 충 무댁은 조심스럽게 묻고 나서 점백이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때 쌀집 여자가 점백이네한테 옛날 지훈이의 애인이라고 하는 그 여자가 이쁘게 생겼더냐고 묻자, 충무댁은 쌀집 여자에 게 퉁명스럽게 조용 하그라, 하고 내질렀다. 그 바람에 가게 안의 여러 친구들은 숨을 죽이 고 점백이네의 입만 바라보았다. 점백이네는 친구들의 눈을 보았다. 그녀들의 눈은 점백이네 자신을 무시하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젊은 색시 하는 말이... 자기가 지 훈이한테서 낳은 사내 자슥을 키우고 있으니 희망을 갖고 살라꼬 안 하겄나." "지훈이한테 서 난 자슥을 그 여자가 키우고 있다꼬?" "그라믄 그 아가 멫 살이나 되았다드나?" "그 여 자는 시집도 안 갔드나?" "그래, 지훈의 자슥은 워디 있나?" "아, 그라이 이 비닐 차대기 속 에 넣어 갖고 댕기는 얼라 사진이 바로 지훈의 자슥이란 말인가?" 점백이네 친구들은 저마 다 한마디씩 물었다. 점백이네는 어차피 원주에 대해서 친구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바에야 숨길 것이 뭐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원주의 에미가 정매라는 사실만 말하지 않으 면 될 것이 아니가 싶었다. "이 사진이 바로 지훈이가 떨구고 간 내 손자고마. 나이는 열 살 이고 부산에서 초등핵교에 댕긴다 카드만. 그라고 제 에미는 이 얼라를 배갖고 시집을 갔능 기라. 그땜시 그 집에서는 우리 손자를 자기네들 핏줄로 생각하고 있다 이그제. 그래서 내사 재판을 걸어 갖고 우리 지훈이가 남기고 간 내 손자를 찾아야 안 쓰겄나. 벤호사헌테 알아 봤더니 돈이 든다 캐서 그 돈을 모을라꼬 떡장사를 시작했능기라. 내사 뼈가 으스러지고 등 골이 휘어지는 한이 있다캐도 재판 비용 맹글어서 우리 원주를 찾을 끼라." 점백이는 긴 이 야기를 끝내고 다시 눈물을 질금거렸다. 점백이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친구들도 호미칼로 가슴을 후비는 듯한 아픔과 후련함을 느꼈다.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세상에...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점백이네가 미첬다고만 했고마. 점백이네헌테 미안테이. 그런 것도 모르고 내 는 또 점백이네가 정신이 헷가닥 해뿐진 것으로 알았는 기라." "지훈이 그 자슥 그래도 핏 줄을 남기고 갔으니 효자 아이가." 친구들은 진심으로 격려와 축하의 말을 한마디씩 해주었 다. 점백이네는 옛 친구들에게 원주의 이야기를 점백이네 자신한테도 혈육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녀는 비로소 친구들과 떳떳하게 함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친구들 앞에 나타날 때마다 옛 친구들이 아무리 자신 에게 옛정을 생각하여 찐덥지게 생각해 주기는 해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늘 팔자 사나움을 부끄럽게 생각해 왔는데, 이제부터 좀더 떳떳하게 그들 앞에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래, 을매나 좋나. 난데없이 손주놈이 나타났으이 참말로 춤이라도 춰야 쓰겠구마." "그래, 돈 만 있으믄 손자놈을 찾아올 수가 있다 카드나?" "그라이 이 여편네가 느닷없이 술을 산다고 했었고마!" 점백이네 친구들은 오랜만에 활짝 개인 얼굴로 점백이네를 보며 다시 한마디씩 하였다. 점백이네는 친구들로부터 그런 말을 듣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가자. 이럴 때 술 한잔 안 마시고 기분이 살어나겠나. 오늘은 점백이네를 축하하는 뜻으로 내가 한잔 살 끼 다." 그러면서 점백이네를 가장 찐덥지게 생각해주는 충무댁이 먼저 일어섰다. "아이라 카 이. 오늘은 내가 술을 살라꼬 맘먹고 왔는 기라." 충무댁이 술을 사겠다는 말에 점백이네가 손을 휘저으며 충무댁의 앞을 막아섰다. "그라믄 충무가 일차 사고, 점백이네가 이차로 사면 되겠네." 쌀집 여자가 먼저 가게를 나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좋구마. 오늘 점백이네 덕분에 한 번 취해 볼까. 술 취해 갖고 오랜만에 우리 영감쟁이한테 마 술주정이나 좀 해야 쓰겠다마. 우리 영감쟁이 요새는 내가 옆에서 숨을 쉬고 있는지 으쩐지 관심도 없는 기라." 남도 상회 여자도 농말을 지껄이며 점백이네의 등을 떠밀고 밖으로 나갔다. 점백이네 친 구들은 충무댁을 앞세우고 장터거리를 빠져나가 이발소 모퉁이에 있는 섬진옥으로 들어가서 방을 치우게 하고 저마다 다 벽을 등지고 빙 둘러앉았다. 50대의 초로 여인네들 5명이 한자 리에 모여 술과 안주를 청하자 섬진옥의 젊은 여주인이 놀라는 표정을 하였다. "오늘은 뭣 이든지 묵고 싶은 것 있으믄 맘대로 시키그라. 술값 걱정은 말고 맘대로 마시고 옛날 모양 으로 한 번 취해 보재이." 충무댁이 친구들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때가 은제였드 나? 그라이 지훈이가 대핵교에 들어갔을 때, 우리 다섯 명이 기차 타고 진주에 가서 인사불 성이 되도록 취해 본 일이 있었제? 그대 모양으로 한 번 취해 보재이." "말도 말그라. 그때 내사 술 취해 갖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 우리 영감쟁이한테 을매나 구박을 받었는지 아나?" 친구들은 한바탕씩 웃었다. "아이고, 참말로 말도 말그래이. 그때 우리 영감쟁이는 나헌테 서방질허고 밤늦게 들어왔다고 을매나 강짜를 했다꼬 그래 할 수 없이 영감쟁이헌테 하룻밤 외박을 흐고 와도 괘않타꼬 했다마. 그랬더이, 다음날 여지없이 외박을 허고 돌아왔드라. 그 래 영감쟁이가 하도 드러바서 한 달 동안이나 내 옆에 몬 오게 했다 카이. 그래 갖고 한 달 만에 잠자리를 같이 했더니 우리 막둥이가 생겨난기라." 쌀집 여자의 말에 그녀들은 다 허 리를 꺽었다. "그라믄 오늘도 우리 진주로 가서 마시자 마. 그래야 누가 또 쉰둥이 막둥이 하나 더 맹글 것 아니겠나? 와 내 말이 틀렸나?" "맞다, 맞다. 우리 남도상회 여편네라믄 막 둥이 하나 더 맹글 수가 있을 끼고마." 충무댁이 남도 상회 여자를 보며 널려댔다. 그들 중 에는 남도상회 여자의 나이가 제일 아래였기 때문이다. 남도상회 여자의 나이는 쉰 두 살이 었다. "미친 소리 그만들 하그라. 하문이 쫄딱 말라붙어 삐렸는데 막둥이는 무신..." 남도상 회 여자는 밉지 않게 몰라도 남도 상회만은 영감쟁이 옆에 오는 것 마다카지 않을 끼고마." 친구들은 남도 상회 여자를 실실 놀려댔으며 그때마다 남도 상회 여자는 친구들의 놀림을 마다하지 않고 맞장구를 쳐주곤 하였다. 그날 점백이네 친구들은 섬진옥의 안방에서 거나하 게 낮술을 마셨다. 젊었던 시절에 술 깨나 마셨던 경험이 있는지라 옛 기질을 발휘하여 권 커니 잣거니 하면서 날이 어둡기도 전에 술에 취하고만 것이었다. 특히 그녀들은 손자가 생 긴 것을 축하한다면서 저마다 점백이네한테 술을 권하였다. 점백이네는 친구들이 건네주는 술잔을 널름널름 받아 마셨다. 그런데도 그녀는 취하지 않고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 되살 아났다. "오늘밤 우리 진주에 가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재이. 내사 영감쟁이도 없으니 괘않은 기라." 그러면서 점백이네는 친구들에게 2차는 자기가 사겠다고 떠들어댔다. 그러곤 연신 허 리춤에서 원주의 사진을 꺼내 양쪽 볼에 비벼대곤 했다. 그러다 이내 점백이네는 갑작스럽 게 원주의 사진을 가슴에 붙안고는 엉엉 소리내어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점백이네가 소리내 어 울자 분위기가 갑자기 음울하게 가라앉고 말았다. 친구들은 술 취한 목소리로 저마다 점 백이네한테 위로의 말을 한마디씩 하였으나, 그녀는 친구들의 말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 다. "이차 가자고 해놓고 이르케 울어삐리면 우짜노?" 충무댁이 점배이네의 어개를 잡아흔 들며 달래보았다. "우리 원주 몬 찾으면 나는 우째 살기가? 충무야, 우리 원주 좀 찾아 주그 라잉. 우리 원주 몬 찾으면 내는 칵 죽고 말 끼라." 점백이네는 충무댁을 부둥켜안고 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날 점백이는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끝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울다가 술을 마시다가 하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에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만 것이었다. 아마도 오 랜만에 술을 마신 탓으로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취한 듯 싶었다. 그녀가 마음을 풀어놓고 술을 마셔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지훈이가 일을 저질러 감옥에 들어간 후 여태 껏 이렇게 취하도록 마셔보지 못했었다. 술에 취한 점백이네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 다. 그녀는 그 취중에서도 다행스럽게 원주가 정매의 아이라는 말은 입밖에 내놓지 않았다. 그녀는 원주의 이름을 부르며 서럽게 통곡하듯 울어댔다. 점백이네가 완전히 술에 떨어지자 그녀의 친구들은 택시를 불러 태우고 집에까지 그녀를 데려다 주었다. 그녀는 날이 환하게 밝은 뒤에야 참새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골이 빠개지는 듯하면서 속이 메슥거렸다. 늦게 나마 떡장사를 하러 나갈 생각으로 세수를 하고 있는데 눈이 쏟아졌다. 그녀는 얼굴을 하늘 로 쳐들고 흠씬 눈을 맞고 서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점백이네는 속 이 너무 쓰려 콩나물국이라도 끓여서 찬밥을 말아먹을까 하다가 그냥 빈 함지를 들고 마당 을 가로질러 나갔다. 그대 점백이네 친구들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제 낮에 섬진 옥에서 술을 함께 마셨던 네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을 본 점백이네는 놀라는 얼굴로 하고 걸 음을 멈추어섰다. "웬일들이가?" 점백이네가 물었지만 그녀의 네 친구들은 연신 벙싯거리고 만 있었다. "어저께 약속 지킬라꼬 안 왔나..." 충무댁이 여전히 다른 친구들과 함께 실실거 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약속이라니 무슨 약속 말이가?" "점백이네가 이차 산다고 안 했드 나? 말로만 이차 산다 카고 말았지 안 했드나?" 그제야 점백이네는 빙긋이 웃었다. 충무댁 의 말처럼 친구들이 그녀한테 2차 술을 얻어 먹으로 온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그까짓 이차, 사라믄 몬 살줄 아나? 좋다마, 지금이라도 가보재이. 섬진옥으로 갈끄나, 버스 타고 진주로 갈끄나?" 점백이네는 친구들이 무슨 일 때문에 아침부터 한꺼번에 집에까 지 몰려온 것인지 궁금하게 여겨졌으나 억지로 배짱을 보이며 그렇게 퉁겨댔다. "점박이네 야, 자네헌테 헐말이 있어서 안 찾아왔나. 자, 어서 방으로 좀 들어가자꼬마." 충무댁이 점백 이네의 손을 잡아끌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와 무슨 일이 생겼나?" 점백이네가 걱정스러 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충무댁을 비롯한 점백이네 친구들은 지훈 어머니를 끌고 방으로 들 어갔다. 지훈 어머니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친구들에게 의해 방으로 끌려 들어가다시피 하였다. 방으로 들어와서도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하였다. "우얀 일인지 말이나 좀 하그래이." "점백이네한테 좋은 일이니 걱증 말거라." 그러면서 충무댁은 점백이네의 손을 잡아끌며 앉도록 하였다. 다른 친구들도 충무댁을 따라 앉으며 구저분한 방안 살림을 대충 훑어보았다. 그녀들은 점백이네의 살림만 훑어보아도 그녀의 삶이 얼마나 구차스러운가를 어림할 수가 있었다. 점백이네는 50여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쓸 만한 장롱 하나도 장만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방안의 살림이라고는 낡은 고리짝과 너무 오래되어 희치 희치 닳아빠진 헌 이불이 고작이었다. 입고 나설 만한 옷가지는 물론 깨어진 거울 조각 하 나 벽에 걸려 있지 않았다. 기실 점백이네는 지훈이의 손을 잡고 읍으로 나온 이후, 자신의 몸단장을 위해서 한가하게 거울을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살아왔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은 외아들 지훈이를 위한 완전한 헌신이었으며 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한세상 지훈 이를 위해서 전쟁을 치르듯 살아왔었다. 그리고 그녀로서는 그런 삶이 행복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그런 삶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제는 지훈이가 아니라 원주를 위해서 그렇게 살 결심이었다. 그런 삶을 시작한 점백이네는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이제 사는 것이 조 금도 고달프지가 않았다. 비록 하루하루가 구차스럽기는 할지라도 마음속에는 뿌듯하게 행 복이 괴어오르고 있었다. "나한티 좋은 일이라는 기 뭐꼬?" 점백이네는 괜히 마음이 다급해 졌다. 어제 하루를 공쳤기 때문에 일찍 서둘러 떡장사를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 는 친구들이 집에까지 찾아와 준 것이 반갑기는 하였지만, 어서 돌아가 주었으면 하고 바랐 다. "점백이네야, 돈 오백 만원만 있으면 손자를 찾아올 수가 있겠나?" 한참 후에 남도 상회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신 소리가?" 점백이네는 어제 친구들한테 원주의 이야 기를 까발렸던 것을 깜빡 잊고 있었기 때문에 애매하게 반문하였다. "그 비닐 봉지 속에 든 사진 말이고마. 그 아그가 점백이네 손자라고 안 했나?" 충무댁이 물었다. 그제야 점백이네 는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녀는 충무댁의 물음에 한동안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 았다. 그녀는 비로소 친구들에게 원주의 이야기를 까발린 것을 후회하였다. "어제께 와 안 그랬었나. 오백 만원만 있으믄 재판을 걸어 갖고 손자를 찾아올 수가 있다꼬 말이다. 그래서 떡장사를 다시 시작했다 안 했나?" 충무댁이 따지듯 거듭 물었다. "그랬었제." 점백이네는 어제와는 달리 희미하게 말하였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런 점백이네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하루 전과 비교할 때 그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마가 점백이네 손자가 분명하나? 지훈이 핏줄이 확실하냐 이 말이다." "그라믄 내가 자네들헌테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가? 누가 뭐라 캐도 그노마는 내 손자가 분명한 기라. 그노마를 낳은 제 에미가 나헌테 찾아와서 한 말이라 카이. 그 새악시가 내게 와서 원주는 지훈이의 핏줄이라고 말했다 카 이." 충무댁은 점백이네의 등을 쓸어주며 마름을 다독거려 주었다. 그제야 점백이네도 기분 이 풀린 듯 굳어진 얼굴을 누그러드리고 친구들을 보았다. "점백이네야, 우리를 오해 말그래 이. 우리는 자네를 도와줄라꼬 안 왔나." "우리는 점백이네가 지훈이 핏줄을 찾을라꼬 허둥 대는 것이 한편으로는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돈이 없는 것에 마음이 아팠는 기라. 그래서 우리끼리 이야기를 했꼬마. 그 다음 이약은 충무가 허그라." 남도 상회 여자가 말을 꺼내놓 고는 충무댁을 보았다. "그래, 내가 이야기를 하제. 우리가 점백이네를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충무댁은 말을 하면서 점백이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잠시 말끝을 흐리고 나 서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어저께 점백이네가 돈 오백 만원만 있으믄 손자를 찾어 올 수 가 있닥 카기에 우리끼리 모여서 점백이네의 딱한 처지를 이야기하고 서로 힘이 되어주자꼬 했는 기라. 그래서 말인데, 우리 네 사람이 사백 만원을 맹글어갖고 왔고마. 오백 만원이 있 으야 손자를 찾을 수가 있겠지만도 우리가 돈을 보태 주면 힘이 안 되겠나 싶어서... 첨에는 우리 네 사람이 오백 만원을 몽땅 해주자 카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라믄 점백이네가 그 돈을 받지 않을 것 갈아 사백 만원만 맹글어왔는 기라. 그라이 이 돈을 보태서 하루라도 빨 리 손자놈을 찾아오그래이. 점백이네 손자가 바로 우리 손자인기라. 안 그렇나?" 충무댁은 그러면서 품속에서 돈뭉치를 꺼내 점백이네 앞에 내 놓았다. 점백이네는 한 동안 말이 없었 다. 그녀는 크렁하게 젖은 눈을 들어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말은 없었지만 시울이 펑 젖은 눈길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친구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친구들은 점백이네의 손을 잡고 주었다. 갑자기 점백이네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지훈 어머니는 친구들의 뜨거운 우정에 너무 감격하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하였지만, 감정이 격하여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 말 말그래이. 인자 점백이 네가 빨리 손자 찾어 갖고 우리들헌테 보여주는 일만 남았는 기라. 우리들도 마, 점백이네 손자놈 한 번 안아 보는 기 소원 아니가." "맞다 맞다, 충무네 말이 맞는 기라. 우리도 어서 점백이네 손주를 한 번 안아 보고 싶은 기라. 그래서 점백이네를 도와주기로 한기라." 점백 이네 친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하였다. "재판을 하자면 억수로 돈이 든다 카드라. 앞으로 존이 더 필요하믄 우리가 다시 보태 줄 끼라. 그라이 꼭 손자를 찾그래 이." 충무가 점백이네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아이다. 내 손자는 내 힘으로 찾을 끼다." 점 백이네는 친구들의 돈을 한사코 거절했다. "고집 부리지 말거라. 점백이네 손자는 바로 우리 들 손자라고 안 했나." 그러면서 친구들은 돈뭉치를 방바닥에 깔린 이불 속에 쑤셔놓고 갔 다. 점백이네는 친구들이 돌아간 후에도 그들이 놓고 간 돈 뭉치를 내려다보고 앉아서 훌쩍 거리고만 있었다. 그러다가는 허리춤에서 또 원주의 사진을 꺼내 볼에 비벼댔다. "원주야, 핼미 친구들이 네놈을 한 번 안아보고 싶다꼬 저리 보채지 않나. 그라이 어서 핼미한테로 돌아와야 안 쓰겄나. 인자 할마이 친구들이 재판비도 대주었으니, 곧 니놈을 찾아올 수가 있 을 끼고마. 그라이 쬐금만 더 참그래이. 이 할마이도 눈 찔금 감고 니놈이 암만 보고 싶어도 참을락 칸데이. 앞으로 더도 말고 일 년이면 같이 살수가 있는 기라." 점백이네는 원주의 사 진을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 길로 점백이네는 친구들이 놓고 간 돈을 가지고 우체국 으로 달려가서 통장을 만들었다. 그녀는 통장도 원주의 사진과 함께 비닐 봉지 속에 넣어 꿰찼다.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돈을 우체국 통장에 넣고 나자 점백이네는 한껏 힘이 솟 는 듯 하였다. 그리고 원주가 보고 싶을 때마다 저금통장과 원주의 사진을 함께 꺼내 보곤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새벽에 동이 트기도 전에 집을 나가서 밤이 늦어서야 돌아오곤 하였 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르고 신들린 사람처럼 떡함지를 들고뛰었다. 그렇게 열심히 미친 듯 뛰어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하루 번 돈을 또박또박 통장에 부었다. 돈이 조금씩 불어날 때마다 원주와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았으며, 원주와 함께 살 날 이 점점 눈앞에 다가오는 듯 싶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뛰었는지 겨울방학이 훌쩍 지나가 버 린 것 마저 잊고 있었다. 방학이 다 끝나 가고 있는데도 정매는 원주를 데리고 지훈 어머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훈 어머니는 그러나 옛날처럼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녀는 원주가 보고 싶을수록 장사에 더욱 힘을 썼다. 그러다가 못 견디게 원주가 보고 싶으면 사 진을 꺼내 들고 몇 시간이고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점백이네가 원주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사진 속의 손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의 모습은 너무 엄숙하여 아무리 친한 그녀의 친구들이 라도 농말을 하거나 웃음을 흘리지 않았다. 그녀가 원주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참으 로 진지하여 마치 신비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하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황홀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런 점백이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의 친구들은 되도록 말소리를 죽였고 웃지 도 않았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바람은 숨을 죽이고 햇살도 부드러워졌다. 사람도 산 도, 들도 두꺼운 껍질을 벗고 새로운 생명의 숨소리를 내뿜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생명이 넘쳐 보였다. 언제나 그 자리에 박혀 있는 돌맹이까지도 조용히 숨소리 를 내면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듯하였다. 모든 것들은 살아 있음을 자랑하였고, 그것들은 모두 아름답게 보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참으로 아름답게 변신하고 있었다. 봄은 나무 나 풀, 새들, 겨울잠을 잔 개구리나 곤충들에게 생명력을 줄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무한 한 아름다움과 힘과 희망을 준다. 그래서 봄의 사람들은 언제나 아름답고 희망에 가득 차 있다. 점백이네는 언제 겨울이 훌쩍 지나가 버렸는지조차 몰랐다. 떡함지를 머리에 이고 뛰 다보니 어느덧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가 원주를 위해 떡장사를 시작 한 지도 석 달이 지났다. 그 석달 동안 그녀의 저금통장에는 친구들이 도아준 것까지 합하여 500만 원이 거의 찼다. 그녀는 이제 몇 달만 더 고생하면 원주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 였다. 그녀는 원주를 찾을 수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갖고 살았다. 그 때문에 방학이 지나도록 정매가 원주를 데리고 오지 않았지만 조금도 절망하지 않았다. 물론 정매에게 왜 원주를 데 리고 오지 않느냐고 편지를 하거나 전화를 하지도 않았다. 이제 그녀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날도 점백이네는 해가 떠오르기 전에 떡함지를 이 고 집을 나설 요량이었다. 그래서 아침밥 대신 작두샘에서 샘물을 한 바가지 퍼서 배가 불 룩하도록 마시고 막 대문을 나섰다. 지훈이 친구 박문호가 대문을 들어서다 말고 멈칫했다. "안녕하신교?" "니 문호 아이가? 아침 일찍부터 웬일이제?" 그렇지 않아도 지훈 어머니가 박문호를 한 번 만나고 싶었던 터에 잘됐다 싶어 반가워하였다. 박문호에게 재판 비용이 거 의 마련되었으니 언제쯤 재판을 시작했으면 좋을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봄방학도 끝 나고 내일부터 개학 아닝교. 그래서 출근하지 전에 한 번 뵈입고 싶어서 안 왔능교." 박문호 는 그러면서 몸을 돌려세워 천천히 골목을 걸어나갔다. 그 뒤를 지훈 어머니가 따랐다. 박문 호가 지훈 어머니를 찾아온 것은 이틀 전 정매한테서 온 편지의 내용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 다. 정매가 박문호한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방학 동안에 원주를 데리고 하동에 한 번 올 계 획이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방학이 끝나버려 당분간은 하동에 올 수 없다는 것이었 다. 정매는 편지에서 지훈 어머니에게 말을 좀 잘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특히 지훈 어머니 가 정매한테 편지를 하거나 전화를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부산에 찾아와서는 안 된다고 설득을 해달라고도 하였다. "정매씨한테서 지한 테 편지가 았습니더." 골목을 걸어나가다 말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선 박문호가 지훈 어 머니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펜지가 왔다꼬? 무신 페니드나? 와 내헌테는 안 오고 문호 니 한테 했으끄나? 그래 은제 하동에 원주 떼꼬 온다 카드나?" 지훈 어머니는 박 문호 옆으로 다가서며 여러 가지 것들을 한꺼번에 물었다. "어머니한테 몬하고 대신 나한테 헌다꼬 하믄서 이약을 전해 달라꼬 하더만요." "이약을 전하라꼬? 그래, 무신 이야기?" "몸 이 아파서 겨울방학 중에 몬 왔다고 하믄서 몸이 좀 좋아지면 원주를 데꼬 꼭 오겠다고 했 구만요. 그라고... 겨울방학 때 몬 온거 죄송하다고..." 박문호는 얼무버렸다. 몸이 아파서 못 온다고 한 것도, 몸이 좋아지면 오겠다는 말도 순전히 그가 지어낸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아프다니 누가 아프다 카드나? 우리 원주가 아픈 기가?" 지훈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박문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라예. 원주가 아픈기 아니고, 원주 어무이가 아프다 캅디다. 그래서 방학 동안에 하동에 몬 왔다 캅디다." 박문호의 그말을 듣고서야 지훈 어머니는 가 볍게 한숨을 쏟았다. "많이 아프다 카드나? 많이 아프면 내가 한 번 가봐야 카지 않겠나? 내일이라도 당장에 부산에 한 번 댕겨와야 안 쓰겄나?" 지훈 어머니는 당장에 정매의 병문 안을 위해서 부산으로 달려갈 기세로 말하였다. "아니라예. 부산에 가실 필요는 없구만요. 이제 거진 다 나았다 캅니다."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가 부산으로 정매 병문안 가겠다는 말 에 펄쩍 뛰었다. "원주가 아프지 않다 카이 불행중 다행이로고마. 그라믄 원주엄씨는 은제 온다 카드나? 벵도 나았다문 한 번 올끼 아니가? 내사 부산에 한본 가보고 싶어도 요새 같 으믄 장사하느라 정신이 없능기라. 내헌테는 하루하루 돈벌이가 더 급한기라. 하루 놀면 그 만큼 우리 원주 찾을 날이 늦어지니 말이다. 해서 마, 부산에 가는 것은 고사하고 전화질 할 여유도 없는 기라." "잘 생각하셨구만요." 박문호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웃음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는 지훈 어머니가 원주를 찾겠다고 하는 것은 그냥 희망 사항이며 소중한 꿈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원주는 지훈 어머니에게 돌아올 수 없으며, 또 아직도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원주가 지훈 어머니에게로 돌아오 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며, 그것도 정매의 뜻에 맡겨wu야 한다고 믿는 터였다. "그라믄 어 머니, 지는 그만 가보겠심더." 지훈 어머니에게 정매의 뜻을 전한 박문호는 허리를 굽적이고 나서 몸을 돌려세웠다. 지훈 어머니와 더 긴 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훈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지훈 어머니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박문호는 재판 비용만 있으면 원주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 다. 그 말을 했을 때는 지훈 어머니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 주고, 시간을 벌어 보자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는데, 훗날 지훈 어머니가 500만 원을 준비한 다음에 닥쳐올 일을 생각하면 눈앞 이 아찔했다. "아이다. 니헌테 할말이 있구마." 지훈 어머니는 박문호를 말로 붙들어 세웠다. 박문호는 걸음을 멈추고 지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지훈 어머니는 밝게 웃어 보였다. 박문 호는 지훈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보기에 좋아서 자신도 따라서 웃었다. "니 헌테 보여줄 것 이 있구마."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허리춤에서 비닐 봉지를 꺼냈다. 그러곤 봉지 안에서 저금통장을 집어들고 박문호의 코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박문호는 천천히 저금통장을 펼쳐 보았다. "아니? 이거이 얼망교?" 저금통장을 들여다본 박문호의 얼글이 청동색의 동상처럼 굳어졌다. 조금도 반가운 얼굴이 아니었다. 순간 박문호의 가슴은 사뭇 덜컹거렸다. "놀랐 제? 놀랠 줄 알았데이." 지훈 어머니는 놀란 얼굴로 굳어진 박문호를 보며 실실거렸다. "어떻게 이 많은 돈을 모았능교?" 박문호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천지신명께서 우리 원주 빨리 찾으라꼬 안 도와주셨나. 예수님도, 부처님도, 지훈이도, 지훈이 애비 넋도 부지런히 내를 도와준기라. 인자 우리 원주 찾을 수 있겄제? 그라이 니가 진주에 가서 그 벤호사 한본 더 만나보고 오그래이." 지훈 어머니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변호사 를요?" "미리 만나봐야 안 쓰겄나? 이 통장에 오백 만원이 들어 있으이 그 돈을 찾아서 벤 호사헌테 갖다 주고 원주놈 찾는 일 미리미리 착수하라꼬 부탁을 해야 안 쓰겄나? 그라이 언제 내허고 같이 진주에 한 번 댕겨오재이. 진주에 가서도 떡장사는 할 수 있으이, 하루품 베리는 것도 아이고, 문호 니 언제 시간이 나겠나?"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의 다그치는 듯한 물음에 한동안 미적거리고만 있었다. 박문호는 아찔한 가운데에서도 다시 지훈 어머니를 속 일 궁리를 짜야만 했다. 박문호는 실로 난감한 얼굴이 되어 어머니를 마주 볼 수조차 없었 다. 괜스레 원주의 일에 끼어든 것이 후회되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고 발을 빼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훈 어머니와 정매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지가 언제 한 번 진주에 가서 변호사를 다시 만나보고 오지예. 그렇지만 지 생각에는 오백 만원이 더 들 것 같은데예. 지난번에 만났을 때 변호사도 그렇게 말했다 아닙니껴. 재판비라 카는 기 변호사가 부르기 나름이라 안 하등교. 그라이 몇 백만 원 더 준비해야 안 쓰겄능교. 그라고 재판 비용은 한꺼번에 줘야..." 박문호는 궁여지책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마, 내 생각도 딱 오백 만원만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아서 웃돈을 더 맹글락 카는 기라. 그란듸 일 도 성사되기 전에 재판 비용을 한꺼번에 다 준다 카는 것도 문제가 있다 카이. 그라이 좌우 당간에 니가 한 번 댕겨와 주래이. 정 니가 바쁘다 카믄 벤호사 이름만 갈체주그라. 그라믄 내사 떡함지를 이고 한본 댕겨올란다." "아입니더. 지가 댕겨오겠심더." 박문호는 대답을 하 고 나서 도망치듯 먼저 긴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는 골목을 빠져나가면서 도망치듯 빠져나 가면서 장차 이 일을 어찌 해결했으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지훈 어머니가 미구에 돈이 준비되면 필시 함께 변호사를 찾아가서 재판을 시작하자고 할 터인데, 그것은 절대 불가한 일이었다. 재판을 해서도 안 되며, 설사 재판을 한다 손치더라도 승산이 전혀 없는 일이 아 닌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다해도 정매가 재판정에서, 원주는 지금 남편의 아이가 아니고 결혼 전에 관계가 있었던 최지훈의 핏줄이라는 증언을 할 리가 만무한 것이다. 얼핏 듣기에 친자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혈액 감정이라는 것을 해봐야 한다는 것으로 알고는 있지만, 그 것도 사실은 가능한 일이 아닐 터였다. 설령 혈액 감정에서 원주가 지금의 아버지 핏줄이아 니라는 것이 판명된다고 치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지훈이의 핏줄이라는 것을 증 명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다행히 정매가 법정에서 진실을 말한다면 몰라도, 그것은 전혀 기대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만약 이 일이 재판정으로 옮겨지게 된다면 정매의 인생은 말 할 것도 없고, 어린 원주의 인생도 비극적으로 꼬이게 될 터인데, 그것은 죽은 지훈이도 원 하지 않을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박문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원주의 일이 재판정 으로까지 번져서는 안 된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지훈 어머니 를 설득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훈 어머니를 설득하기란 정매를 법정의 증언대 위에 올려놓기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정매를 법정의 증언대 위에 올려놓 게 죄면 그녀의 인생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게 되는 것처럼, 지훈 어머니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박문호는 참으로 난감 해졌다. 정매의 인생을 비극적으로 꼬이게 하지도 않고, 지훈 어머니에게서 삶의 희망과 보 람도 거두지 않게 하면서 잘 해결할 방도가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아 답답할 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박문호는 혼잣말을 하고 고개를 흔들며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그가 다소 나마 마음을 놓은 것은 지훈 어머니가 500만 원보다 더 많은 돈을 마련하자면 아직 네댓 달 의 시간적인 여유가 잇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부산에 가서 정매를 한 번 만나보고, 사실대 로 털어놔야 할 것이라고 박문호는 생각했다. 원주의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정매뿐이었다. 그 때문에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가 돈을 가지고 변호사를 찾 아가 재판을 시작하자고 할라치면, 부산으로 정매를 찾아가서 정매로 하여금 지훈 어머니를 설득시키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닐 듯 싶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범위에서 정매에게 양보를 하여, 지훈 어머니가 원주를 자주 만날 수 있도록 해주면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지훈 어머니가 하동에 있으면서 원주가 지훈의 핏줄이라는 비밀을 지켜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문호가 지훈 어머니를 만나 정 매가 보낸 편지의 내용을 전해준 지 일주일쯤 후에 지훈 어머니가 그를 찾아왔다. 그날은 일요일이라서 박문호가 진주에 가보지 못하였다는 말을 하자 바를 성깔을 돋우었다. 그러면 서 당장에 함께 진주로 변호사를 만나러 가자고 보챘다. "오늘은 일요일 아닝교. 일요일에는 번호사가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 기라예." 박문호는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당장에 진주로 가 자고 보채는 지훈 어머니의 성화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에는 벤호사가 죽는 날이 다 카드나? 사무실에 안 나오면 집으로 찾아가면 될 꺼 아니가? 오늘은 마, 장사 포기하고 진주에 가서 벤호사 만날라꼬 준비를 하고 안 왔나. 그라이 냉큼 가재이." 지훈 어머니는 그 러면서 박문호를 몰아세웠다. 박문호로서는 그렇다고 지훈 어머니를 모시고 진주로 변호사 를 만나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돈은 준비가 다 되었능교?" "저금통장 가져왔다마. 이 통장 안에 오백 만원하고도 육십오 만원이 들었다 카이." "지가 그 돈 가지고는 모자랄 거 라고 하지 않았능교?" "우선 통장에 들어 있는 돈주고, 나머지는 재판 끝나고 주면 안되 나?" 지훈 어머니의 말에 박문호는 할말을 잃고 잠시 망설였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통장에 든 돈도 찾을 수가 없지 않겠능교" 박문호가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그것뿐이었다. 지훈 어 머니는 박문호가 일요일에는 은행에서 돈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을 하자 잠시 난처해하는 얼 굴을 하더니, "그라믄 이 통장흐고 내 도장을 벤호사하테 주면 될 끼 아니가." 하면서 당장 에 진주로 가자고 다시 성화였다. 문호는 통장을 변호사한테 준다는 것은 실례가 된다는 말 로 가까스로 그녀를 설득하였다. 그제야 지훈 어머니는 성깔을 누그러뜨렸다. "그라믄 내일 은 갈 수 있겄제? 내일 핵교 결근하믄 안 되겄나?" "내일은 안 되고 모레는 갈 수 있겠구만 요. 그러니 모레 지가 모시고 가겠심더." "약속했구마잉? 두말 한 하기다?" "그래요. 모레는 꼭 모시고 가겠심더." "다시 그짓말허믄 내는 니를 사람으로도 안 볼란다." 다음날 박문호는 학교에서 오전 수업만 하고 진주에 가서 동료 교사의 사촌 형뻘이 된다는 변호사를 찾아갔 다. 박문호는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에 살이 많은 육질의 초로 변호사를 만나서 원주에 대한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모두 말하였다. 변호사는 박문호의 이야기를 대충 듣고 나서는, "그래, 그 원주라는 아이를 찾기 위해서 소송을 하시겠다는 게요?" 하고 물었다. 박문호는 잠시 생 각을 굴려 보았다. 그가 변호사를 찾아온 것은 소송을 하여 원주를 찾아보자는 뜻이 아니었 다. 미리 변호사와 입을 맞추어 두었다가 지훈 어머니와 함께 왔을 때, 희망을 버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녀를 설득해 주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소송을 하면 아이를 찾을 수는 있겠심니꺼?" 박문호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그렇게 묻고 말았다. "증언을 해줄 사람은 그 아 어무이뿐인데 처지가..." "그 여자가 현재로는 증언을 해줄 처지가 못된다 이거로군요." "그렇심더. 그 여자는 시집을 가서 잘살고 있고, 남편도 그아를 자기 친자식으로 믿고 있능 기라예. 그라이 처지가..." "그렇다면 말이요, 그 여자가 죽은 남자의 어머니에게 지금 크고 있는 아기가 당신 아들의 자식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하게 하시고, 그 여자의 그 말을 녹 음하도록 하시오. 그런 다음에 다시 한 번 나를 찾아오시오. 그 아이가 선생님의 죽은 친구 분의 핏줄이라는 그 여자의 말을 녹음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혈액 감정을 해야겠지요" "그렇지만, 그 여자의 처지가..." 그러면서 박문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꼭 그 아이를 찾자는 것이 아니고...손자를 찾아오려고 성화를 대는 지 죽은 친구의 어머니 사정 이... 그러니까..." 박문호는 어렵게 자기의 뜻을 말하였다. 변호사는 처음에 박문호의 그런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기 어머니의 목소리를 녹음해 오라는 말만을 되풀이하였다. 그 러다가 한참 후에야 박문호가 변호사를 찾아온 뜻을 이해하고는, 그 역시 난감한 표정을 해 보였다. "소송을 하자니 그 여자와 아기의 인생이 불쌍하게 될 것이고, 안 하자니 죽은 선생 님의 친구 어머니가 삶을 포기해 버릴까 걱정이니 어찌했으면 좋겠냐, 양쪽 다 아무 피해 없이 잘 해결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로군요? 그런 문제라면 변호사를 찾아와서는 해결을 볼 수가 없겠소. 변호사는 인생 사담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오." 변호사는 그러면서 아예 눈 을 감은 채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댔다. "그래도 변호사님, 지 친구 모친께서 변호사 님을 만나러 오겠다고 성화시니 어쩌겠심니꺼? 그라이 좀 도와주시이소." 박문호는 매달리 는 목소리로 사정을 하였다. 그제야 변호사는 박문호가 자기 사촌의 동료라는 것을 의식했 음인지 눈을 뜨고 다소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정 그러시다면 그 친구분의 어머니를 모시 고 오시지요. 그러면 내가 적당히 이야기를 해 보겠소. 말하자면 희망과 꿈을 유예시킬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 보겠다 이겁니다." 박문호는 변호사의 말 중에서 '희망과 꿈의 유예' 라는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변호사가 아주 적절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 다. 그것이 바로 박문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지훈 어머니가 손자를 찾는 일에 매달려 희망을 갖고 살되, 그것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말 알아 듣겠소?" 박문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변호사가 물었다. "야, 예 알아듣겠심 더. 그라믄 지가 친구 어머니를 모시고 오겠심더. 선생님께서 잘 말씀을 해주시이소." 박문 호는 큰 소리로 말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변호사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세웠 다.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터미널로 가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학교에 돌아온 박문호는 하동의 집에 전화를 걸어 중학교에 다니는 막둥이 동생한테, 그날 중으로 밤늦게라고 지훈 어머니를 찾아가서 그가 진주에 가서 변호사를 만나고 왔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이틀 후 박문호는 시간을 내어 다시 하동으로 돌아가서, 지훈 어머니를 모시고 전에 입을 맞추어 놓았던 변호사를 찾아갔다. "우리 손자를 찾을 수가 있겠능교?" 변호사를 만난 지훈 어머니는 다급하게 그 말부터 묻고 있었다. "물론 댁의 손자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지훈 어머니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변호사는 아주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변호사는 그렇 게 대답을 하면서 얼핏 박문호의 표정을 살피며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아이고, 참말잉 교? 참말로 우리 손자를 찾을 수가 있겠능교?" 변호사의 말을 들은 지훈 어머니는 눈시울을 적시면서 거듭 재우쳐 물었다. 변호사는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 돈이 있심더. 우선 오백 만 원흐고 칠십만 원을 가져왔심더. 더 필요한 돈은 두 달, 아니라예, 한 달 안에 가져오겠구만 요. 그라이 당장에 우리 손자를 찾아주시이소." 지훈 어머니가 하동을 떠나올 때 은행에서 찾아온 현금을 내놓자, 변호사는 놀라는 얼굴로 박문호와 지훈 어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박 문호도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미적거리다가 변호사를 향해 어색하게 눈 을 꿈적거리면서, "아직 돈이 필요 없다 캐도 한사코 이러시니..." "그렇습니다. 아직은 돈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서 변호사는 지훈 어머니에게 돈을 다시 챙겨 넣도록 하였다. "와요? 돈이 모자라서 그라싱교?" "모자라다니요?" 변호사는 지훈 어머니의 물음에 반문하였다. "아, 변호사님. 이 분은 변호사님께서 이 돈으로는 비용이 부족해서 안 받으시는 것으로 오 해하고 계시는 기라예." 박문호는 여전히 궁색하게 설명을 하였다. 변호사는 자기 입으로 재 판 비용이 얼마가 소요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기에 여전히 뜨악한 표정이었다. "재판 비용 이라뇨?" 변호사가 박문호를 향해 물었다. "아, 예... 변호사님께서 재판 비용이..." 박문호는 변호사를 향해 말을 얼버무리면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제야 변호사는 박문호의 눈치를 가늠 하였는지 버릇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비용은 재판이 다 끝난 다음에 주셔도 괜찮아요. 그러니 그 돈은 다시 넣어 두세요. 그리고 에 또... 소송을 제기하게 전에 꼭 하실 일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이니 꼭 내 이야기대로 하셔야 합니 다." 그러면서 변호사는 며칠 전에 박문호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손자의 생모 되는 사람으로 부터 그 아이가 누구의 핏줄이라는 말을 녹음해야 한다고 일렀다. "지한테 와서 원주는 당 신 손자요, 라고 말했능 기라예.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능 기랑예. 지 말을 몬 믿으시겠능 교?" 변호사가 녹음을 하라는 말에 지훈 어머니가 바르르 놀라며 따지듯 되물었다. "아주머 니 이야기를 못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아주머니 손자 되는 아이 생모의 확실한 말을 녹음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시면 분명코 손자를 찾으실 수 가 있습니다. 그러니 아주머니 아드님의 친구 되시는 이 선생님과 잘 상의해서 녹음을 하시 도록 하십시오." 갑자기 변호사의 말이 사무적으로 쌀쌀해졌다. 그도 적이나 귀찮은 모양이 었다. "그라믄 녹음을 한 후에 다시 찾아뵙겠심더." 박문호는 변호사의 눈치를 헤아리고 그 렇게 말한 다음 지훈 어머니를 재촉하여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가 마 주앉았다. 그는 지훈 어머니의 의향은 들어보지도 않고 갈비탕 두 그릇을 주문하였다. 그때 까지도 지훈 어머니는 사뭇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앉아서 한숨만 내쉬고 있었 다. 아무래도 정매한테서 원주는 당신 손자요, 라는 말을 녹음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점심부터 잡수시고 녹음기를 사입시더." 박문호가 지훈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야야, 문호야. 그 벤호사 말대로 녹음을 꼭 해야 되능감?" 지훈 어 머니가 난감한 얼굴로 박문호를 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변호사 말이 맞심더. 그기 확실한 증거가 안 되겠능교." "그렇지만 어떠케 녹음을 할 낀가? 우에 그기 수얼한 일이겠 나?" "우선 점심부터 드입시더. 그라고 지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이소. 그라믄 걱정이 없능 기라예. 지만 믿으시이소." 벅문호는 자신 있게 말하고 지훈 어머니의 손에 숟갈을 쥐어 주 었다. 그제야 지훈 어머니는 마지못해 숟갈을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 다. 점심을 먹은 후에 박문호는 전자 제품 가게에 들러 손바닥만한 크기의 녹음기를 샀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하동으로 돌아오면서 녹음기를 작동시키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지훈 어머니는 문호한테서 여러 차례 거듭하여 설명을 듣고도 그것을 곧 잊어 버리곤 하였 다. "집에 가셔서 이것부터 배우셔야 겠네예. 떡장사보다 이일이 더 중하지 않겠능교?" 박문 호는 버스 안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녹음하여 그것을 재생시켜 보이기도 하였다. 그때 마다 지훈 어머니는 신기해하며 자신도 녹음기를 작동시켜 보려고 하였지만 그리 쉽게 되지 가 않았다. 녹음기를 사들고 집에 돌아온 지훈 어머니는 그날부터 녹음기 작동법을 배우느 라 끙끙거렸다. 지훈 어머니는 박문호의 말마따나 녹음기 작동시키는 법 익히는 것을 떡장 사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큰방 학생을 옆에 앉혀 두고 그것을 배웠다. 녹음기 를 와전하게 작동시키는 법을 익히기까지에는 거의 일주일이나 걸렸다. 이제 그녀는 녹음기 를 품속에 감쳐 두고, 다른 사람들과 한 말을 그대로 녹음할 수가 있게 되었다. "자네들 놀 라지 말그라잉." 녹음기 작동법을 완전하게 익힌 어느 날, 지훈 어머니는 장터거리 충무상회 에 떡함지를 이고 나타나서 친구들과 함께 거방지게 노닥거리다가, 품속에서 녹음기를 꺼내 친구들의 목소리를 몰래 녹음해 두었던 것을 재생시켜 주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지훈 어머 니가 녹음기를 품속에 숨겨 그들의 말을 모두 녹음했다가 다시 들려주자 소스라치게 놀랐 다. "점백이네, 스파이 되라꼬 그러나? 간첩인가 스파인가 허는 사람들이 녹음기 숨겨 갖고 그런다 카드라." 쌀집 여자가 이상한 눈으로 점백이네를 흘겨보며 퉁겨 댔다. "나 스파잉 기 라. 그라이 내 앞에서 말조심덜 하그라잉. 자네덜 영감 욕했다가는 이 녹음기에 죄다 녹음했 다가 영감쟁이한테 틀어줄 끼라. 그라고 본 영감 놔두고 다른 영감 좋아했단 봐라, 이 녹음 기에 죄다 담어 갖고 자네 영감쟁이한테 일러바치고 말 끼다." 그러면서 점백이네는 조금 전에 녹음했던 친구들의 잡담을 재생시켜 다시 들려주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점맥이네한테 녹음기를 품속에 감추고 다니는 내력을 저저이 캐물었다. "자네덜 영감쟁이 부탁을 받고 스 파이질 헐라꼬 안 그러나. 그라이 내 앞에서 말조심 하그래이. 안 그라믄 영감쟁이덜한테 혼 날끼라." 점백이네는 녹음기를 품에 숨기고 다니는 이유를 농담으로 버물어 댈 뿐이었다. "내는 이제부텀 점백이네 앞에서는 아무 말도 안 할란다. 점백이네가 참말로 우리 영감쟁이 스파인지도 모르는 기라." "내사 점백이네하고 같이 안 놀란다." 그녀의 친구들은 이렇게 농 말을 하면서 녹음기를 숨겨 가지고 다니는 이유를 말하라고 졸라댔다. 그러나 점백이네는 끝까지 농으로 응수하였을 뿐이다. 지훈 어머니는 언제나 녹음기를 품고 다녔다. 그녀는 이 제 어떻게 하면 정매의 말을 녹음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을 쥐어짰다. 지훈 어머니는 생 각 끝에 정매한테 편지를 써 보냈다. 원주를 데리고 오지 않아도 좋으니 빠른 시일 안으로 하동에 한 번 내려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을 하였다. 그러면서 요즈막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으며, 아무래도 회생할 수가 없을 것 같다며, 죽기 전에 정매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고 덧붙었다. 큰방 학생을 시켜 정매한테 편지를 써 보낸 지훈 어머니는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며 부산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훈 어머니는 편지에 자신이 아프 다고 썼기 때문에 정매가 불쑥 들이닥칠 것에 대비하여 떡장사도 나가지 않은 채 방구석에 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정매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지훈 어머니는 열흘 간격으로 한 차례식 정매한테 더욱 간절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 이러구러 한 달이 퍼뜩 지났다. 한 달 동 안 지훈 어머니는 세 통의 편지를 보냈으나 정매로부터는 가부간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한 달 동안 지훈 어머니는 떡장사도 못하고 방을 지키면서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답답하지 못해 정말로 병이 들것만 같았다. 그녀는 기력이 빠져 다시 떡 함지를 이고 밖으로 나가기조차 귀찮았다. 지훈 어머니가 이렇듯 절망 상태에 빠져 있던 차 에 문호가 찾아왔다. 문호가 자진하여 찾아온 것이 아니고, 지훈 어머니가 학교에 전화를 해 잠깐 다녀가라고 불러서 온 것이었다. "어디 편찮으싱교?" 박문호는 지훈 어머니의 수척해 진 얼굴을 보고 약간 놀라며 물었다. 그가 보기에 지훈 어머니의 얼굴은 환자처럼 창백해 있는데다가 기력이 쇠진한 듯싶었다. "답답해서 안 불렀나." 산과 들에는 꽃이 피고 싱그러 운 신록이 우거져 한껏 자연의 아름다움이 넘치고 있는데도, 지훈 어머니는 떡장사를 다시 시작하기전, 삶을 포기해 버렸을 때처럼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박문호가 방안에 들어가서 퀴 퀴한 방안에 누워 있던 지훈 어머니는 힘들여 일어나 앉으며 한숨을 내뿜듯 말하였다. 박문 호는 정매한테서 소식이 없는 탓으로 지훈 어머니가 이렇게 기력이 빠져 있는 것이라고 짐 작하였다. "정매 씨한테서 소식이 없어서 이러싱교?" 지훈 어머니는 박문호의 물음에 고개 만 끄덕거렸다. "암만 해도 안 되겄다. 내가 부산에 가서 만나고 올 끼고마." 지훈 어머니는 여전히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몸도 편찮으신데 우에 부산까지 가 시겠능교?" 박문호는 정매로부터 얼마전에 받았던 편지 내용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정 매가 그에게 부탁한 것은 어떤일이 있어도 지훈 어머니가 부산으로 찾아오지 못하도록 막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라믄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으란 말이가?" "아매 정매씨가 아직 아픈지 도 모르지 않심니꺼?" "그래도 그렇제. 오면 온다, 몬 오면 몬 온다꼬 무신 기별이 있으야 할 거 아이가? 원주 아매 참말로 무심데이." "지가 편지를 한 번 해보겠심더. 아니면 직접 부산에 댕겨오든지..." 박문호는 겨우 지훈 어머니를 다독거리고 돌아와서 정매한테 편지를 썼다. 간밤에 야간 당직을 하고 새벽에야 집에 돌아온 김원철은 샤워를 할 여유도 없이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그는 통잠을 자고 나서 12시가 훨씬 지나서야 눈을 떴다. 야간 당직을 하면서 나이 든 괴팍한 환자한테 시달리느라 잠시도 눈을 붙일 수 없었던 터라 열 시간 동안이나 잠에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잠을 자고 나서 심신이 한결 가벼워진 듯싶었다. 그는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침실의 주황색 커튼을 젖히고 바다를 바라다보았다. 바다보다 신록이 더 보고 싶었으나, 그의 눈에는 싱그러운 4월의 녹음 대신 짙푸른 바다 한 자락이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햇살은 밝게 빛나고 바람은 아파트 입구의 작은 단풍나무 가지들을 가볍게 흔들 정도로 적당하게 불고 있었다. "여보, 나 커피 한 잔." 김원철은 주방 쪽에 대 고 큰 소리로 커피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주방 쪽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한참 후에 커피를 받쳐들고 미적거리는 눈치를 보이며 침실로 들어선 것은 정매가 아니라 파출부였다. "사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시오." 파출부가 커피잔을 침실의 탁자 위에 놓고 나서 말했다. 그제야 김원철은 아내가 의사 부인들과 함께 제주도 관광을 떠난 사실을 깜박 잊고 있던 것 을 알아차렸다. "참, 그렇군요." 김원철은 1년이 가깝도록 아직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해 본 적이 없던 파출부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레나 오실 거 라고 하시데예." 파출부는 그러면서 식탁에 아침을 차려놓았다고 하였다. 김원철은 침대 위 의 앙증스러운 타원형 전자시계를 보았다. 아직 병원에 나가려면 다섯 시간이나 여유가 있 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면 두서너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 터인데, 그 동안 아파트 에서 몽그작거리고 있기도 지루할 것 같았다. 김원철은 세수를 꿑내고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으면서 아내가 없는 불편함과 무료함을 느꼈다. 이럴 때 아내가 있다면 그는 마음놓고 더 잠을 잘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함께 외출을 해서 외식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었다. 김원 철은 대강 아침을 먹고 나서 외출을 서둘렀다. 파출부가 와 있는 아파트 안에 머물러 있기 가 왠지 거북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 저 나갑니다." 김원철은 아파트를 나섰다. 엘리베이 터를 타고 1층에 내리는 순간, 경비 아저씨가 우편물들을 아파트의 각 호실 우편함에 넣다 말고, "선생님, 편지 왔심더." 하면서 김원철을 불러세우고 흰 봉투를 내밀었다. 아내한테 온 편지였다. 그는 그것을 그냥 우편함에 집어넣으려다가 무심결에 발신인을 보았다. 박문호. 김원철이 모르는 남자의 이름이었다. 7. 겨울 해바라기 김원철은 한동안 아내한테 온 편지를 들고 서서 발신인의 주소와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발신지 는 충무였다. 그는 무심결에 아내에게 온 편지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주차장에 세워 둔 그 의 차안으로 들어갔다. 박문호라는 편지의 발신인 이름이 그의 머리 속에서 자꾸만 부스럭 거렸 다. 김원철은 차를 움직이려다 말고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고 알 맹이를 꺼냈다. 아내한테 미안하다는 생각보다는 야릇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 다. 정매씨 그 동안 안녕하신지요? 지난번 편지 받은 후, 지훈이 어머님을 뵈고 모든 것을 원만히 이야기하였습니다. 부산에 가서 정매씨를 만나 볼 생각을 갖지 않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좀 묘하게 되어 다급한 마음으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실은 이미 오래 전에 지훈 어머 님께서 저에게 원주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김원철은 여기까지 편지를 읽다 말고 자동차의 엔진을 꺼버렸다. 편지의 내용에 그의 아 들 원 주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지훈 어머님 이야기로는 원주 일로 변호사를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원주를 찾기 위해서 소송비용까지도 마련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단계에서 내 힘으로 지훈 어머님의 그같 은 생각을 바꾸게 하기란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 된다고 누차 설득을 해보 았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훈 어머니는 나머지 여생을 원주 찾는 일에 바치겠다고 말 씀하시 었습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정매씨께서 직접 지훈 어머니를 만나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 다. 사 태가 이렇게까지 급박해질 줄은 몰랐습니다.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지훈 어머님을 만나 시도록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김원철은 손도 마음도 함께 떨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정신을 빼앗 긴 사 람처럼 자동차 안에 우두커니 앉아 화사한 4월의 햇살이 묶음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우유빛 맑은 하늘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정신을 잃어 버렸다. 긴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 이었다. 그는 분노에 앞서 걷잡을 수 없는 당혹감에 빠져버렸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잠시 눈을 감았다. 원주의 얼굴이 커다랗게 떠오르면서 다시 가슴이 떨려 왔다. 이것은 현실 이 아 니야, 이것은 악몽이야, 하고 김원철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얼마 후에 김원철은 아파트 단지 슈퍼마켓 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가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 심정으로는 병원에 출근 하여 환자를 만나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날 하루를 쉬겠다고 병원에 연락을 취했 다. 그는 전화를 걸고 나서도 한동안 빈총 맞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전화부스 앞에 서 있다가 휘청 거리는 마음으로 자동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편지 봉투의 발신인 주소와 이름을 확인 하였다. 자꾸만 원주의 얼굴이 눈에 밟혀왔다. 그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김원철은 잠시 후 차를 몰아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차는 어느덧 만덕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남해 고 속도로 에는 4월의 눈부신 햇살이 아지랑이처럼 피오 올랐다. 그런 맑은 날씨였는데도 김원철은 자꾸만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 속력을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차를 멈추고 심호흡을 한 다음 에 서행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그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진정될 수 없는 일인 지도 몰랐다. 그는 자동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원주를 낳던 때를 돌이켜보았다. 아내가 원주를 낳던날, 그는 너무 기뻐서 병원에 있는 모든 동료들에게 큰 소리로 아들을 낳았다고 떠들 어댔었다. 그리고 백일잔치며 돌찬치, 유치원에 들어가던 날과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들을 하나 하나 떠올렸다. 그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에 펑 젖어버렸다. 갑자기 원주가 보고 싶어졌 다. 부산에서 충무까지는 세 시간 남짓이면 달릴 수 있는 거리인데도 김원철은 네 시간 이상 이 걸 려서야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봄날의 태양이 숨을 죽이게 될 때까지는 두어 시 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김원철은 편지 겉봉에 씌어 있는 대로 박문호라는 사람이 근무하는 학교부 터 찾 아갔다. 그는 먼저 박문호라는 사람을 만나서 사실을 확인해 보고 나서 지훈 어머니라는 여자도 만나 볼 생각이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김원철은 자 동차를 정문 앞에 세워 두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수업이 끝나 학생들이 운동 장에 가득하였다. 그는 한 학생을 붙들고 박문호 선생님한테 사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해 달라 고 부탁하였다. 박문호가 심부름을 시킨 학생과 함께 운동장의 오른쪽 귀퉁이 나무 그늘 아래에 나타난 것은 한참 후였다. 김원철이 보기에 체격이 탄탄하고 당당한 사내였다. "지를 만나러 오셨 심꺼?" 박문호라는 사람은 심하게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김원철은 편지의 내용과 달리 그 가 사 투리를 지나치게 쓰는 것을 보고 혹시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까하여 잠시 미적했다. "박문 호 선 생님이 맞습니까?" 김원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운동장에서 노는 아 이들이 떠들어대는 소리 때문에 김원철의 묻는 말이 잘 들리지 않은 듯 박문호는 김원철 쪽으로 상반신 을 구부렸다. "맞심더. 지가 박문호라 카는 사람입니더." "아, 그럼 제대로 찾아온 셈이로군 요." 김원철은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선생님은 뉘심니꺼?" "아, 네. 저는... 그러니까 변호사 사 무실에 서 선생님을 좀 만나보려고 이렇게..." 김원철은 애써 궁색하게 입을 열었다. 자꾸만 가슴이 떨려 입이 제대로 열리지가 않았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오셨다고예? 그라믄 최상도 변호사 사 무실에 서 원주의 일 때문에 오섰심니꺼?" 박문호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김원철을 보면서 다급하 게 물 었다. "아, 네 그렇습니다. 최 변호사님 사무실에서 왔습니다." 김원철은 엉겁결에 대답을 하 였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말씀해 보이소." 박문호는 두 차례나 진주에 있는 최상도 변호사의 사무실 에 갔었지만 그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김원철을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저는 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보는 사무장입니다. 변호사님께서 원주라는 아이의 소송 일로 선생님을 만나고 오시라기에..." 김원철은 떨리는 마음으로 거짓말을 하였다. "소송 일로 말입니 꺼? 아니, 그 동안에 그 아이의 할머니 되시는 분이 또 찾아왔습니꺼?" "아, 네 그런 거는 아닙 니다." 김원철은 박문호의 놀라는 표정을 보고 고개까지 흔들어대며 대답했다. "그라믄 무슨 일로 오셨능교?" "변호사님께서 꼭 소송을 하시겠느냐고 물어 보시라 하셨습니다." 김원철은 여 전히 궁 색한 말을 만들어 내느라 끙끙거렸다. "그기 무슨 말씀잉교? 변호사님께서는 지한테 꿈과 희망의 유예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예." 김원철은 박문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얼른 이해가 안 가 한 동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박문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원주라 카는 아아가 그 노 인한테 돌아가서는 안 된다 이겁니데이. 그 아이는 지금 그대로 커야 하는 기라예. 그 아아 의 장 례가 있지 않습니꺼. 우리 친구 어마이는 손자 찾을 생각만 하시지, 그 얼라의 장래는 몬 생각하 신 기라예. 그라이 그 얼라가 내 친구 어머니한테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변호사님께 그렇게 부탁을 안 했능교." 박문호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흥분하여 말했다. "그 원주라는 아이는 그렇다 면, 선생님 친구분의 자식이 분명합니까? 그게 확실한가요?" 김원철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 앉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얼라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내 친구 어머니한테 찾아와서 그렇게 말했다 캅디다. 그라이 거짓은 아니겠지예." 김원철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돌기가 일시에 멎는 듯 하였다. 그는 현기증 때문에 얼핏 눈을 감았다. "그 아이 엄마가 왜 그랬을까요? 이해가 잘 가 지 않는군요." 김원철도 그의 아내가 지훈 어머니라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했으리라고는 믿어지 지가 않았다. 김원철은 박문호에게 양해를 구할 사이도 없이 그늘 밑의 시멘트 의자에 앉았 다. 갑 작스런 현기증 때문에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무서운 흉몽에 시달리 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흉몽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 왜? 왜 그런 이야기를 그 여자가 했을까요?" 김원철은 다급하게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런 김원 철의 태도에 박문호의 표정이 약간 뜨악해진 듯싶었다. "그야 모르겠심더. 아매도 내 친구 어마이 가 불쌍해서 그랬을 끼고마예. 그때 내 친구 어마이는 아들이 죽자 더 살기를 포기하고 죽기로 작정을 했다 아입니꺼. 아매도 그 여자는 내 친구 어마이가 그리 된 것이 불쌍해서... 앞 뒤 생각 않고 그 말을 했던 거 안가 싶네예. 그말을 듣게 된 내 친구 어마이는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았 심더. 손자를 찾을 욕심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기지요." 순간 김원철은 언젠 가 아 내가 처녀 시절에 사귀었던 남자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아내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결혼 후로 아내의 그렇듯 우울한 표정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면 그 아이의... 그러니까 선생님의 친구 되시는 분은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김원철 은 아내가 남자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때를 어림하여 물었다. "작년 초겨울 이 었지예. 그런데 최 변호사님께서 와 지한테 선생님을 보내 소송할 의향을 물어보시는지 모르겠 네예." 박문호는 그러면서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원철은 박문호에게서는 더 이상 알아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흉몽속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한 가운데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박문호에게 건성으로 그만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여전히 휘청거 리는 마음으로 교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박문호는 그런 김원철을 다소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 보며 서 있었다. 최 변호사의 사무장이라는 사람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는 사무장이라는 그 사 람이 교문을 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교무실로 돌아왔다. 교문 을 나온 김원철은 그의 자동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원주가 태어나던 때를 돌이 켜보았 다. 원주는 팔삭둥이였다. 팔삭둥이치고 아기는 건강하였다. 인큐베이터에 넣을 필요도 없었 다. 김 원철은 교문 앞에 있는 문방구에 들러 편지 봉투를 샀다. 그리고 박문호의 이름으로 겉봉을 쓰고 이미 꾸적꾸적해진 박문호의 편지를 꺼내 봉투를 바꾸었다. 그리고는 우체국에 가서 박문호 가 아 내에게 보낸 그 편지를 속달로 부쳤다. 그리고 그 길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밤이 늦 어서야 부산에 돌아온 김원철은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술집으로 향했다. 그는 혼자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그가 그처럼 술을 많이 마셔본 것은 그의 생애에서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의과대 학 본 과 1학년 해부학 시간에 처음으로 시체를 대하던 날이었고, 두 번째는 경옥이와 헤어지기로 결심 하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던 날 밤이었다. 김원철은 새벽 5시가 되어서야 자 동차를 버리고 마음도 몸도 한꺼번에 비틀거리면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잠들어 있던 원주가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아빠. 왜 이제야 오세요? 엄마한테서 전화가 두 번이나 왔었는데..." 원 주가 잠 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김원철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전등에 비치는 원주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침실로 들어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 위에 벌렁 누워 버렸다. 김 원철은 해가 떠오른 다음에야 잠에서 깨어나 세수를 하고 출근을 서둘렀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파출 부가 와 있었다. 그가 아침도 먹지 않고 구두를 꿰고 있는데, 제주도에 가 있는 아내한테서 장거 리 전화가 걸려 왔다. "당신이야? 어젯밤에 병원에도 안 계시던데 어디를 가셨어요? 저 없 는 사 이에 한눈 파시는 건 아니겠죠? 오늘 오후 한 시 비행기로 가겠어요. 당신 공항까지 나오시 는 거 죠?" 정매는 칭얼거리듯 숨가쁘게 지껄여댔으나 김원철은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듣고만 있 었다. 정매는 계속해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묻고, 공항에서 만나자는 말을 마지 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김원철은 여전히 전날처럼 휘청거리는 심신으로 병원에 출근했다가, 아침은 물론 점심도 굶은 채 아내가 공항에 도착할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갔다. "당신하고 한 이년쯤은 떨어 져 있다가 다시 만나는 기분이예요." 김원철과 함께 차에 올라 운전석 옆자리에 앉으며 정매가 아양을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김원철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사흘 낮 이틀 밤의 짧 은 이 별이었지만, 그 기간이 유별나게 길게 느껴졌다. 그 사흘이 그에게는 아내와 함께 살아온 횟수만 큼 아득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사흘만에 만난 아내가 더없이 낯설었다. "이틀 밤 내내 전 혀 잠 을 못 잤다구요. 이상하게도 전 당신과 떨어져서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니까요. 그런데도 당신은 병원에도 안 계시고, 열두시가 넘을 때까지도 집에 들어오시지 않으셨더군요?" 그러면서 정매는 밉지 않은 눈으로 김원철을 흘겨보았다. "이제 여자들끼리는 여행을 가지 않겠어요. 당신 하고만 다닐 거예요. 우리 둘이서만 언제 제주도에 다시 가요." 정매의 말에 김원철은 대꾸하지 않 았다. "다음 주말이나 한 번 갈까?" 김원철은 한참 있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하였다. 김원 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보기에 아내의 기분은 여 느 때 보다 좋은 듯싶었다. 김원철은 아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소파에 앉아 앉으면서 자신의 의연한 태도에 스스로 놀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의 그 같은 행동은 의연한 것이 아니라, 절망과 분노 와 허무함을 견뎌내기 위한 고통스러운 몸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는 가벼운 원 피스로 갈아입고 안방에서 나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하였다. 김원철은 그런 아내를 굳은 표정으 로 바라보았다. "참 사모님, 속달 편지가 왔습니더." 아내가 거실로 나오기를 기다리던 파 출부는 김원철 부부가 들어오기 10분전쯤에 배달되어 온 속달 편지를 들고 서 있었다. 김원철은 그 속달 편지가 바로 박문호에게서 왔던 것을 그 자신이 충무에서 다시 부친 것임을 알았다. 김원철 은 순 간 눈심지를 빳빳하게 세워 아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편지를 받아든 정매는 얼핏 김원철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더니, 이내 콧노래를 멈추고 편지를 든 채 화 장실로 들어갔다. 김원철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잠시 더 머물러 있었다. 박문호가 보낸 편지를 읽고 난 후의 아내 표정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지를 들 고 화 장실 안으로 들어간 정매는 10분이 지나고 15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정매가 화장 실에서 나온 것은 좌변기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쏴아 하게 들린 지 5분이 지나서였다. 정매의 손에는 편지가 들려 있지 않았다. 김원철은 그 편지가 이미 산산조각 나서 좌변기의 물과 함께 하 수도로 흘러 내려가 버렸다는 것을 짐작하였다. "아주머니, 이 편지 언제 왔어요?" 화장실에서 나온 정매 는 김원철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주방 쪽을 향해 물었다. "선생님이랑 사모님이랑 들어오시 기 쬐 금 전에 왔심더." 정매는 파출부의 말을 듣고서야 김원철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어색하게 힐끔 웃어 보였다. 김원철은 아내가 파출부에게 편지가 언제 왔느냐고 묻는 속내와, 그를 보고 어색하 게 미소를 흘려 보내고 있는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편지를 화장실에서 읽어?" 김원철이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물었다. "친정에서 왔어요. 당신 다시 병원에 나가셔 야 한 다면서요?" 정매는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날려보내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나가봐야겠 어." 김원철은 공허하게 말하고 아파트를 나섰다. 김원철은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심신이 허탈해 졌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궤적이 동시에 엿가락처럼 뒤틀리면서 가정이라는 행복의 최 소 단 위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통스러운 절망감을 맛보았다. 그는 여태껏 모 든 행 복은 가정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을 신앙처럼 간직하고 살아왔다. 여자건 남자건 가정에 서 행 복을 누릴 수 없다면, 이 세상 어디에서든 행복을 다시 찾을 수가 없다고 믿어 왔었다. 그 러기에 그는 가정을 사랑했고, 그 안에서 행복해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행복의 최소 단위이 며 최대 단위인 가정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 속에서 허탈감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내 정매의 배신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다. 이기적인 그는 아직 자신의 결점 에 대 해서는 반성할 기회마저도 갖지 않았다. 병원에 돌아와 건성으로 진료를 끝내고, 얼마 후 퇴 근 시 간이 임박했지만 김원철은 집에 가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다. 여느 알 같았으면 퇴근 시간이 되기 가 바쁘게 동료들의 한잔 권유를 냉엄하게 뿌리치고 집으로 직행을 했을 김원철인데, 이 날만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고 자꾸만 미적거렸다. 그는 생각할수록 정매에 대한 배신감 때문 에 그 녀의 얼굴 대하기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퇴근 시간이 넘어서 느지막이 차에 오른 김원철은 집으 로 돌아가지 않고, 미숙이 모녀가 사는 동네 쪽으로 차를 몰았다. 갑자기 미숙이 모녀가 보 고 싶 었다. 경옥이가 눈을 뜬후 한사코 그의 곁에서 멀리 떠나겠다는 것을 억지로 붙잡아 두기를 잘했 다고 생각하면서, 김원철은 그들 모녀에 대한 연민이 새삼스레 강하게 뻗질러오르는 것을 느꼈다. 경옥은 김원철이 그들 모녀를 부산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몇 가 지 조 건을 제시했었다. 그 조건들이란 지금까지 매달 지급해 주었던 생활비를 중단할 것과 매주 금요 일마다 그들 모녀를 방문해 왔던 것을 취소하라는 것이었다. 눈을 뜬 경옥은 맹인들을 위한 점자 도서관에 일자리를 구하여 독립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김원철은 매달 생활비를 대주 는 것을 그만두라는 조건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했었다. 그랬더니 경옥은, "두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죄악이에요. 전 저로 하여금 부인이 고통을 당하거나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아요. 미숙이는 이제 저 혼자 힘으로도 잘 키울 수가 있어요.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모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세요. 미숙이한테도 그렇게 말했어 요. 미숙이도 아빠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했구요. 미숙이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녜요."라고 말하면 서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산에서 멀리 떠나 버리겠다고 하였다. 그후 김원철 이 미 숙이 모녀를 찾아오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처음 얼마 동안은 2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다가 3주일 에 한 번,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꼴로 멀어지고 만 것이다. 김원철은 미숙이 모녀가 사는 동 네 가 까이 차를 몰고 가다가 경옥이 시내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김원철은 시내버스에서 내린 경옥이 고개를 반짝 쳐들고 봄날의 마지막 햇살을 얼굴에 듬뿍 받으며 당당하게 걷는 모습 을 지 켜보고 있었다. 김원철이 보기에 그런 경옥은 무한히 자유스럽게 느껴졌다. 오히려 속박을 당하고 있는 것은 김원철 그 자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자신은 두 개의 밧줄에 묶여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옥이와 정매가 하나씩 각기 다른 밧줄을 가지고 그의 육신과 영혼을 결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누구도 밧줄을 풀어 줄 것 같지 않았다. 얼핏 생각하기에 경옥이 쪽에서 이미 그 밧줄을 놓아버린 것 같지만, 김원철 쪽에서 생각하면 그것이 아니었다. 그의 입장 에서 보면 경옥이는 전과 다름없이 그를 결박하고 있었다. 김원철은 서서히 차를 몰며 경옥 의 뒤 를 따라갔다. 경옥이가 시내버스에서 내려 전봇대 하나 간격쯤 걸어갔을 때, 집 쪽에서 미 숙이가 뛰어나오고 있었다. 엄마를 마중 나온 것이다. 그들 모녀는 마치 몇 년만에 처음 만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반가워하며 얼싸안았다. 김원철의 눈에 그런 미숙이 모녀가 행복해 보였다. 그 들 모 녀는 같이 살면서도 언제나 새롭고 신비로운 만남과도 같은 감격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 를 대 하고 있었다. 미숙이에게나 경옥이에게 있어서의 한순간 한순간은 경이로움과 새로움의 연 속이었 다. 미숙이가 언젠가 김원철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빠, 참 이상하지? 날마다 엄마를 보는데 말야, 엄마가 늘 새롭게 보이는 거 있지? 어제의 엄마하고 오늘의 엄마는 다르단 말야. 왜 그런지 모르 겠어. 어마만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도 나무들과 바람과 바다와 구름들도 언제나 새롭 게 보인단 말야. 참 이상하지?" 김원철은 미숙이의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움과 부러움을 동시 에 느 꼈었다. 자신은 아이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아빠로 보여지지 않는다는 게 부끄러웠고, 언제나 새롭 게 보인다는 경옥에게 부러움을 느낀 것이었다. 모녀는 손을 잡고 즐겁게 웃으면서 골목으 로 휘 어들고 있었다. 김원철은 그런 그들의 행복한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부르 지 않고 멀찍이 바라보며 뒤따라갈 뿐이었다. 미숙이 모녀는 골목 어귀 모퉁이에 있는 ' 꼬마 슈 퍼'라는 상호가 달린 가게에 들러 저녁거리 반찬감을 사고 있었다. 잠시 후에 미숙이가 먼 저 꼬마 슈퍼에서 나오다가 김원철의 차를 발견하고는 쪼르르 내달아왔다. "아빠, 아빠, 언제 왔 어요?" 미숙이는 손으로 차창을 가볍게 두들기며 호들갑스럽게 소리쳐댔다. 그런 미숙이의 얼굴은 아침 햇살을 받은 이슬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아빠, 언제 오셨어요?" 미숙이가 다시 경어를 써가며 물었다. 미숙이가 반말을 하지 않고 존대말을 쓸 때에는 흥분이 가라앉았음을 말해 주고 있 는 것 이었다. "조금 전에." 그렇게 말하면서 김원철은 꼬마 슈퍼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경옥이가 반찬거 리를 사들고 꼬마 슈퍼에서 나오다 말고 두렷두렷 미숙이를 찾다가 김원철의 차를 발견하고 천천 히 다가왔다. 김원철은 경옥이가 가까이 오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옛날의 모습 으로 되돌아간 듯싶었다. 옛날처럼 밝은 표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꽃잎 처럼 부드럽고 호수처럼 잔잔했다. 물빛 바탕에 흰 점무늬가 박힌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경 옥이의 모습은 청정한 바다의 빛깔처럼 깨끗하고 꾸밈이 없어 보였다. 시기심도, 지나친 욕심도, 미워함 도 없이 오직 순결함과 사랑스러움만이 가득 넘쳐 보이는 그녀의 본래 모습을 되찾은 것처 럼 보 였다. "언제 오셨어요?" 경옥은 김원철이 자동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가볍게 목례를 하며 담담하게 물었다. 특별히 반가움을 나타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피하려는 눈빛도 아니었다. "미숙아, 엄마랑 함께 타거라." 김원철이 자동차의 문을 열어주며 말하자 미숙이 가 엄마 의 손을 끌다시피 하여 자동차 뒷좌석에 올랐다. 경옥이도 미숙이한테 끌려가는 척하면서 말없이 자동차에 올랐다. "오늘 저녁 반찬은 뭔가? 벌써부터 입맛이 동하는데?" 김원철이 자동차를 몰고 천천히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아빠, 우리랑 같이 저녁 잡숫고 가셔도 되요?" 김 원철의 말에 미숙이가 상반신을 앞으로 꺾어 고개를 김원철쪽으로 바짝 들이대고 물었다. "그래, 저 녁 좀 얻어먹으려고 왔단다. 오늘 저녁 네 엄마가 만든 음식 솜씨 한 번 볼까 하고 말야." 김원철 이 웃 으면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엄마 큰일났네. 아빠가 엄마 음식 솜씨 테스트하신대. 그렇지만 엄마 걱정 마. 아빠는 게탕만 얼큰하게 끓여주면 좋아하시거든. 이럴 줄 알고 게를 샀잖아요." 미숙이 는 엄마한테서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가 얼큰한 게탕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들어서 알 고 있 었다. 물론 미숙은 지금까지 엄마가 아빠에게 게탕을 끓여주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옛날에 엄마가 아빠한테 게탕을 끓여주면 좋아했다는 말만 듣고, 언젠가 자신이 아빠에게 엄마의 솜씨대 로 게탕을 맛있게 끓여 드려야겠다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그날도 미숙은 꼬마 슈퍼에서 엄마한 테 게탕 끓이는 법을 배우기 위해 게 두 마리를 사자고 졸랐던 터였다. 그날 저녁 김원철은 참으 로 오랜만에 경옥이가 끓여준 얼큰한 게탕을 맛볼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김원철은 경옥이 가 눈 을 못 보게 된 이후 처음으로, 그의 체내에 앙금처럼 깊숙이 가라앉아 버린 그리움의 향수 같은 것을 다시 맛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게탕을 먹으면서 몇 번이고 경옥이의 얼굴을 마 주보았 다. 어쩐지 오랫동안 기억 상실증으로 잃어버렸던 고향에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는 경옥이 모녀를 부산에 붙잡아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것과 같은 이 포 근하고 느긋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는 뼈저린 자책감에 떨었다. 그는 비로소 마음속 깊숙한 곳으 로부터 경옥이 모녀를 버렸던 자신에 대해서 견딜 수 없는 수치감을 느꼈다. 그는 자꾸만 경옥의 얼굴을 죄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김원철 자신 에게 어떤 욕심을 부리지도 강요를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앞을 못 보는 처지에 있을 때도 김원 철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려고 하지 않았던가. 김원철은 그런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경옥을 저버렸던 자신이 싫었다. "아빠, 엄마 게탕 솜씨 어때요?" 미숙이가 잠시도 김원철의 얼굴에 서 시 선을 떼지 않고 되작거리며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최고다. 옛날 그 맛이로구 나. 아 주 맛이 좋다. 아빠는 오랫동안 이 맛을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엄마의 게탕요리 솜씨는 정말 만점 이야." 김원철은 밝게 웃는 얼굴로 경옥이와 미숙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경옥은 그런 김원철 의 밝 은 얼굴을 오랜만에 본 것 같아 가슴이 찌릿찌릿해 왔다. "저엉말? 엄마 들었지? 아빠가 엄 마 게 탕 솜씨 최고래." 미숙은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그런 미숙을 보고 경옥은 싱긋이 웃었다. 그녀 는 김원철이, 오랫동안 이 맛을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라고 한 말이 가슴에 남았다. 그녀는 그 말 을 여러 가지로 음미해 보았다. 그리고 그녀도 , 당신 얼굴의 밝은 모습을 저도 오랫동안 보 지 못 했군요, 라고 마음속으로 대꾸하였다. "남은 거 있으면 좀더 먹었으면 좋겠는데..." 김원철이 경옥 을 향해 빈 게탕 그릇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아빠를 보고 미숙이가 쿡쿡 거리며 웃어댔다. 미숙은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다. 지금껏 이처럼 행복한 식사 시간 은 처 음이었던 것이다. 미숙은 마음속으로 이런 행복한 시간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 로 짧지만 진심이 어린 화살기도를 보냈다. "괜히 억지로 드시지 말아요. 맛이 없다고 하셔 도 상 관없어요." 경옥은 그러면서도 국자로 게탕 국물을 떠 김원철의 그릇에 가득 부어주었다. 미숙이 모녀와 함께 저녁을 먹고 난 김원철은 좀처럼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밤 9시 가 넘 었다. 김원철은 미숙이 모녀와 함께 이토록 밤늦게까지 얼굴을 맞대고 있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 다. 경옥이는 그런 김원철이 아무래도 이상해 보였다. 지금까지는 극히 사무적으로 두 시간 혹은 세기간 동안, 그것도 여러 차례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채우고는 훌쩍 일어서게 마련 이었는 데, 이 날 밤만은 저녁을 해달라고 하여 먹고는 한사코 몽그작거리며 일어날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경옥은 필시 김원철에게 무슨 일이 일러난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그렇지 않 고서는 이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홉 시가 넘었어요." 경옥은 김원 철이 한사코 몽그작거리자 괜히 불안해졌다. 미숙은 그런 엄마를 향해 눈을 가볍게 흘겨 보였다. 괜히 아빠를 재촉할 게 뭐냐는 그런 눈빛이었다. "벌써 아홉 시야 ?" 김원철은 다소 당황한 듯한 얼굴로 시계를 들여다보면서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참, 미숙이 너 친구들 데리고 병원 구경하고 싶다고 그랬었지? 그때는 아빠가 미안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언제든지 네 친 구들을 데리고 와도 좋다. 아빠가 말야, 네 친구들한테 맛있는 것도 사 줄게.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어떠 냐, 내일 데리고 올래?" 김원철은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정말? 내일 친구들 데리고 가도 괜찮 아?" "괜찮고말고. 아빠가 병원 구경시켜 주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하잖니." 김원철은 싱글 거리기까지 하면서 자신 있게 말하였다. "열 시가 다 돼가요." 경옥이 다시 벽시계를 올려 다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벌써? 오늘 밤은 왜 이렇게 시간이 잘도 가는지 모르겠네." 김원 철은 그러면서 자신의 손목시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경옥은 김원철의 가정에 아무래 도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그녀는 김원철의 표정에서 그것을 읽을 수 가 있 었다. "아빠, 여기서 우리랑 주무시고 가면 안 돼?" 미숙이가 칭얼대듯 말하자 경옥은 무섭 게 딸 을 찔러보았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주무시기는 어디서 주무셔? 얘가 오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네." 경옥은 그러면서 김원철에게 빨리 일어서라고 재촉이라도 하 듯 다 시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김원철은 11시가 다 되어서야 들돌을 들어올리듯 힘겨운 몸짓으 로 겨 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집에 돌아가기 싫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었 다. 경 옥은 그런 김원철의 태도에 의아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미숙아, 내일 친구들 데리고 병원에 오거라." 김원철은 미숙에게 그렇게 당부하고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가 차에 올랐 다. 그 는 정말 집에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아내와 원주의 얼굴을 대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김원철 은 아파트 단지 안에 와서도 이내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다시 밖 으로 걸어나와 포장마차로 가 소주를 주문하였다. 그는 혼자 소주를 홀짝거리면서 시간이 빨리 흐르기 를 기다렸다. 원주가 잠들어 버린 다음에 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이 온통 영원히 잠들어 버렸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소주 한 병을 천천히 비우고 나자 12시가 되었다. 그제 야 김원철은 휘청거리며 포장마차에서 나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아파트 안으 로 빨 려 들어갔다. "왜 이리 늦으셨어요? 병원에서는 일찍 나가셨다는데..."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가 아 파트 문을 열어주며 상냥하게 맞아 주었다. 김원철은 아내의 그 상냥한 태도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뚫어져라 하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원주가 아빠 오시면 자겠다고 여태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야 잠이 들었어요." 아내는 꿀물을 타서 김원철 이 벌 렁 나자빠져 있는 긴 소파의 탁자에 놓고 두 팔로 상반신을 안아일으키며 말했다. "원주가? 원주 가 왜?" 김원철은 멀뚱하게 아내를 쳐다보며 시비조로 반문하였다. "원주가 왜 기다리겠어 요. 아 빠가 보고 싶어서 그렇겠지요." 아내는 김원철의 가시 돋친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 였다. "내가 보고 싶다고? 왜?" 김원철은 여전히 따지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 요?" "무슨 소리?" 두 사람이 동시에 묻고 서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먼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원철은 순간 자신을 마음속으로 탓하였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입으로 원주의 일을 까발리지 않으리라 결심한 바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까지라도 정매의 입에 서 진 실의 말이 터져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었다. 다음날 미숙이가 친구들을 데리고 병원에 나 타났다. 얼마 전에 미숙이는 병원을 구경하러 오겠다는 전화를 걸었었다. 그때 김원철은 바쁘다는 핑계로 미숙과의 약속을 저버렸고, 그때의 일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이번에 는 아주 특별하게 미숙을 반겨주었다. "그래, 우리 미숙이로구나. 친구들하고 같이 왔겠지? 곧 내 려갈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김원철은 그렇게 말하고 곧 간호사를 시켜 수위실에 있는 아 이들을 그의 방으로 안내해 오라고 부탁하였다. 간호사를 따라 김원철의 방으로 들어옴 미숙의 친 구들은 9명이나 되었다. 미숙의 친구들은 잠시도 입을 닫아두지 않고 계속 떠들어대면서 줄줄이 이어서 들어왔다. 김원철은 미숙이가 이렇게 많은 친구들을 한꺼번에 몰고 올 줄은 몰랐다. "우리 미숙이 친구들이 왔구나." 김원철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맞았다. 미숙의 친구 들 중 에는 여자아이들 외에 사내아이들도 3명이나 끼어 있었다. 미숙은 김원철에게 가까이 다 가와서 입을 그의 귀에 바짝 들이대고, "여기서 아빠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하고 속삭이듯 물었 다. "그 러엄, 괜찮지 않고? 얼마든지 큰 소리로 그렇게 불러도 괜찮구말구." 김원철은 그러면서 미숙을 안아주기까지 하였다. 그제야 미숙은 얼굴이 활짝 밝아지면서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는 듯 하였다. 기실 미숙이는 아빠와 약속한 대로 친구들을 끌고 오긴 했어도 간호사들이 보는 앞이라 아 빠라고 부르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걱정을 했었다. "얘들아, 우리 아빠야. 아빠 내 친구들이에 요." 미숙은 큰 소리로 아주 당당하게 말하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우리 미숙이 친구들이 여 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대접을 했으면 좋을까?" 김원철은 미숙이의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김원철 의 방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미스 진은 미숙이와 김원철의 말에 약간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미스 진은 김 박사에게 딸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얘는 아기 낳는 것을 구경하고 싶답 니다." 키가 작달막하고 어깨가 쩍 벌어진 사내아이가 옆에 서 있는 친구를 찔벅거리며 큰 소리 로 말했다. 그 말에 사내아이들은 쿡쿡거렸고, 계집아이들은 우우 하고 비아냥거리는 흉내 를 냈 다. "아녜요. 미숙이 아빠, 저는 시체를 보고 싶어요." 키 작은 사내아이의 옆에 서 있는 친구가 말했다. "그럼 시체실로 데리고 갈 테니 나를 따라오너라." 김원철이 그렇게 말하고 아이들 을 둘 러보았다. 물론 그는 농으로 그냥 해본 말이었다. "좋아요. 구경시켜 주세요." 김원철의 말 에 3명 의 사내아이가 동시에 대답하며 정말로 김원철을 따라나설 기세였다. 김원철은 미숙의 친구 들 중 에서 뜻밖에도 영안실을 구경하고 싶다는 아이들이 많은 것에 적이 놀랐다. 그러나 그는 아이들 에게 영안실 구경을 시켜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들에게 주검의 허무함을 느끼게 해줄 필요가 있겠는가? "자, 다들 이 간호사 언니를 따라가 봐요. 그러면 유익한 구경을 할 수가 있을 거 예요." 김원철은 그렇게 말하고 미스 진을 가까이 불러, 영안실 대신 신생아실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인큐베이터 속에 들어 있는 갓난아이들이나 구경시켜 주라고 속삭이듯 일렀다. 김원철은 미숙의 친구들이 미스 진을 따라나가는 것을 보고 싱긋 웃었다. "시시하게 갓난아기 구경만 했 어요." 잠시 후에 신생아실 구경을 하고 돌아온 사내아이들이 실망했다는 투로 불만을 퉁겨댔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은 신생아실을 구경하고 온 것에 대해 저희들끼리 신기해 하는 말을 주고받 았다. "자, 그럼 이번에는 나를 따라오너라." 김원철은 그렇게 말하고 마치 초등학교 선생처럼 아 이들을 이끌고 구내 매점으로 가서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미숙은 아이스크림을 핥아대 며 친 구들 사이에서 명랑하게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김원철은 그런 미숙을 보고 흐뭇해 하였 다. 처음으로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흡족했다. 그는 여태껏 미숙이가 이렇게 명랑하 게 얼굴을 활짝 펴고 떠들어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김원철은 미숙이가 집 에 돌 아가서 제 엄마한테 오늘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신나게 털어놓는 장면을 상상하며 찐득한 미소를 흘렸다. 이 날 김원철은 미숙이한테 용돈까지 주어 보냈다. 그가 미숙이에게 용돈을 준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친구들 앞에서 으스대고 싶었던지 미숙은 사양하지도 않고 용돈을 받으며, "얘들 아, 우리 아빠가 주신 돈으로 피자 먹으러 가자." 하며 아이들을 몰고 병원을 나갔다. 김 원철은 병원의 출입구까지 나가서 미숙의 친구들을 배웅해 주었다. 미숙은 병원 마당을 빠져나가면 서 몇 번이고 아빠를 돌아다보며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전 따님이 있는지는 몰랐 어요." 아이들을 보내고 진찰실에 들어오자 미스 진이 말했다. "예쁘게 생겼지?" 김원철이 미슨 진에게 물었다. "예쁘고 아주 야무지게 생겼어요. 꼭 사모님 닮은 것 같아요." 미슨 진의 말에 김 원철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불쌍한 아이야." 김원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숙이가 병원에 찾아온 그날, 김원철은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진료실에 혼자 남아서 미적거리다가 해질 무렵이 되어서 야 차를 몰고 미숙이 모녀가 사는 동네로 향했다. 그는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서 그들 모 녀에게 찾아와서는, "나, 저녁밥 좀 얻어먹으러 왔는데...." 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미숙이는 아빠 의 출현 에 반가움을 감추지 멋하고 즐거워하였으나, 경옥은 그런 김원철을 여전히 뜨악해 하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집에 무슨 일이 있어요?" 경옥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김원철은 조금도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거듭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왜, 밥을 주기 싫어 서 그래?" 하고 따지듯 반문하였다. 경옥은 다시 꼬마 슈퍼에 나가 반찬거리를 사다가 저녁 준비 를 할 수밖에 없었다. 김원철을 밖으로 내쫓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 으면서 미숙은 엄마에게 낮에 친구들을 데리고 병원에 찾아갔던 이야기를 신나게 지껄여댔다. 경옥 은 그 냥 건성으로 듣고만 있었다. "우리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요. 걔들은 여지껏 나한테 아빠가 계시지 않은 것으로 알았거든요. 그래서 나를 무시하는 애들도 많았다구요. 그런데 이젠 싹 달라졌지 뭐예요. 아빠, 정말 고마웠어요." 경옥은 미숙의 말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 도 모 르게 눈시울이 핑 젖어 그것을 김원철에게 보이도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원철 은 경 옥의 시울이 젖은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날 밤에도 김원철은 10시가 넘어서야 일어섰다. 그리고 아파트에 자동차를 주차시킨 후,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나서야 비틀거리면 서 집 으로 들어갔다. 12시가 넘었기 때문에 원주와 창주는 자리에 든 후였고, 그의 아내 정매가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로 맞아주었다. 김원철은 차라리 아내가 왜 밤마다 술에 취해서 늦게 들어오 는 것 이냐고 앙탈을 부리며 좀 따져주었으면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정매는 여느 때와는 달리 관대 해진 것인지, 관심이 무디어진 것인지, 아니면 죄의식 때문에 잠자코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 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김원철은 미숙이 모녀 집으로 퇴근을 하여 거기서 저녁을 얻어먹 고, 10 시가 넘어서야 일어서서 아파트 단지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포장마차에 들러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런데도 정매는 조금도 신경질을 부리거나 밤마다 귀가 시간이 늦은 이유를 따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매는 김원철에게 원주를 데리고 잠깐 친정에 다녀와야 겠다고 하였다. "엄마가 또 편찮으신가 봐요.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었는데 원주가 보고 싶다고 해서 요...." 김원철은 아내의 속내를 환희 뚫어보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 거렸다. 김원철은 그의 아내 정매가 거짓말을 꾸며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아내가 원주를 데리고 죽은 지훈이라는 사람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 면서도 그는 전혀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자니 더욱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그가 알고 있는 대로 큰 소리로 퍼붓고 따져버린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참았다. 참는 데까지 참고 견디기로 한 것이었다. 정매가 원주를 데리고 하동으로 떠난 일요일 아침, 김원철은 창주를 차에 태우고 아파트를 나섰다. 그는 창주를 태우고 미숙이네 집 쪽으로 향했다. "아빠가 다 시 올 때까지 꼼짝 말고 차 안에 있어야 한다." 미숙이네 집 근처에 차를 세운 김원철은 창주에게 그렇 게 이르고 나서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미숙이 모녀는 성당에 갈 준비를 하고 있 었다. "미숙아, 오늘은 아빠하고 같이 지내자." 김원철은 그렇게 말하면서 경옥이에게 혼자 성당에 가도 록 부탁했다. 경옥은 김원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대신 경옥은 미숙이가 돌아오면 저녁 미사 에 참례하겠다고 하였다. "아빠, 엄마랑 같이 가면...." 미숙이가 김원철의 눈치를 살피며 조 심스럽 게 말하였지만, 김원철은 오늘만은 안 된다고 잘라 말하고 미숙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너한 테 소 개해 줄 아이가 있다." 김원철이 초록 대문을 나오면서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누군데?" 미숙은 그렇게 물으면서 잠시 걸음을 멈추어섰다. "이름은 김창주인데, 바로 네 동생이다." 김원철 은 그 말에 미숙은 놀라는 아빠를 쳐다보며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 었다. "창주한테는 말하지 알고 너만 알고 있거라. 창주가 조금 더 크면 아빠가 직접 말해 주 겠다." 김원철이 나지막하게 당부를 해서야 미숙은 천천히 서너 차례 고개를 끄덖이고 나서 무겁게 걸음 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창주야, 누나하고 뒷자리에 나란히 타거라." 자동차로 돌아온 김원 철이 자 동차의 뒷문을 열어주며 창주에게 말하자, 창주는 서먹한 눈으로 아빠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미숙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창주야, 이 누나는 이름이 미숙이란다. 너보다 나이가 네 살이나 많으니까 누나라고 불러도 되겠지?" 김원철의 말에도 창주는 여전히 서먹한 눈으로 미숙이 를 바 라 볼 뿐이었다. 김원철이 차에 오르라고 하였지만, 미숙은 창주와 김원철을 번갈아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창주도 미숙에게 차에 오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창주야, 누나한테 어서 차에 타라 고 해야지." 김원철이 창주에게 다시 재촉을 해서야 창주는 마지못해 입을 내민 채, "어서 타." 하고 말했다. 그제야 미숙은 잠시 지싯거리다가 뒷좌석 창주 옆에 앉았다. 창주와 미숙은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도 좀처럼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빠, 어디로 가는 거야?" 창주가 뚱한 표정으 로 물었다. 그는 처음 본 미숙이와 같이 있는 것이 어딘가 불편한 듯싶었다. "창주는 어디 가고 싶으냐?" "엄마는 왜 형만 데리고 갔죠? 왜 나는 데리고 가지 않았어?" 창주는 아빠의 묻는 말에 엄마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창주는 아빠하고 같이 지내는 것이 싫으냐?" "나도 외할 머니 보 고 싶단 말야." 창주는 여전히 불만 섞인 목소리였다. "너네 둘이 모두 외가에 가면 아빠 혼 자 심 심해서 어떻게 하니? 그래서 엄마가 창주를 아빠와 함께 있도록 해주신 거야. 넌 그것도 모르겠 어?" "그러면 아빠랑 같이 가면 되잖아. 우리 네 식구 함께 갔으면 더 좋잖아." 김원철은 창주의 불만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우울한 기분이 되어 말없이 차를 몰았다. 음악을 틀었다가 다시 꺼버렸다. 창주와 미숙이를 태우고 바람을 쐬면 기분 전환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 려 마음이 회색빛으로 무겁게 가라앉기만 했다. 그가 미숙이와 창주를 차에 함께 태우고 드라이 브를 한 것은 어쩌면 아내 정매에 대한 가벼운 반란을 시도한 것인지도 몰랐다. "미숙이는 어디 갔으면 좋겠니?" 한참 후에 김원철은 자동차가 빨간 신호등에 묶이자 얼핏 뒤를 돌아보며 물었 다. "창주한테 물어보셔요. 저는 아무데나 좋아요." 미숙은 어색하게 웃으며 창주의 얼굴을 살폈 다. 창주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채 앞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창 주로서 는 엄마가 원주 형만 데리고 외가에 간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해 있었는데, 아빠가 웬 낯선 계집 아이를 차에 태우고는 누나라고 부르라고 하니 적이 심사가 뒤틀렸던 것이다. 창주는 그러 나 아 빠가 누나라고 부르라는, 눈빛이 서글서글하면서도 야무지게 생긴 옆자리의 계집아이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창주야, 어디 갔으면 좋겠느냐?" 김원철이 다시 부드럽게 물었다. "아빠 마음대로." 창주의 대답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미숙이는 가고 싶은 데 없 냐? 먹고 싶은 것은?" "모르겠어요. 아...." 미숙이는 자신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튀어나 오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미숙은 그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큰 불기 둥 같 은 것이 뻗질러오르는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김원철은 룸미러를 통해 당황해 하는 미숙의 얼굴 을 보았다. 김원철은 미숙이가 아빠라고 말하려다가 창주를 의식하고 입을 다물었음을 눈 치챘다. 그는 미숙의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명치 끝이 아려왔다. 어린 미숙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에 괴로웠다. 그는 오랫동안 말없이 핸들을 잡은 채 도로 끝만을 바라 보았다. 어느덧 자동차는 해운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음이 답답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방향을 바다 쪽으로 돌려버린 것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바닷바람에 날려보내 버리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몰랐 다. 그는 해운대 근처의 식당에서 두 아이들과 함께 점심이나 먹고 돌아와야겠다고 생각 하였다. "누나 이름이 뭐야?" 김원철이 우울한 생각에 젖어 천천히 자동차를 몰고 있는데 창주가 뚜 벅 미 숙이에게 물었다. "미숙이." 창주가 이름을 물어서야 미숙은 다소 굳었던 마음이 풀어진 듯, 목소 리가 부드러웠다. 미숙은 마음속으로 이 아이가 내 동생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애틋한 눈길로 한참 동안 창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빠, 어떻게 미숙이가 내 누나가 되는 거야?" 창주가 따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그건 말야...." 김원철은 창주의 물음에 당황하며 더듬 거렸다. "그건 미숙이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 그렇지." 그는 궁색한 대답을 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가 느다랗 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미숙이 누나 아빠는 누구야?" 창주가 미숙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다시 물었다. 김원철이 갑작스럽게 브레이크를 밟았고, 자동차는 찌익 소리를 내며 미끄러 지다가 가로수 앞에 멈췄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자동차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우리 아빤 병원에 계셔." 자동차가 다시 달리자 미숙이 여전히 애틋한 눈길로 창주를 보며 낮은 목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미숙이 누나 아빠도 우리 아빠처럼 의사 선생님이셔?" 미숙은 가볍게 고개 를 끄 덕였다. 창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날 미숙이와 창주와의 첫 대면은 그렇듯 당황스럽고 어색 하게 이루어졌다. 김원철은 미숙에게 상처를 안겨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는 창주 가 미 숙이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다만 미숙이가 걱정될 뿐이었다. 그는 점심을 먹으면서도 두 아이의 표정을 살피느라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특 히 그 는 미숙이의 표정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미숙이는 자신의 언짢은 마음을 나타내지 않 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숙은 그러면서 얼핏 창주를 훔쳐보기도 하고, 창주를 향해 어색 하게 웃어 보이기도 하였다. "미숙이 누나 몇 학년이야?" "응, 육 학년." "내년에 중학교에 들어가 겠네?" "그래. 창주는 몇 학년이지?" "이 학년이야. 우리 형은 사 학년이고, 근데 누나 선 생님은 여자야 남자야?" "여선생님이셔. 처녀야." "우리 선생님은 남자야. 제수없게 우리 반 선생님 만 남 자라구." "남자 선생님이 어때서 그러니? 난 남자 선생님이 더 좋더라." "여자니까 그렇지. 난 남 자 선생님은 질색이야. 난 처녀 선생님이 좋아." 그러면서 창주는 본래의 개구쟁이다운 모 습으로 씨익 웃어 보였다. "쪼끄만 게 벌써부터 처녀 선생님을 좋아해?" 미숙이도 밝게 웃으면서 창주를 놀려댔다. "처녀 선생님한테서는 좋은 냄새가 나거든." "좋은 냄새? 그게 무슨 냄샌데?" " 꽃향기 냄새 같은 거, 엄마 냄새 같은 거... 난 그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좋단 말야. 누나는 안 그 래? 처 녀 선생님한테서는 꽃향기 냄새가 나는데, 남자 선생님한테서는 고린내가 나거든. 난 고리 타분한 그 냄새가 싫어." "나한테선 무슨 냄새가 나니?" 그러면서 미숙은 상반신을 창주 가까이 바 짝 들 이댔다. 그러자 창주는 코를 미숙이 머리와 얼굴에 대고 한참 동안 킁킁거렸다. "미숙이 누 나한테 서는 꽃냄새가 안 나는데?" 창주는 실망한 눈으로 미숙을 보면서 말했다. "아무 냄새도 안 난다 고?" "응. 마늘 냄새하고 빨랫비누 냄새가 조금 나는 것도 같은데...." 창주는 여전히 가느다 란 눈 빛이었다. "얘, 창주 너한테서는 냄새가 안 나는 줄 아니?" 마늘 냄새와 빨랫비누 냄새가 난다는 창주의 말에 미숙은 샐쭉해져서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가볍게 퉁겨댔다. "무슨 냄새?" "창주 너한테서는 아직도 젖냄새가 나는데 그래?" 미숙이가 웃으면서 놀려대자 창주는 눈을 부 라리고 입을 비쭉거려다. 그러나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미숙이와 창주는 이렇듯 처음에는 서로 서 먹서먹 하여 말도 하지 않았으나, 차츰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서로 웃고 장난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제 창 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숙을 누나라고 큰 소리로 불렀고 미숙이도 스스럼없이 창주를 대해 주었 다. 특히 미숙이의 입장에서는 창주가 분명히 자신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밖으 로 나 타내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동기간의 정을 품고 있음이 김원철의 눈에 잡혀왔다. 그제야 김 원철은 비로소 미숙이와 창주를 만나게 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 미숙이와 창주가 서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서먹서먹해 있을 때는 그냥 점심만 먹고 돌아갈 생각이었던 김원철 도 기분이 느긋해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두 아이들의 노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 었다. 미숙이와 창주가 한데 어울려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원철은 비로소 그들이 한 핏 줄의 정을 함께 느끼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두 아이들 중 누구도 먼저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창주는 누나 누나, 하면서 정답게 미숙을 따랐고, 미숙이 또한 마음속에 오누이의 정의 간직하고 있었는지라 은연중에 누나 노릇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김원철은 두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 모래밭으로 나갔다. 미숙이와 창주는 김원철은 제쳐두고 저희들끼리 재미있게 뛰며 놀았 다. 둘은 달리기고 하고 조개껍질을 줍기도 하면서 다정하게 뛰며 놀았다. 김원철은 두 아 이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에 너무 좋아서 입가에 담뿍 웃음을 흘렸다. 그는 비로소 핏줄의 끈끈하 고도 뜨거움에 감동하였다. 그가 보기에 미숙이와 창주는 한 핏줄의 오누이가 분명한 것 이었다. 김원철은 해넘이 무렵이 되어서야 두 아이들을 차에 싣고 시내로 들어갔다. 미숙이를 집 에까지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미숙이를 데리고 나올 때 경옥이가 저녁 미사에 늦지 않도록 일찍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었기 때문이다. "아빠, 누나랑 우리 집에 같이 가면 좋겠지?" 김원철이 해 운대의 해안통 도로를 빠져나가고 있을 때 창주가 말했다. "누나는 저녁때 성당에 가야 한단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야지." 김원철은 그렇게 말하면서 얼핏 뒤를 돌아보았다. 미숙이의 의향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엄마한테... 미사에... 혼자 가시라고 전화하겠어요" 미숙이가 미적거리는 말투로 대답하 였다. "그래도 괜찮겠니?" "미사에 빠지면 다음에 고해성사하면 되요. 보속도 무겁지 않 아요." 미숙이는 아빠가 사는 집에 가보고 싶었다. 창주한테서 그의 엄마가 시골에 가고 없다는 것 을 들 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용기가 난 것이다. 미숙은 기실 오래 전부터 아빠가 사는 집 에 가 보고 싶었다. 엄마로부터 아빠를 빼앗아간 여자(미숙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가 어떻게 생겼으 며, 아빠가 그 여자한테서 낳은 두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만나고 싶었다. 김원철은 해안 통 도 로를 빠져나와 공중전화 부스 앞에 차를 세웠다. "전화하렴." 김원철이 턱끝으로 공중전화 부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집에가서 하면 되잖아요. 아빠도 참." 김원철이 미숙이한테 전화를 하라 고 하자 창주가 말했다. "참 그렇구나. 집에 가서 해도 되겠구나." 그러면서 김원철은 다시 차를 움 직였다. 그는 미숙이를 집에 데리고 가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잘못하는 일인지 헤아리기가 어려 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미숙이가. 그의 집을 자유스럽게 마음놓고 출입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정매도 그것을 감내해야 할 터였다. 대행인 것은 지금 아내가 집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김원철은 거울을 통해서 미숙이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미 숙이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김원철은 미숙이가 어 떤 생 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어쩌면 미숙은 머리속으로 아빠가 사는 집을 미리 그려보 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머리 속에 그린 아빠의 집에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김원철은 미숙의 마음을 어림하면서, 미숙이가 창주와 어울리고 그의 아 파트까 지 따라갔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게 될 경옥이의 표정도 가늠해 보았다. 어쩌면 경옥이는 그 런 미 숙이를 나무람할 지도 몰랐다. 아파트에 돌아오자 파출부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줌 마, 우 리 누나야." 창주는 아파트에 들어서자 파출부 아주머니한테 미숙이부터 자랑하였다. 창주는 그러 고 나서 미숙의 손을 잡고 전화가 놓인 탁자 옆으로 끌고 갔다. 창주를 만나서 함께 어울리 고 더 구나 아빠가 사는 아파트를 구경하고 밤늦게야 돌아온 미숙은 예상했던 대로 엄마한테서 심 한 꾸 중을 들었다. 아빠네 아파트에서 엄마와 통화를 하고, 성당에 갈 수 없다고 말했을 때부터 엄마는 화를 내고 있었다. 엄마는 전화로 미숙이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다그치듯 물었었다. 창주가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듣고 있는데 아빠네 아파트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는 큰 소리로 아빠를 바꾸라고 성화였지만, 미숙은 아빠를 바꿀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 리고 말았다. 미숙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아빠네 아파트에서 나왔다. 저녁을 먹고 나서 곧 일어섰 지만 창주가 한사코 붙잡는 바람에 그만 늦어지고 만 것이었다. 창주는 미숙이가 아파트를 나올 때 몇 번이고 다음에 또 놀러오라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미숙은 아빠의 차를 타고 집에 돌 아왔다. 그리고 엄마한테 꾸중을 듣게 될 것이 무서워서 아빠에게 엄마를 만나서 이야기를 좀 잘 해달라 는 부탁까지 했다. 엄마는 아빠로부터 미숙이가 아빠의 아파트에서 저녁을 먹었다는 말을 듣고 새파랗게 놀란 표정을 하였다. 그러나 아빠 앞에서 미숙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미숙은 아빠 가 돌 아간 후에야 무서운 꾸중을 들었다. 여지껏 엄마한테서 그토록 무서운 지청구는 들어본 일 이 없 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 네가 석이 있는 아이냐? 그래 어쩌자고 아빠네 아파 트까지 따라갔어?" "창주도 그렇고 아빠도 같이 아파트에 가지고 하시기에...." "그렇다고 좋아라 하 고 쫄 래쫄래 따라가?" "창주 엄마는 시골에 가고 없었어요" "걔네들 엄마가 집에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야." 엄마의 꾸중을 들은 미숙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엄마의 꾸중에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 었다. 괜히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였다. 소리내어 엉엉 울어버렸으면 싶었다. 아빠의 아파 트에는 구석구석에 아빠의 냄새가 흥건히 고여 있는 듯싶었다. 아파트에 아빠의 냄새가 가득했다. 미숙은 창주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은 너무 초라하여 주눅이 들었다. 미숙은 아빠의 자동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마음속으로 하염없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빨을 웅등 물고 참아 냈었다. 그런데 엄마한테 꾸중을 뜯자 다시 눈물이 솟구치려고 하는 것이다. "엄마...." 미숙 은 끝 내 더 참지 못하고 엄마를 붙들고는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좀처럼 울음 을 그 치지 않았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이었다. 비로소 미숙은 아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을 떨며 서럽게 울었다. 경옥은 미숙이를 심하게 나무람하고 나서, 그녀 자신 도 가 슴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경옥은 김원철이 무엇 때문에 미숙이를 그의 아들 과 어 울리게 하고, 아파트에까지 데리고 갔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 가 보 기에 김원철의 태도는 최근 들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쨌 든 경 옥은 미숙이의 존재가 김원철의 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크나큰 두 려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미숙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킬 때도 김원철의 자식으로 호적 에 입적하지 않고, 자신의 성씨를 붙여 사생아의 굴레를 씌우지 않았던가. 경옥은 김원철의 가정 이 불행하게 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불행은 자신과 미숙이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 다. 가 정의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 가정이 비 록 원 수의 가정이라 할지라도 결코 비극적으로 깨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더욱이 경옥은 김원철 의 가 정이 깨어진다고 해서 그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김원철 의 가정이 행복을 유지하는 것만이 미숙의 장래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들 모녀는 다 같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겨울날 파도처럼 몸부림치듯 뒤척였다. 미숙은 처음 본 창주 의 모습이며, 아빠 냄새로 가득한 아파트의 행복이 넘치는 분위기가 머리 속에서 부스럭거 려 잠 을 이루지 못하였다. 화려하고 깨끗한 아빠네 아파트에 비해 미숙이 모녀가 살고 있는 단칸 셋방 은 너무 초라하고 쓸쓸했다. 미숙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은 분명 절름발이 가정이었다. 이무 리 냄 새를 맡아보려고 해도 아버지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미숙은 비로소 외로움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 경옥이가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은 김원철이 최근에 눈에 띄게 변 한 이 유가 무엇이며, 또 미숙이를 그의 아이와 어울리게 하고 아파트에까지 데리고 갔을까 하는 것 때 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도 분명한 해답이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도 그 녀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행여 미숙이의 존재를 김원철의 부인이 알게 되지 나 않을까 두렵기까지 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김원철의 가정은 불행하게 깨어질 것이고, 그 여파는 경옥이 자신한테까지 미치게 될 게 뻔했다. "미숙이 안 자니?" 경옥은 미숙이가 잠 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것을 알고 나지막하게,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미숙은 엄마 쪽으로 돌아누웠다. "엄마는 왜 안 주무세요? 내가 아빠네 아파트에 또 찾아갈까 봐 걱정이 돼서 그래요? 그런 건 걱정 말아요. 앞으로는 아빠네 아파트에 가지 않을 테니까요." 미숙이가 경옥의 젖무덤을 만지며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미숙이의 손은 뿌리쳤 을 터 이지만 경옥은 오히려 딸을 힘껏 끌어안았다. 김원철이 미숙을 집에 데려다주고 아파트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아내 정매한테 서 시 외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에 울려온 아내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여보, 여기 하 동 집 이에요. 당신 오늘 일찍 들어오셨어요? 전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군 요. 전 당신이 옆에 없으면 잠을 못 이루는 버릇이 있잖아요. 오늘 늦게라도 돌아가려고 했 는데, 내일이 휴일이라고 어머니께서 한사코 붙잡지 않겠어요. 여보 옆에서 원주가 아빠한테 할말 이 있 다고 바꾸라는데요?" 아내는 여보라는 말을 감칠맛 있게 말아올리며 전화를 바꿨다. "아빠, 엄마 가 나 때문에 울었어." 원주는 맥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김원철은 무엇 때문에 엄마가 울었느냐고 원주에게 묻지 않았다. 그는 잠자코 수화기만을 든 채 원주의 다음 말을 기다리 고 있 었다. "엄마가 왜 나 때문에 울었는지 모르지?" 원주가 다시 물었으나 김원철은 여전히 대꾸를 하지 않았다. "원주가 괜한 말을 하고 있는 거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그럼 여보, 내일 갈 게요." 원주 대신 아내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몇 시 차를 타게 될지, 차 시간을 알려주 면 터 미널에 나갈 테니까 병원이나 집으로 전화해 줘. 그리고 집 걱정은 말고 며칠 더 쉬었다 와 도 괜 찮으니 너무 서둘지 마." 김원철은 홀맺힌 생각과는 달리 부드럽고도 친절하게 말했다. " 아녜요. 한 시간이라도 빨리 당신 곁에 가 있고 싶어요. 당신이 옆에 없으면 저는 반쪽 사람이잖아 요. 당 신은 그렇지 않는가 보죠? 당신 내 맘 잘 알지요?" "그래. 알았어. 당신 맘 잘 알아. 그리고 나도 당신과 같은 마음이야." 김원철은 그렇게 말하고 송수화기를 놓았다. 어쩌면 아내에게 한 말 은 그 의 진심인지도 몰랐다. 그는 지금껏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아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의 감정에 의심을 품어본 일도 없었다. 물론 그는 아내뿐 만 아 니라 이 세상의 어떤 여자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일이 없었다. 사랑은 말고 표현할 수 없 는 감정의 색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원철은 아내로부터 장거리 전화를 받고 나서 한동안 우두커니 소파에 상반신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텔레비전 수상기 옆 진열장에 놓인 그의 가족 사진을 집어들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그것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가족 사진 을 들여다보면서 김원철은 순간, 그의 삶에서 지금의 가정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할까 하고 생각 해 보았다. 그런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어려서부터 가정의 행복,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 고 살아왔지 않은가. 그 때문에 가정의 행복과 부모의 사랑의 고귀함을 누구보다 더 절실하 게 생 각해 왔지 않은가. 그는 어려서 그 나이 또래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들이하는 모습 을 볼 때마다 키가 줄어드는 거만 같은 슬픔을 느꼈으며, 고아원이나 학교 또는 회사의 건물이 아닌 울타리가 둘러 있고 작은 대문이 있는 가정집을 볼 때마다 얼마나 그 집이 부러웠었는 지 몰 랐다. 그것은 그가 늘 마음속으로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가정을 간절하게 동경했기 때문이 었다. 그리고 성장하여 세상을 알게 되고부터는 행복한 가정을 꾸며 나가자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하 다는 것을 세속적인 관점에서 나름대로 생각하게 되었다. 경옥을 외면하고 지금의 아내를 택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더 행복한 가정을 갖기 위한 생각에서였는지도 몰랐다. 김원철은 사진틀 속에 서 밝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들여다보았다. 꽃처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모습 이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꽃은 없으리라 싶었다. 그는 그 사진의 얼굴들을 하 나하나 들여다보면서 지상의 작은 천국을 생각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천국이 깨어지지 않도록 소중하게 가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미 남자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한 가정에서 행복 을 누리고 또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이 세상 어디에서도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없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김원철은 사진 속의 작은 천국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어떤 경우에라도 이 평화로 운 천국을 깨뜨리지는 말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김원철은 사진 속의 원주 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옛날 그대로의 원주로 보였다. 오히려 그 원주가 그들의 작은 천국 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김원철은 아주 마음 편하게 잠을 이룰 수가 있었 다. 가족 사진 한 장이 그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난 김 원철은 파출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을 하였다. 그리고 하동 처가에 전화를 걸어 아내가 몇 시에 차를 탔는지 확인한 다음, 도착할 시간에 맞춰 차를 몰고 터미널로 마중을 나갔 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동에서 온 버스가 두 대나 도착 했는데 도 아내와 원주는 그 버스에 타지 않았다. 김원철은 터미널에서 아내와 원주가 보이질 않자 초조 한 마음이 앞섰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에서는 행복의 상징이며 축도인 가족 사진 이 찢 겨지는 장면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는 불안한 생각에 몇 번이고 자리를 고쳐앉으면서 버스 가 터 미널로 들어올 때마다 눈을 크게 떴다. 아내와 원주가 도착한 것은 김원철이 터미널에 나와 서 기 다린지 한 시간 반이나 지나서였다. 그는 아내와 원주가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발견한 순간, 자기 도 모르게 상반신을 들썩거리며 손을 흔들고 탄성을 질렀다. 버스에서 내린 원주는 아버지 가 마 중 나온 것을 알고 소리치며 뛰어왔다. "아빠, 창주는 안 나왔어요?" 원주가 김원철의 팔에 매달 렸다. 김원철도 원주를 안아올리며 반가워하였다. 겨우 이틀 동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마치 몇 달, 아니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처럼 감정이 새로웠다. 김원철은 아내가 옆에 와 있 는 것 도 모르고 한참 동안 원주를 안아 올린 채 얼굴을 비벼댔다. "질투 나서 차마 못 보겠군요" 아내 가 그런 부자를 싫지 않게 흘겨보며 말해서야 김원철은 천천히 원주를 땅에 내려놓고 여전 히 해 맑은 표정으로 정매를 보았다. "원주는 아빠가 그렇게도 좋니?" 정매가 원주에게 물었다. " 그러엄. 나는 이 세상에서 아빠가 젤 좋아요. 참 아빠, 엄마가 왜 나 때문에 우신 줄 알아? 바로 이 말 때 문이었어. 이 세상에서 아빠가 젤 좋다고 했더니 글쎄, 그 말을 듣고 엄마가 울었다니까요. 엄만 어린애 같아요. 아마 엄만 내 말에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죠?" 원주에게서 그 말을 들은 김 원철은 아내가 눈물을 흘린 의미를 얼핏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의미는 김원철의 가슴에 화살처럼 섬뜩하게 꽂혀왔다. 김원철에게도 그 말은 어쩌지 씁쓸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김 원철은 얼핏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겉으로는 밝아 보이는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머물러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창주는 집에 있나요?" 정매가 남편의 자동차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집에 있겠지. 참 어제는 창주에게 누이를 소개시켜 주었더니 금방 친해지더구만." 김원철 은 창 주가 제 엄마에게 말하기 전에 미리 미숙이 이야기를 털어놓아 오해가 없도록 하고 싶었다. 아니, 미숙이를 아직은 비밀로 하고 싶었다. "누이라뇨?" 정매가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관심 있게 물었 다. "응, 내가 언젠가 봉사 진료 때 알게 된 여자아이가 있는데, 마침 나한테 찾아왔기에 창주한 테 소개를 시켜주고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어. 저녁에 아파트에 데리고 와서 저녁을 먹여 보냈거 든." 김원철은 능숙하게 변명을 하고 나자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미 숙이에 게 용서를 빌었다. "그랬군요. 당신한테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게 놀라워요." 정매는 갑자기 가라앉 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동에 가서 지훈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온 정매는 한동안 기분이 개 운치가 않았다. 지훈 어머니의 태도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를 만날 때 원 주를 데리고 갔다. 지훈 어머니는 원주를 부둥켜안고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자 원주는 질겁을 하여 버둥거렸다. 정매도 억지로 원주를 지훈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다시피 하여 떼어놓았다. 지훈 어머니는 원주를 덥석 끌어안고, "이노마야, 나는 우째 이 핼미가 보고 잪지도 안 했나." 하면서 소리를 내어 서럽게 우는 바람에 정매는 원주를 데리고 당장 지훈 어머니가 세들어 살고 있 는 방 에서 뛰쳐나가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지훈 어머니가 눈물을 거두고 정색을 하더니, 원주한테 밖에 나가 놀라고 이른 후, 긴히 할말이 있다면서 정매를 붙잡아 앉혔다. 그런데 지훈 어머니가 정매에 게 한 긴한 말이라는 것이 도무지 아리송한 내용이었다. 지훈 어머니는, "그라이 원주 저 노마가 똑 우리 지훈이 닮었제? 그라이 핏줄은 못 속이는 기라. 원주가 우리 지훈이 자슥이라 카는 것이 맞제? 우째 대답이 없노? 원주다 지훈이 핏줄이 틀림없제." 하고 똑같은 말을 거듭 묻곤 했 다. "그것은 새삼스럽게 왜 묻습니까?" 정매가 이상한 눈으로 지훈 어머니의 표정을 관찰하며 물었 다. 그러자 지훈 어머니는 정매 옆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순식간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리고 여전히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대답을 해주이소. 원주가 지훈이 자슥이 분명한 그제? 그렇 제? 와 대답을 안 하노? 내 그 말 듣고 나서 나무 욕심 안 부리고 눈 감을라고 안 그러나." 그러면 서 지 훈 어머니는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꼈다. "그 말은 옛날에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다시 한번만 그 소리를 듣고 싶은 기라. 그 소리를 이 가슴에 묻고 죽고 싶은 기라." 지훈 어머니는 지 난날처 럼 다시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박문호가 보내온 편지에 의하면 지훈 어머니는 원주를 찾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려고 돈을 모으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주머니, 재판을 하시겠다면 서요?" 정매는 끝내 참지 못하고 그렇게 묻고야 말았다. "문호 자슥이 그런 거짓말을 했고마? 그기 아이 라, 재판을 걸어 갖고 핏줄을 찾아온다 캐도 우리 형편에 원주를 잘 가르치지 몬할 기라는 말을 했고마." 지훈 어머니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정매도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가 있 었다. "그 말만 해준다 카믄 재판이고 뭐고 다 포기하겠고마. 원주가 지훈이 자식이라는 말 한마 디만 내 앞에서 해준다 카믄... 그라이 어서 한마디만 해주라 카이." 지훈 어머니는 정매의 손을 잡아흔들며 다시 간청하였다. "그래요. 원주는 지훈 씨의 핏줄이에요." 정매는 지훈 어머니 의 성화 에 못 이겨 다시 그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녀는 그 같은 말을 다시 듣고 싶어 하는 지훈 어머니가 이상했다. 하지만 정매로서는 지훈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그 말을 다시 듣고 싶어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부탁이니 재판을 할 생각은 마세요." 정매는 간청하듯이 말했 다. 그 러곤 훗날 원주가 성인이 되면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고, 생부의 가계를 이어가도록 하겠 다고까 지 말했다. 그러자 지훈 어머니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와 헤어져 친정으로 가던 중에 아무래도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하여 박문호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박문호는 마침 일요일이라 집에 있다면서 만날 약속을 했다. 두 사람은 찻집에 마주 앉았 다. 그 자리에서 정매의 말을 들은 박문호는 여간 난처해 하는 게 아니었다. "어쩌자고 구 말을 또 했능교? 그 말을 다시 듣고 싶어한 것은 딴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기라요." 박문호는 은근히 정매를 책망하였다. "딴생각이라뇨?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정매가 다급하게 물었으나 박 문호는 시원스레 대답을 하지 않고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미적거렸다. "지훈 어머니께서 저한테 재판은 하지 않겠다고 하시던데요. 세상에 재판이라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 노인네가 세상 살아 갈 기 력을 잃고 곧 세상을 뜰 것만 같기에 용기를 내서 살아가라고 그런 말을 해줬더니 세상에 재판이 라니...." 정매는 흥분하여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것을 와 모르겠능교. 지가 정매 씨의 고마운 마음씨 다 알고 있다 아입니꺼. 지하에서 지훈이도 고맙게 생각할 낍 니더." "그런데 지훈 어머니께서 딴생각을 하고 계시다니 무슨 말이세요.?" "분명 그 노인네가 재 판을 안 하겠다고 하십디꺼?" "그랬다니까요. 옛날에 내가 지훈 어머니께 했던 우리 원주에 대한 이야기 를 다시 한번만 해주면 재판 같은 건 생각지도 않겠다고 하시던데요." "그래서 원주 이야기 를 다 시 한번만 해주면 재판 같은 건 생각지도 않겠다고 사정을 하길래...." "저런 ... 지훈이 어머 니 생 각은 엉뚱한 기라예." 박문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매를 보며 혀끝을 찼다. "무슨 말씀이 레요?" 박문호의 심심치 않는 표정을 읽은 정매가 다급하게 물었다. 정매의 다그치는 듯한 물음 에 박 문호는 오랫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미적거리고만 있다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매를 보면서, "끝내 재판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더." 하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섞어 말했다. 정매는 박문 호의 그 말을 듣고 다시 놀랐다. 박문호는 그러면서 그녀에게 그 동안 지훈 어머니가 소송 을 제 기하기 위해 재판 미용을 마련하려고 떡장사를 해온 경위며, 그와 함께 진주로 변호사를 찾아갔 던 일들을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정매는 너무 놀라 정신이 혼몽해졌다. 박문호는 진주에서 변호 사 사무장을 찾아왔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가 자기 앞에서는 재 판 같 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겠다고 말해 놓고 엉뚱한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박문호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 대해 실망 아닌 분노를 느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문호 씨께서 저를 좀 도 와주셔 요. 만약 천에 하나라도 지훈 어머니께서 소송을 제기한다면 저는 어떻게 해요? 우리 원주 는 어 떻게 하고요? 제발 문호 씨가 좀 도와 주셔요, 네?" 정매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녀가 박 문호에 게 말한 것처럼, 만약 지훈 어머니가 원주를 찾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다면 이만저만한 문제 가 아 닌 것이었다. 그녀 자신은 물론 가정의 파괴를 가져오게 될 것이 뻔했다. "문호씨, 제발 저 좀 도 와주세요." 정매는 매달리는 목소리로 간청하였다. 그러나 박문호는 여전히 난처한 얼굴로 정매의 시선을 피했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실은 지가 소송을 못하게 할라고 일부러 변호사를 찾아갔었구만요. 마침 변호사가 동료 친척이라서…변호사한테 지훈 어머님이 찾 아오거 들랑 소송을 해도 말짱 헛일이라는 거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아입니꺼."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변호사가 그렇게 설득을 했나요?" 정매는 다급한 목소리로 거듭 물었다. "지훈 어 머니께 서는 마 세상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원주를 찾고야 말겠다고 난린 기라예." 박문 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지훈 어머니는 재판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원주가 지훈 의 핏줄이라는 말을 한 번만 더 해준다면 재판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겠다는 말은 모두 계략이 었단 말인가. "정매 씨께서 다시 한번 지훈 어머니를 찾아가서 사정을 해보이소. 그 수밖에 는 없 심더. 그 노친네 이제는 내 말로 안 들을라 캅니다요. 마, 요새는 그 노인네 친구들까지 열 을 올 려가면서 재판을 하라고 돈꺼정 대주면서 들쑤셔댄다고 헙디더." 정매는 박문호의 말에 절망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지훈 어머니를 찾아가기도 싫었거니와, 설령 찾아가서 사정을 한다 해도 그녀 앞에서는 여전히 재판 같은 것을 생각하지도 않겠노라고 똑같은 말만을 되풀이할 게 뻔했 다. "다시는 지훈 씨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습니다. 문호 씨께서 좀 관심을 갖고 지켜보시고, 무슨 일이 있거든 제게 연락을 주시면 고맙겠어요" 정매는 박문호에게도 더 이상 매달리고 싶지 가 않 았다. 그래서 그 말만을 남기고 그와 헤어져 친정으로 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부산에 돌아 온 정 매는 지훈 어머니의 생각으로 한동안 머리가 뒤숭숭하였다. 그녀는 그 일을 잊어버리기로 하였다. 그렇다고 지훈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박문호가 연락을 해주기로 했기 때문에 박 문호와 의 그 약속을 믿고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훈 어머니의 일을 생각하면 자신 도 모르게 가슴이 담담해지고 괜히 불안해졌다. 그 때문에 되도록이면 머리 속에서 그 일을 지워 버리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지훈 어머니의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 그녀는 남편에게 잘해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살림에 신경을 쓰는 것 외에도, 시간이 나는 대로 아파트 여자들하고도 열심 히 어울렸다. 정매는 또 가능한 한 아이들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하였다. 아이들과 대화 도 많이 하려고 하였다. 남편의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가족들과 함께 오붓하게 외식을 즐기 는 횟 수도 예전보다 훨씬 잦았다. 낡은 가구를 치우고 새 가구를 들여왔고, 방마다 밝은 색깔로 도배를 새로 하였으며, 응접실과 침실의 커튼도 바꾸었다. 이렇듯 시간에 쫓기듯 바쁜 일상에 몰 두하게 되자 지훈 어머니에 대한 걱정도 차츰 잊혀지는 것 같았다. 박문호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녀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마음에 담고 살았다. 한동안 박문호에게서 소식이 없자 지훈 어머니가 생각을 고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보게 되었다. 그날도 정매는 봄날의 화사한 햇살과도 같은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열어젖히니 유리알처럼 투명한 바다가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빛을 쏘아대며 한눈에 들어왔다. 눈부신 햇살과 투명한 바다를 바라보니, 그녀의 마음속도 맑아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상큼했다. "여보, 오늘 밤에 우리 외식해요. 갑자기 생선회 가 먹고 싶네요. 원주 창주는 어떠니? 너희들도 생선회 먹고 싶지?" 아침 식탁에서 정매가 햇살 처럼 화사한 얼굴로 남편을 보며 말했다. 김원철은 요즘 아내가 지나치리만큼 그에게 친절 을 보 이고 애교를 떠는 것 같아 조금은 부담스럽게 생각하던 터였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그럼 태도를 모른 척하고 받아주었다. "어때요? 오늘 저녁에 외식하는 거죠?" 정매가 눈꼬리에 아침 햇 살처럼 화사한 웃음을 말아올리며 다시 물었다. "그렇게 합시다. 오후에 병원으로 전화를 해요." 김 원철은 아내의 제의를 순순히 받아들었다. 그는 아미 가정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되도록 아내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심한 바 있었다.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전화할게요." 정매는 그렇 게 말 하고, 그날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관리실까지 내려가 남편이 차에 타는 모습을 지 켜보기 까지 하였다. 예전에는 이렇게 남편이 차를 타고 출근하는 것까지 지켜보면서 손을 흔들어 준 일 은 없었다. 그날 오후 정매는 아침 식탁에서 약속했던 대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원주가 학교에 서 4시가 넘어서야 돌아왔기 때문에 거의 5시가 되어 전화를 했다. 병원에 김원철은 없었다. "선생님은 삼십 분 전쯤에 따님하고 같이 나가셨는데예. 오늘은 못 돌아오실 거라고 말씀 하시고 나가셨어예." 간호사 아가씨의 말에 정매는, "거기 김원철 박사 방 아닙니까?" 하고 다시 확인을 했다. "맞는데예." "그럼 우리 그이가 누구하고 나갔다고 했어요?" 정매는 목소리를 날카롭 게 세 워 따지듯이 다시 물었다. "삼십 분 전에 따님이 오셔서 함께 나가셨어예." "딸이라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모님, 정말입니더. 선생님께서는 미숙이하고 함께 나가셨습니더." " 미숙이 라고요? 미숙이가 누군데요?" 재우쳐 묻자 송수화기가 뚝 끊겨버렸다. 정매의 따지듯 묻는 소리 에 간호사 아가씨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챈 것이었다. 정매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다 시 전 화번호를 눌렀다. 그러다 3자를 누른다는 게 6자를 누르고 말았다. 그녀는 세 번째 만에야 제대로 병원을 전화번호를 누를 수 있었다. "미숙이가 누구죠? 그애가 분명 우리 딸이라고 했어요? 누가 그랬나요?" 정매는 삐이 하는 신호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떨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간호사가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상대편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제야 그녀는 목소리를 가라앉힌 다음, "저어.... 우리 김 박사께서 분명히 딸이라고 했어 요?" 하고 목소리의 떨림을 한껏 가라앉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송수화기 저쪽 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정매는 몇 번이고 점점 격한 목소리로 여보세요,를 반복하다가 거칠게 송수 화기를 놓아버렸다. 정매는 몸에 불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냉수를 거푸 들이켰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 간호사 아가씨를 만나서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다. 남편이 데리고 나갔다는 미숙이라는 아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정매는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계 속 서 성거렸다. 맞아, 그 아이야. 잠시 후 정매는 자신도 모르게 손뼉까지 치며 소리쳤다. 그녀가 원주 를 데리고 하동에 갔을 때, 집에 데리고 와서 저녁을 먹여 보냈다는, 봉사 진료를 통해 알 게 된 불쌍한 아이, 그 아이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래, 그 아이와 잠시 나갔을 거야. 그제야 그녀는 후루루 한숨을 토해 내고 앉았다. 그런데 남편한테서는 좀처럼 연락이 없었다. 아이들과 함 께 외 출 준비를 끝내고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까지 집에서 기다렸으나 남편한테서는 좀처럼 전화 가 걸 려오지 않았다. "아빤 왜 전화가 없지? 엄마 병원에 다시 전화해 봐요." "엄마 배고파." 두 아이들 이 보채기 시작해서야 정매는 다시 한번 더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남편은 자리에 없었 다. 정매는 배신당한 마음이 뿌질뿌질 뻗질러오르기 시작하였다. 가족들과 외식을 하기로 약속한 그날 오후, 김원철은 병원으로 찾아온 미숙이한테 이끌려 성당으로 갔다. 그날은 미숙이가 성당에 서 영세를 받는 말로 며칠 전부터 김원철이 참석해 주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미숙이가 영세를 받는 모습이 너무 엄숙하고도 아름다워, 하느님을 믿지 않는 김원철의 가슴도 촉촉하게 젖어왔다. 어린 미숙이가 갑자기 어른이 된 것 처럼 보였다. 물론 김원철도 어려서 고아 원에 있을 때 억지로 교회에 끌여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의에 의해서 교홰에 가본 일 없었다.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을 부모에게 떼어놓은 하느님에 대해서 원망하 는 마음에 품고 있었다. 아마 몇 번인가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기도 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내 자기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기도 시간 이나 찬송가를 부를 때면 마음속으로 엉뚱한 노래를 흥얼거리기 일쑤였다. 흰빛의 한복을 입고 촛불을 든 미속이의 모습의 작은 천사처럼 아름답고 순결해 보였다. 김원철은 그런 미숙에 게 큰 마리아 석고상을 선물로 사주었다. 무엇을 사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미숙이가 그것 을 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식구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기분이 어떠냐?" 저녁을 먹으면서 김원철 이 미숙에게 소감을 물었다. "황홀했어요. 하느님의 손길이 제 마음에 닿는 기분이었다구요. 그리 고 아빠가 와주셔서 무엇보다도 기뻐요.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참 아빠, 저 말이 예요. 오늘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저...나중에 크면 말예요, 수녀가 되고 싶은데, 아 빠 엄 마께서 승낙을 해주셨으면 해요. 오늘 전 신부님의 손이 제 머리에 닿는 순간 그것을 느 꼈어요. 그리고 아빠 엄마 허락도 없이 하느님께 그것을 약속해 버렸어요." 미 속의 말에 김원철 보다는 경옥이가 더 놀라는 얼굴이었다. 김원철과 경옥은 한동안 할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만을 마 주보았 을뿐이다. "그것은 말야, 지금 결정할 문제가 아냐, 나중에 천천히 결정해도 될 문제 아니 니?" 김 원철은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하느님과 약속을 해버렸다니까요. 하느님의 약속 은 취 소할 수가 없어요." "하느님께서 너를 필요로 하지 않으실지도 모르잖니? 아무나 수녀님이 되고 싶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 그건 훗날 생각하기도 하자." 미숙이의 말에 경 옥이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아빠, 저한테는 계획이 있어요." 미숙이가 김원철을 쳐다보며 어른스러 운 태 도로 제법 진지하게 말하였다. "계획이라니? 무슨 계획 말이냐." "장차 제가 어떻게 살아가 야 할 지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다구요." 김원철은 식사를 끝내고 후식으로 과일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에 가져가다 말고 다소 경직된 눈길로, 사뭇 어른스러운 태도로 말하고 있는 미숙의 얼굴 을 찬 찬히 들여다 보았다. "장차 어떻게 살고 싶은데?" "저는 간호대학을 가겠어요." "수녀가 되 고 싶 다고 했잖았니?" "수녀가 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예요. 먼저 간호사 되겠어요. 그 다음에 수녀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뭐가 되고 싶은데?" "아주 중요한 거예요. 그게 제 인생의 마지막 큰 목표라고요." 미숙은 말을 하고 나서 침을 꼭깍 삼키며 아빠와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경옥은 이상하게도 미숙의 장래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는 것처럼, 창밖에 시선을 던져 진 채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언제나 그랬듯 경옥은 어쩌면 김원철과 헤어져 집에 들 어가서 미숙에게 자신의 의사를 말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옥은 늘 그랬다. 김원철의 앞에서 는 되 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집에 들아간 후에는 시시콜콜 미숙이의 말고 태도를 따지곤 하였던 것이다. "그래, 미숙이의 마지막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아빠도 궁 금하구 나." "수녀가 된 다음에는 시인이 되겠어요." 미숙은 크게 눈을 뜨고 아빠와 엄마를 쳐다보 며 분 명한 목소리를 또박또박 말했다. "시인? 시인이 되겠다고? 왜 하필이면 시인이 되려고 그 래?" 김 원철은 약간 실망했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물론 시인이 되는 일이 가장 어렵겠지요 처음엔 저도 아빠 처럼 의사가 되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도와줄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그렇지 만 지 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바뀌다니 왜?" "저는 시가 좋아요. 좋은 시를 써서 세상 사람들 마음 을 시처럼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요. 물론 의사가 되기보다 좋은 시인 되기가 더 어렵겠지 만요." 미숙의 말에 경옥이는 물론 김원철도 한동안 할말을 잃고 말았다. 의사보다 시인이 되기를 원한 다는 미숙의 말에 김원철의 가슴에 오랫도안 남아서 부스럭거렸다. 그것은 충격이랄 것도 없지만, 미숙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미숙이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 는 생 각을 하게 되었다. 미숙이는 이미 사람에게는 육신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였다. 미숙이 모녀를 차에 태우고 집에 데려다주는 동안 김원철은 마음은 바웟덩 이에 짓눌린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김원철은 어쩌면 미숙이는 후에 성장하여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꿈을 성취하면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만큼 미숙은 영리하고 의지 가 강한 아이였다. 비록 초등학교 6학년의 어린아이라고는 하지만, 생각이 옹골찬데가다 세상을 보는 눈이 사뭇 어른처럼 슬거운 데가 있었다. 그것이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불행한 처지에서도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김원철로서는 다소 마음이 놓이가도 했다. 그러나 김원철은 미숙이가 좀더 어린아이다웠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미 숙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고아원 시절의 김원철 자신을 반추해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 자신도 미숙이만한 나이에 세상을 보는 눈이 지나치게 성숙해서, 온통 세상이 어둡고 뒤죽박죽으로 만 보 였던 것이다. "수녀가 되는 것도 좋고 훌륭한 수인이 되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장차 미숙이가 훌륭한 딸, 훌륭한 아내, 훌륭한 어머니가 되는 것도 훌륭한 시인이 되는 것 못지않게 어렵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렴." 김원철은 차 안에서 미 숙에게 그렇게 당부하였다. 그는 물론 그의 말을 미숙이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는 그 런 말을 하고 나서 곧 후회하였다. 기실 그는 훌륭한 남편도 아버지도 되지 못하였기 때 문이다. 고아원에 있을 때 김원철의 소원은 행복한 가정을 갖는 것이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추운 겨울, 커튼 사이로 따뜻하게 느껴지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행복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때마다, 그는 훗날 자신이 어른이 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 고 얼 마나 다짐을 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는 미숙에게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 가 되 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다. 김원철은 미숙이 모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우울한 기분으로 아 파트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가족들과 저녁때 외식을 하기로 약속했던 생각이 떠올라 퍼 뜩 놀 랐다. 그러나 아내한테 굳이 궁색스러운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 늦으셨어요?" 아내 는 담 담하게 물었다.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해. 병원 친구들과 일이 있어서..." "병원에 찾아와서 같이 나갔다는 당신 딸이 누구예요? 혹시 당신 저 몰래 숨겨둔 딸이라도 있는 거 아녜요?" 아내 가 따 지듯 묻는 말에 김원철은 심장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딸? 딸이 라니?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야? 당신이 언제 딸을 낳아주었던가?" 김원철은 뜨끔한 기분을 느끼 면서도 시치미를 떼며 엉너리를 쳤다. 김원철의 말에 정매는 한동안 말없이 남편의 얼굴을 깊숙이 찔러 보았다. 무슨 비밀이라도 탐지해 내려는 듯 날카롭고도 탐색적인 눈초리였다. 두 사람 사이 에 잠 시 팽팽한 침묵과 긴장이 흘렀다. "당신이 아침에 약속하신 대로 전화를 했더니 간호사가 그럽디 다. 따님이 찾아와서 함께 나갔다고요. 도대체 같이 나갔다는 그 당신 딸이 누구예요?" 아 뿔사! 김원철은 그제야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허탈하게 웃으며, "나 는 또 뭐라고 내가 당신한테 말하지 않았던가? 당신이 왜 원주 데리고 하동에 갔을 때, 집에 데리 고 와 서 저녁을 먹여 보냈다는 아이 말야." 김원철은 얼버무리지 않고 그럴듯하게 변명을 하였 다. "당 신이 그 아이의 양부라도 된다는 말예요?" "양부? 그렇다고도 할 수가 있지. 결연양부 말 야." "쳇! 그래 그 아이 때문에 가족과의 약속을 어겼단 말예요?" 아내는 그날따라 그녀답지 않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러나 정매의 기분이 날카로워져 있는 것은 남편이 외식 약속을 어겼 기 때 문만은 아니었다. "그 아이한테 문제가 좀 있어서... 당신이 이해를 좀 해주구려." 그러면서 김원철 은 아내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당신 저를 속이시는군요." 정매는 이내 샐쭉하게 토라졌 다. 김원철은 달리 변명할 도리가 없었는지라 그냥 어색한 웃음을 가득 머금어 날렸다. " 속이다 니? 내가 왜 당신을 속여?" "당신 조금 전에는 병원 친구들과 일이 있어서 늦었다고 분명히 말했 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 아이 때문이었다니, 어디까지가 진실이요?" 아내의 다그침에 김원철 은 다시 한 번 아차 하고 후회하였다. "그것은 말야.. 그건.." 김원철은 말을 못하고 얼버무 리고만 있었다. 김원철은 아내한테 진심으로 사과를 하였다. 그는 미숙의 일로 아내와 다투고 싶지 가 않 았다. 미숙이가 자신의 핏줄이라는 것을 아직은 알리고 싶지가 않았기에 구차하게 변명을 하느니 보다 차라리 약속을 어기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음을 말하고, 그것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내의 기분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정매가 그날따라 남편에 대해서 홀맺힌 감정을 나타내 보인 것은 아파트의 같은 동에 사는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떠벌이 여자로부터 남편 에 대 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매의 바로 아래층에 사는 철영이 엄마의 이 야기로 는, 분명히 원주 아버지가 얼마 전에 백화점에서 어떤 젊은 여자와 함께 열 살 안팎의 계 집아이 한테 옷을 사주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말야, 나 혼자만 알고 그냥 넘어가려고 해쓴 데, 이런 것은 원주 엄마한테 말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벌써 한 달도 더 된 일이 니, 나 도 무던히 참은 셈이지. 내가 보기에는 느낌이 어쩐지 이상하더라고... 내가 그러더란 말은 말고 한 번 따져보라구요." 바로 몇 시간 전에 아래층 여자한테서 그 이야기르 들은 정매는 그렇 지 않 아도 남편이 외식을 시켜주기로 해놓고는 전화 한마디 없는 것에 잔뜩 심기가 흐려져 있던 판이 라 기분이 이만저만 뒤틀린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딸이라고 하는 아이에 대해서 자세히 좀 알 면 안 될까요? 왜 나한테는 그 아이를 소개시켜 주지 않는 거죠?" 정매가 다시 따지듯 물 었다.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탐색을 위한 시도였는지 몰랐다. "기회가 오면 소 개시켜 줄게. 당신이 알면 더 좋겠지." "어떤 아이예요?" "이름은 황미숙, 아빠는 없고 엄마하고 단둘이 변두리에 셋방을 얻어서 살고...또...그렇지, 그애 엄마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을 못 보는 맹인이 었는데, 개안 수술을 해서 빛을 찾았지." 김원철은 아내의 눈치를 흘깃흘깃 실피며 일부러 더듬거 리듯 말했다. "제가 그 아이를 한 번 만나보면 안 될까요?" "왜 안 돼? 오히려 좋겠지. 당신 이 그 아이를 만나보면 관심을 갖고 도와줄지도 모르니까 말야. 언제라도 만나게 해줄 테니 말만 해요." 김원철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 아이 엄마는 뭘 하죠?" "뭘 하다니." "어떻 게 생활을 해나가느냐 이 말예요." "아마... 맹인 도서관에 근무하는 것 같지? 왜 그 아이 엄마도 만나보려구?" 남편의 물음에 정매는 선뜻 대답을 못하였다. 김원철은 미숙와 경옥이를 만 나보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섬뜩 놀랐다. 그러나 그는 애서 태연한 척해 보였다. "언제 한 번 소개 를 시 켜주세요. 우리 집으로 초대를 해도 좋구요." 정매가 처음과는 달리 혼연스럽게 말해럽게 말 했다. 그녀는 남편이 그녀 자신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남편을 아래 층 여 자의 말만 듣고 잠시라도 오해했다는 게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글세, 미숙이라는 아이는 만나봐도 상관이 없겠지만 그에 엄마까지 만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우리 집에 초대를 하면 거절 하지는 않겠지만 말야. 내 생각에는 미숙이라는 아이는 언제 기회를 봐서 한 번 만나보도 록 했 으면 어떨가 하는데..." 김원철은 정매가 경옥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경옥에게 할 짓 이 아니었다. 또 경옥이 쪽에서도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내가 그 여자를 만나자 는 게 뭐 여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자는 건 아니고... 그냥 당신이 그 여자의 아이를 양부처럼 도와 주고 있다니까, 한 번 만나봐도 나쁠 것 없을 것 같다는 거예요. 집에 초청해도 오지 않겠 다면, 우리 가족과 그들 모녀가 같이 밖에서 저녁이나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그렇게 한 번 서둘 러봐요. 저도 좋은 일 좀 하면서 살고 싶어서 그래요." 정매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전혀 다 른 의 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 모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순수한 동기 에서였 다. 그녀는 그들 모녀를 직접 만나봄으로써 불행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고, 남편처럼 그들 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의 그 같은 생각은 조금은 야비하고 사치 스러운 감정일지 모르지만 동기 그 자체는 순수했다. "당신이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합시다. 그렇다고 당신 이 그 여자가 근무하는 맹인 도서관까지 찾아가 볼 것까지는 없고, 언제 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우리 집에 초대를 한다든지, 아니면 시내 음식점에서 저녁이나 같이 먹도록 합시다." 김원철 역시 아내의 제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그는 아내한테는 그렇게 말했지만, 경옥을 정매와 만나 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구나 그의 아파트로 초대할 의사는 더더욱 갖고 있지 않았 다. "언 제 저도 그 아이한테 옷이나 한 벌 사주었으면 해요. 그 아이 엄마한테는 제가 업었던 옷을 주어 도 좋겠구요." 정매는 병원 일이 바쁜 남편이 백화점에까지 가서 아이의 옷을 사주더라는 아래층 여자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물론 그 말에 다른 저의는 전혀 없었다. "그애한테 옷을? 더구 나 아이 엄마한테?" 김원철은 다소 놀라는 눈빛으로 아내를 마주보며 반문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혹시 아내가 김원철 자신과 경옥이 모녀와의 사이를 눈치채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묶임을 당했다. 다음날, 정매는 남편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외출을 서둘렸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 몰래 도와주고 있다는 여자아이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었다. 정매는 그 아이를 만나보 고 싶 어, 창주에에 물어서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미리 알아두었던 터였다. 정매는 미숙이라는 아이 를 학교에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었다. 집에서 나온 정매는 백화점에 들러 미숙이가 입을 수 있는 봄 스웨터를 사서 종이 가방에 넣었다. 처음 그녀는 미숙이의 체격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옷 사 는 것을 망설이가다, 초등학교 6학년짜리 계집아이가 입을 만한 사이즈를 골랐다. 그녀는 남 편 몰 래 미숙이를 만나러 가는 게 왠지 마음 한 구석에 꺼림직했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가 결코 비난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을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남편이 불쌍한 아이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남편한테 그런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평소에 보면 남편은 고아원 출 신답지 않게 이기적이고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남편이 자신 몰래 미숙이라는 아이를 도와준 것처럼, 그녀 자신도 남편 몰래 그 아이를 만나서 도움을 주고 싶었다. 미숙이는 쉽 게 만 날 수가 있었다. 첫눈에 본 미숙이는 호감이 가는 아이였다. 마침 점심 시간이라 정매는 미 숙이를 데리고 학교 앞에 있는 중국 음식점으로 들어가 탕수육 한 접시와 자장면 두 그릇을 시키고 마주 앉았다. 미숙은 묻는 말 외에는 말이 없았다. 미숙은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흘금흘금 정매 를 훔 쳐보곤 하였다. 미숙은 자신을 학교까지 찾아온 여자가 바로 아버지와 함께 사는 창주의 엄마라 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미숙은 어린 마음에도, 창주 엄마가 자기한테 무엇인가 따 지러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은근히 두려움이 앞섰다. 기실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어쩐지 창주 엄마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창주 엄마를 미운 눈으로 보지 않았 다. 엄 마에 비해 창주 엄마는 휠씬 아름답고 화려해 보였다. 벽돌색 입술이며 아침 안개처럼 흰 살결도 시선을 끌었다. 은근히 질투심이 일기는 하였으나 어찌된 것인지 밉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 다. 미 숙은 처음 본 창주 엄마와 자신의 엄마를 하나하나 비교해 보았다. 생김새며 옷치장 등등... 비교 하면 할수록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우리 집에도 한 번 왔었더라면? 그깨 내가 집에 없어서 너를 만나보지 못했구나. 내가 집에 있을 때 왔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창주가 너를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더구나." 미숙은 창주 엄마의 말만 조용히 듣고 있었다. 창주 엄마는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미숙은 마음속으로 창주 엄마가 미숙이와 아빠 관계를 알고 찾아와서 그것을 따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소 마음이 놓았다. "그래, 엄마하고 단둘이서만 산다면 서?" "예" 정매의 물음에 미숙은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아빠는 일찍 돌아가셨니?" 정매의 그 같 은 물음에 미숙은 한동안 대답을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미숙은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숙은 자기한테도 아빠가 있다고 자랑스럽게 외치고 싶었다. "아빠가 계셔 요." 미 숙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 어쩐지 목소 리가 저절로 줄어들고 말았다. "아빠가 계셔? 우리 창주 아빠 말로는 미숙이는 엄마하고 둘이서 만 산다고 하시던데?" "따로 사셔요." "따로 시신다고?" "아빤 우리가 싫으신가 보죠." "설 마... 그 러기야 하실라고..." 정매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미숙이네 가정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 을 짐 작하였다. 그녀는 미숙이한테 아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였다. "참, 엄마께선 뭘 하 시니? 엄마가 벌어서 생활을 하시겠네?" "엄마가 직장에 나가시기 전까지는 아빠가 도와 주셨어 요." "지금은 엄마께서 뭘 하시는데?" 정매의 물음에 미숙은 다시 대답을 못하고 한동안 미 적거렸 다. 미숙은 창주 엄마한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까발리고 싶지가 않았다. 자존심 때문 이 아니라 엄마를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창주 엄마 는 미 숙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라. 우리 창주가 너를 아주 좋아하더구나. 언제 기회가 있으면 미숙이 엄마도 한 번 뵙고 싶구나. 우리 집에 초대 를 하 면 엄마 모시고 와줄 수 있겠지?" "고맙습니다. 엄마한테 말씀 여쭤볼게요." "그렇게 하려무 나. 우 리 집이 싫다면 시내에서라도 만나서 저녁이나 함께 하든가..." 정매는 미숙이 모녀를 집에 초대 하고 싶다는 제의에 미숙이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듯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고 맙습니 다." 미숙이는 똑같은 감정으로 거의 기계처럼 말하였다. 정매는 그런 미숙이와 쉽게 가까 워지기 가 어렵다는 것을 가늠하였다. 그날 학교에서 창주 엄마를 만나고 집에 돌아온 미숙은 마음 이 착 잡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엄마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미숙은 엄마한테 창주 엄마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쩐지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해줄 것 같았 기 때 문이다. 그리고 창주 엄마한테서 선물로 받은 봄 스웨터도 아빠가 사주신 것이라고 거짓말 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일찍 집에 돌아와서 엄마가 퇴근하기를 기도라고 있던 미숙은 엄마한 테 창주 엄마를 만났던 일을 숨기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막상 엄마의 얼굴을 보자 그 일 을 숨 긴다는 게 마음 아팠다. 지금껏 미숙은 엄마한테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거짓 말 한 번 하기가 이렇게도 어렵다는 것을 미쳐 몰랐다. 미숙은 거짓말을 하여 마음속으로 고통을 당하 느니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꾸중을 듣는 편이 속 편할 것 같아, 엄 마한테 학교로 창주 엄마가 찾아왔던 이야기를 숨김없이 토해 내기로 하였다. "엄마... 저... 오늘 말야..." 마주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미숙은 지싯거리며 말을 꺼냈다. 지금껏 미숙은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 한테 밖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이야기해 주는 게 어느덧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왜 그 러니?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미숙이가 선뜻 이야기를 못하고 미적거리고만 있자 경옥이가 눈치를 채고 물었다. "나, 오늘 어떤 아줌마한테서 선물을 받았거든." "선물이라니? 누구한데서?" 미숙이 가 선물을 받는 일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실 미숙이는 성탄 절이나 자신의 생일날에도 지금껏 변변한 선물 한 번 받은 적이 없었다. 경옥은 그런 딸을 늘 안 쓰러워하였다. "아줌마가 학교로 나를 찾아와서 이걸 주었어요." 미숙은 책가방 속에 감추 어두었 던 스웨터를 꺼내 엄마한테 보였다. "그건 봄 스웨터가 아니냐? 비싼 것인데 이런 선물을 누가 학교까지 찾아와서 주었다는 게냐? 고맙게도... 어떤 아줌마라니?" 경옥은 다소 놀라는 표 정으로 미숙을 보며 물었다. "창주... 엄마가... " 미숙은 겨우 입을 열어 잦아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 답하였 다. "창주 엄마라니!" 경옥은 처음에 창주가 누구인지 몰라 되물었다. "아빠하고 같아... 사 는..." 미 숙은 여전히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하며 조심스럽게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미숙은 엄마한테, 낮에 아빠와 같이 사는 여자가 학교로 찾아와서 스웨털를 선물로 주고 갔다는 말을 하고 너서 다 소 겁 먹은 얼굴로 엄마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미숙은 아빠의 부인이라는 말 대신에 아빠와 함께 사는 여자라는 표현을 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으나, 그렇게라도 해 서 엄 마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오랫동안 반응이 없었 다. 그냥 게걸스럽게 밥숟갈을 떠넣고만 있었다. 엄마는 화가 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게걸 스럽게 음식을 먹거나, 아니면 아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자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미숙이도 그런 엄마의 버릇을 그대로 닮았다. "오늘 처음 만났니? 그래, 너한테 뭐라고 하시던? 뭣 때문에 너 한 테 선물을 사주었을까?" 겅옥이는 미숙에게 한껀번에 너무 많은 것을 물었다. 미숙은 그런 엄마 의 얼굴을 얼핏얼핏 훔쳐보면서 엄마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문에 미숙 은 처음 생각했던 대로 그 시실을 숨겨버릴 것을 괜히 털어놓아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 고 말 았구나 하고 후회하였다. "오늘 처음 만났어요. 그냥 뭐 엄마는 뭣하시냐, 아빠는 언제 돌 아가셨 느냐 하는 것을 물었어요." "뭐? 아빠가 언제 돌아가셨느냐고?" "그 여자는 아빠와 우리들 사이를 모르고 있었어요." "모르고 있었다고?" "그래요, 그 여자는 저를 그냥 아빠가 도와주는 불쌍 한 아 이라고만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여자가 뭐니? 그분은 네 아빠의 부인이야." 경옥은 부드럽 게, 그러나 우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미숙을 나무랐다. "하지만 어떻게 아빠 부인이라고 할 수 가 있겠어요? 아빠를 먼저 만난 건 엄마가 아냐? 부잣집 딸인 그 여자가 아빠를 가로채갔 다는 것 쯤은 저도 알아요." 갑자기 미숙이가 울먹이며 엄마한테 쏘아붙였다. "아니얘가? 가로채다 니? 그 런 말이 어디 있어?" 그러자 미숙은 사뭇 소리를 내어 울어버렸다. 경옥은 그런 미숙을 더 나무 라지도 달래지도 않고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하였다. "다른 말은 없었니?" 한참 후에 야 경 옥이가 부드럽게 물었다. "엄마와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겠다고 했어요." 미숙이가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며 여전히 울먹이며 말했다. "집으로 초대를?" 경옥은 너무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숟갈을 상 위에 놓아버렸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우리를 집에 초대한다던?" 경옥은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미숙에게 따지듯 물었다. 미숙은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멀뚱한 눈으로 엄마의 얼굴을 바라본 채 한동안 말을 못하였 다. "언 제 초대를 한다고 그랫어?" 경옥은 다시 다그쳐 물었다. "초대할 날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어 요. 그냥 집에 가서 엄마한테 여쭈어보겠다고만 대답했어요." 미숙은 엄마가 마치 화를 내고 있는 것만 같아서 풀이 죽었다. "다른 이야기는 없었고?" 잠시 후에 경옥은 한껏 목소리를 부 드럽게 가라앉히며 물었다. "중국집에서 탕수육이랑 자장면이랑 사주고는 그냥 갔어요. 엄마가 어 디에서 일을 하시느냐고 물었지만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 여자가 엄마한테 찾아갈까 봐서요. 엄마 는 그 여자 만나기 싫지? 나도 그 여자를 만나기가 싫어. 그 여자가 사준 이 스웨터도 입고 싶지 가 않 단 말야. 그리고 아담에 집에 초대한다 해도 나는 가지 않을 테야. 오늘도 그 여자와 같이 있으려 니까 괜히 울화기 치밀어오르잖아." 경옥은 미숙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녀는 미 숙에게 그 여자라고 하지 말라고 다시 타이르려다가 내버려두었다. 경옥은 미숙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미숙은 분명히 그 여자에 대해서 강한 적대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감정 은 사실 경옥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 여자에 대해서 되도록 관심을 갖지 않으려 고 노 력하였으나 그게 마음대로 잘되지가 않았다. "창주라고 했지? 그래, 그 창주 엄마 이쁘게 생 겼던? 미숙이 네가 보기에는 어땠니?" 경옥은 어린딸에게 그렇게 묻고 나서 이내 후회하였다. 어쩐지 미숙이에게 속을 보인 것만 같아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미숙이의 말을 듣고 싶었다. "엄마도 그렇게 좋은 옷에다 화장 진하게 하면 그 여자만큼 이쁠 거야. 아냐, 엄마 도 좋 은 옷을 입으면 그 여자보다 훨씬 더 이쁘겠지 뭐." 미숙은 애매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눈치를 주의 깊게 살폈다. 솔직히 미숙이가 보기에 창주 엄마는 세련되고 이뻤다. "그렇게 이뻐? 누구만큼이나 이쁜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탤런트들 중에서 누구만큼이나 이쁜데" 경옥은 그렇게 묻고 나서 자신을 향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내가 어린 미숙이한 테 무 슨 말을 듣고 싶어서 이러지, 하고 자문하였다. "하나도 이쁘지 않아. 엄마가 훨씬 이뻐, 정 말야." 어린 미숙이었지만 엄마가 그 여자의 생김새에 관심을 나타내보이자 얼른ㄴ 말을 돌려버 렸다. "거짓말" 경옥은 여전히 허탈하고도 씁쓸하게 웃음을 흘렸다. 미숙이가 영세를 받는 모습이 너무 엄숙하고도 아름다워, 하느님을 믿지 않는 김원철의 가슴도 촉촉하게 젖어왔다. 어린 미숙이가 갑자기 어른이 된 것 처럼 보였다. 물론 김원철도 어려서 고아 원에 있을 때 억지로 교회에 끌여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의에 의해서 교홰에 가본 일 없었다.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을 부모에게 떼어놓은 하느님에 대해서 원망하 는 마음에 품고 있었다. 아마 몇 번인가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기도 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내 자기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기도 시간 이나 찬송가를 부를 때면 마음속으로 엉뚱한 노래를 흥얼거리기 일쑤였다. 흰빛의 한복을 입고 촛불을 든 미속이의 모습의 작은 천사처럼 아름답고 순결해 보였다. 김원철은 그런 미숙에 게 큰 마리아 석고상을 선물로 사주었다. 무엇을 사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미숙이가 그것 을 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식구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기분이 어떠냐?" 저녁을 먹으면서 김원철 이 미숙에게 소감을 물었다. "황홀했어요. 하느님의 손길이 제 마음에 닿는 기분이었다구요. 그리 고 아빠가 와주셔서 무엇보다도 기뻐요.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참 아빠, 저 말이 예요. 오늘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저...나중에 크면 말예요, 수녀가 되고 싶은데, 아 빠 엄 마께서 승낙을 해주셨으면 해요. 오늘 전 신부님의 손이 제 머리에 닿는 순간 그것을 느 꼈어요. 그리고 아빠 엄마 허락도 없이 하느님께 그것을 약속해 버렸어요." 미 속의 말에 김원철 보다는 경옥이가 더 놀라는 얼굴이었다. 김원철과 경옥은 한동안 할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만을 마 주보았 을뿐이다. "그것은 말야, 지금 결정할 문제가 아냐, 나중에 천천히 결정해도 될 문제 아니 니?" 김 원철은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하느님과 약속을 해버렸다니까요. 하느님의 약속 은 취 소할 수가 없어요." "하느님께서 너를 필요로 하지 않으실지도 모르잖니? 아무나 수녀님이 되고 싶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 그건 훗날 생각하기도 하자." 미숙이의 말에 경 옥이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아빠, 저한테는 계획이 있어요." 미숙이가 김원철을 쳐다보며 어른스러 운 태 도로 제법 진지하게 말하였다. "계획이라니? 무슨 계획 말이냐." "장차 제가 어떻게 살아가 야 할 지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다구요." 김원철은 식사를 끝내고 후식으로 과일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에 가져가다 말고 다소 경직된 눈길로, 사뭇 어른스러운 태도로 말하고 있는 미숙의 얼굴 을 찬 찬히 들여다 보았다. "장차 어떻게 살고 싶은데?" "저는 간호대학을 가겠어요." "수녀가 되 고 싶 다고 했잖았니?" "수녀가 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예요. 먼저 간호사 되겠어요. 그 다음에 수녀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뭐가 되고 싶은데?" "아주 중요한 거예요. 그게 제 인생의 마지막 큰 목표라고요." 미숙은 말을 하고 나서 침을 꼭깍 삼키며 아빠와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경옥은 이상하게도 미숙의 장래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는 것처럼, 창밖에 시선을 던져 진 채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언제나 그랬듯 경옥은 어쩌면 김원철과 헤어져 집에 들 어가서 미숙에게 자신의 의사를 말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옥은 늘 그랬다. 김원철의 앞에서 는 되 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집에 들아간 후에는 시시콜콜 미숙이의 말고 태도를 따지곤 하였던 것이다. "그래, 미숙이의 마지막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아빠도 궁 금하구 나." "수녀가 된 다음에는 시인이 되겠어요." 미숙은 크게 눈을 뜨고 아빠와 엄마를 쳐다보 며 분 명한 목소리를 또박또박 말했다. "시인? 시인이 되겠다고? 왜 하필이면 시인이 되려고 그 래?" 김 원철은 약간 실망했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물론 시인이 되는 일이 가장 어렵겠지요 처음엔 저도 아빠 처럼 의사가 되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도와줄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그렇지 만 지 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바뀌다니 왜?" "저는 시가 좋아요. 좋은 시를 써서 세상 사람들 마음 을 시처럼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요. 물론 의사가 되기보다 좋은 시인 되기가 더 어렵겠지 만요." 미숙의 말에 경옥이는 물론 김원철도 한동안 할말을 잃고 말았다. 의사보다 시인이 되기를 원한 다는 미숙의 말에 김원철의 가슴에 오랫도안 남아서 부스럭거렸다. 그것은 충격이랄 것도 없지만, 미숙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미숙이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 는 생 각을 하게 되었다. 미숙이는 이미 사람에게는 육신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였다. 미숙이 모녀를 차에 태우고 집에 데려다주는 동안 김원철은 마음은 바웟덩 이에 짓눌린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김원철은 어쩌면 미숙이는 후에 성장하여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꿈을 성취하면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만큼 미숙은 영리하고 의지 가 강한 아이였다. 비록 초등학교 6학년의 어린아이라고는 하지만, 생각이 옹골찬데가다 세상을 보는 눈이 사뭇 어른처럼 슬거운 데가 있었다. 그것이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불행한 처지에서도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김원철로서는 다소 마음이 놓이가도 했다. 그러나 김원철은 미숙이가 좀더 어린아이다웠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미 숙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고아원 시절의 김원철 자신을 반추해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 자신도 미숙이만한 나이에 세상을 보는 눈이 지나치게 성숙해서, 온통 세상이 어둡고 뒤죽박죽으로 만 보 였던 것이다. "수녀가 되는 것도 좋고 훌륭한 수인이 되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장차 미숙이가 훌륭한 딸, 훌륭한 아내, 훌륭한 어머니가 되는 것도 훌륭한 시인이 되는 것 못지않게 어렵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렴." 김원철은 차 안에서 미 숙에게 그렇게 당부하였다. 그는 물론 그의 말을 미숙이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는 그 런 말을 하고 나서 곧 후회하였다. 기실 그는 훌륭한 남편도 아버지도 되지 못하였기 때 문이다. 고아원에 있을 때 김원철의 소원은 행복한 가정을 갖는 것이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추운 겨울, 커튼 사이로 따뜻하게 느껴지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행복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때마다, 그는 훗날 자신이 어른이 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 고 얼 마나 다짐을 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는 미숙에게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 가 되 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다. 김원철은 미숙이 모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우울한 기분으로 아 파트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가족들과 저녁때 외식을 하기로 약속했던 생각이 떠올라 퍼 뜩 놀 랐다. 그러나 아내한테 굳이 궁색스러운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 늦으셨어요?" 아내 는 담 담하게 물었다.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해. 병원 친구들과 일이 있어서..." "병원에 찾아와서 같이 나갔다는 당신 딸이 누구예요? 혹시 당신 저 몰래 숨겨둔 딸이라도 있는 거 아녜요?" 아내 가 따 지듯 묻는 말에 김원철은 심장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딸? 딸이 라니?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야? 당신이 언제 딸을 낳아주었던가?" 김원철은 뜨끔한 기분을 느끼 면서도 시치미를 떼며 엉너리를 쳤다. 김원철의 말에 정매는 한동안 말없이 남편의 얼굴을 깊숙이 찔러 보았다. 무슨 비밀이라도 탐지해 내려는 듯 날카롭고도 탐색적인 눈초리였다. 두 사람 사이 에 잠 시 팽팽한 침묵과 긴장이 흘렀다. "당신이 아침에 약속하신 대로 전화를 했더니 간호사가 그럽디 다. 따님이 찾아와서 함께 나갔다고요. 도대체 같이 나갔다는 그 당신 딸이 누구예요?" 아 뿔사! 김원철은 그제야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허탈하게 웃으며, "나 는 또 뭐라고 내가 당신한테 말하지 않았던가? 당신이 왜 원주 데리고 하동에 갔을 때, 집에 데리 고 와 서 저녁을 먹여 보냈다는 아이 말야." 김원철은 얼버무리지 않고 그럴듯하게 변명을 하였 다. "당 신이 그 아이의 양부라도 된다는 말예요?" "양부? 그렇다고도 할 수가 있지. 결연양부 말 야." "쳇! 그래 그 아이 때문에 가족과의 약속을 어겼단 말예요?" 아내는 그날따라 그녀답지 않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러나 정매의 기분이 날카로워져 있는 것은 남편이 외식 약속을 어겼 기 때 문만은 아니었다. "그 아이한테 문제가 좀 있어서... 당신이 이해를 좀 해주구려." 그러면서 김원철 은 아내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당신 저를 속이시는군요." 정매는 이내 샐쭉하게 토라졌 다. 김원철은 달리 변명할 도리가 없었는지라 그냥 어색한 웃음을 가득 머금어 날렸다. " 속이다 니? 내가 왜 당신을 속여?" "당신 조금 전에는 병원 친구들과 일이 있어서 늦었다고 분명히 말했 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 아이 때문이었다니, 어디까지가 진실이요?" 아내의 다그침에 김원철 은 다시 한 번 아차 하고 후회하였다. "그것은 말야.. 그건.." 김원철은 말을 못하고 얼버무 리고만 있었다. 김원철은 아내한테 진심으로 사과를 하였다. 그는 미숙의 일로 아내와 다투고 싶지 가 않 았다. 미숙이가 자신의 핏줄이라는 것을 아직은 알리고 싶지가 않았기에 구차하게 변명을 하느니 보다 차라리 약속을 어기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음을 말하고, 그것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내의 기분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정매가 그날따라 남편에 대해서 홀맺힌 감정을 나타내 보인 것은 아파트의 같은 동에 사는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떠벌이 여자로부터 남편 에 대 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매의 바로 아래층에 사는 철영이 엄마의 이 야기로 는, 분명히 원주 아버지가 얼마 전에 백화점에서 어떤 젊은 여자와 함께 열 살 안팎의 계 집아이 한테 옷을 사주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말야, 나 혼자만 알고 그냥 넘어가려고 해쓴 데, 이런 것은 원주 엄마한테 말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벌써 한 달도 더 된 일이 니, 나 도 무던히 참은 셈이지. 내가 보기에는 느낌이 어쩐지 이상하더라고... 내가 그러더란 말은 말고 한 번 따져보라구요." 바로 몇 시간 전에 아래층 여자한테서 그 이야기르 들은 정매는 그렇 지 않 아도 남편이 외식을 시켜주기로 해놓고는 전화 한마디 없는 것에 잔뜩 심기가 흐려져 있던 판이 라 기분이 이만저만 뒤틀린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딸이라고 하는 아이에 대해서 자세히 좀 알 면 안 될까요? 왜 나한테는 그 아이를 소개시켜 주지 않는 거죠?" 정매가 다시 따지듯 물 었다.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탐색을 위한 시도였는지 몰랐다. "기회가 오면 소 개시켜 줄게. 당신이 알면 더 좋겠지." "어떤 아이예요?" "이름은 황미숙, 아빠는 없고 엄마하고 단둘이 변두리에 셋방을 얻어서 살고...또...그렇지, 그애 엄마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을 못 보는 맹인이 었는데, 개안 수술을 해서 빛을 찾았지." 김원철은 아내의 눈치를 흘깃흘깃 실피며 일부러 더듬거 리듯 말했다. "제가 그 아이를 한 번 만나보면 안 될까요?" "왜 안 돼? 오히려 좋겠지. 당신 이 그 아이를 만나보면 관심을 갖고 도와줄지도 모르니까 말야. 언제라도 만나게 해줄 테니 말만 해요." 김원철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 아이 엄마는 뭘 하죠?" "뭘 하다니." "어떻 게 생활을 해나가느냐 이 말예요." "아마... 맹인 도서관에 근무하는 것 같지? 왜 그 아이 엄마도 만나보려구?" 남편의 물음에 정매는 선뜻 대답을 못하였다. 김원철은 미숙와 경옥이를 만 나보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섬뜩 놀랐다. 그러나 그는 애서 태연한 척해 보였다. "언제 한 번 소개 를 시 켜주세요. 우리 집으로 초대를 해도 좋구요." 정매가 처음과는 달리 혼연스럽게 말해럽게 말 했다. 그녀는 남편이 그녀 자신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남편을 아래 층 여 자의 말만 듣고 잠시라도 오해했다는 게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글세, 미숙이라는 아이는 만나봐도 상관이 없겠지만 그에 엄마까지 만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우리 집에 초대를 하면 거절 하지는 않겠지만 말야. 내 생각에는 미숙이라는 아이는 언제 기회를 봐서 한 번 만나보도 록 했 으면 어떨가 하는데..." 김원철은 정매가 경옥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경옥에게 할 짓 이 아니었다. 또 경옥이 쪽에서도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내가 그 여자를 만나자 는 게 뭐 여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자는 건 아니고... 그냥 당신이 그 여자의 아이를 양부처럼 도와 주고 있다니까, 한 번 만나봐도 나쁠 것 없을 것 같다는 거예요. 집에 초청해도 오지 않겠 다면, 우리 가족과 그들 모녀가 같이 밖에서 저녁이나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그렇게 한 번 서둘 러봐요. 저도 좋은 일 좀 하면서 살고 싶어서 그래요." 정매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전혀 다 른 의 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 모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순수한 동기 에서였 다. 그녀는 그들 모녀를 직접 만나봄으로써 불행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고, 남편처럼 그들 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의 그 같은 생각은 조금은 야비하고 사치 스러운 감정일지 모르지만 동기 그 자체는 순수했다. "당신이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합시다. 그렇다고 당신 이 그 여자가 근무하는 맹인 도서관까지 찾아가 볼 것까지는 없고, 언제 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우리 집에 초대를 한다든지, 아니면 시내 음식점에서 저녁이나 같이 먹도록 합시다." 김원철 역시 아내의 제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그는 아내한테는 그렇게 말했지만, 경옥을 정매와 만나 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구나 그의 아파트로 초대할 의사는 더더욱 갖고 있지 않았 다. "언 제 저도 그 아이한테 옷이나 한 벌 사주었으면 해요. 그 아이 엄마한테는 제가 업었던 옷을 주어 도 좋겠구요." 정매는 병원 일이 바쁜 남편이 백화점에까지 가서 아이의 옷을 사주더라는 아래층 여자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물론 그 말에 다른 저의는 전혀 없었다. "그애한테 옷을? 더구 나 아이 엄마한테?" 김원철은 다소 놀라는 눈빛으로 아내를 마주보며 반문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혹시 아내가 김원철 자신과 경옥이 모녀와의 사이를 눈치채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묶임을 당했다. 다음날, 정매는 남편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외출을 서둘렸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 몰래 도와주고 있다는 여자아이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었다. 정매는 그 아이를 만나보 고 싶 어, 창주에에 물어서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미리 알아두었던 터였다. 정매는 미숙이라는 아이 를 학교에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었다. 집에서 나온 정매는 백화점에 들러 미숙이가 입을 수 있는 봄 스웨터를 사서 종이 가방에 넣었다. 처음 그녀는 미숙이의 체격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옷 사 는 것을 망설이가다, 초등학교 6학년짜리 계집아이가 입을 만한 사이즈를 골랐다. 그녀는 남 편 몰 래 미숙이를 만나러 가는 게 왠지 마음 한 구석에 꺼림직했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가 결코 비난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을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남편이 불쌍한 아이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남편한테 그런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평소에 보면 남편은 고아원 출 신답지 않게 이기적이고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남편이 자신 몰래 미숙이라는 아이를 도와준 것처럼, 그녀 자신도 남편 몰래 그 아이를 만나서 도움을 주고 싶었다. 미숙이는 쉽 게 만 날 수가 있었다. 첫눈에 본 미숙이는 호감이 가는 아이였다. 마침 점심 시간이라 정매는 미 숙이를 데리고 학교 앞에 있는 중국 음식점으로 들어가 탕수육 한 접시와 자장면 두 그릇을 시키고 마주 앉았다. 미숙은 묻는 말 외에는 말이 없았다. 미숙은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흘금흘금 정매 를 훔 쳐보곤 하였다. 미숙은 자신을 학교까지 찾아온 여자가 바로 아버지와 함께 사는 창주의 엄마라 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미숙은 어린 마음에도, 창주 엄마가 자기한테 무엇인가 따 지러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은근히 두려움이 앞섰다. 기실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어쩐지 창주 엄마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창주 엄마를 미운 눈으로 보지 않았 다. 엄 마에 비해 창주 엄마는 휠씬 아름답고 화려해 보였다. 벽돌색 입술이며 아침 안개처럼 흰 살결도 시선을 끌었다. 은근히 질투심이 일기는 하였으나 어찌된 것인지 밉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 다. 미 숙은 처음 본 창주 엄마와 자신의 엄마를 하나하나 비교해 보았다. 생김새며 옷치장 등등... 비교 하면 할수록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우리 집에도 한 번 왔었더라면? 그깨 내가 집에 없어서 너를 만나보지 못했구나. 내가 집에 있을 때 왔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창주가 너를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더구나." 미숙은 창주 엄마의 말만 조용히 듣고 있었다. 창주 엄마는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미숙은 마음속으로 창주 엄마가 미숙이와 아빠 관계를 알고 찾아와서 그것을 따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소 마음이 놓았다. "그래, 엄마하고 단둘이서만 산다면 서?" "예" 정매의 물음에 미숙은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아빠는 일찍 돌아가셨니?" 정매의 그 같 은 물음에 미숙은 한동안 대답을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미숙은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숙은 자기한테도 아빠가 있다고 자랑스럽게 외치고 싶었다. "아빠가 계셔 요." 미 숙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 어쩐지 목소 리가 저절로 줄어들고 말았다. "아빠가 계셔? 우리 창주 아빠 말로는 미숙이는 엄마하고 둘이서 만 산다고 하시던데?" "따로 사셔요." "따로 시신다고?" "아빤 우리가 싫으신가 보죠." "설 마... 그 러기야 하실라고..." 정매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미숙이네 가정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 을 짐 작하였다. 그녀는 미숙이한테 아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였다. "참, 엄마께선 뭘 하 시니? 엄마가 벌어서 생활을 하시겠네?" "엄마가 직장에 나가시기 전까지는 아빠가 도와 주셨어 요." "지금은 엄마께서 뭘 하시는데?" 정매의 물음에 미숙은 다시 대답을 못하고 한동안 미 적거렸 다. 미숙은 창주 엄마한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까발리고 싶지가 않았다. 자존심 때문 이 아니라 엄마를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창주 엄마 는 미 숙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라. 우리 창주가 너를 아주 좋아하더구나. 언제 기회가 있으면 미숙이 엄마도 한 번 뵙고 싶구나. 우리 집에 초대 를 하 면 엄마 모시고 와줄 수 있겠지?" "고맙습니다. 엄마한테 말씀 여쭤볼게요." "그렇게 하려무 나. 우 리 집이 싫다면 시내에서라도 만나서 저녁이나 함께 하든가..." 정매는 미숙이 모녀를 집에 초대 하고 싶다는 제의에 미숙이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듯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고 맙습니 다." 미숙이는 똑같은 감정으로 거의 기계처럼 말하였다. 정매는 그런 미숙이와 쉽게 가까 워지기 가 어렵다는 것을 가늠하였다. 그날 학교에서 창주 엄마를 만나고 집에 돌아온 미숙은 마음 이 착 잡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엄마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미숙은 엄마한테 창주 엄마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쩐지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해줄 것 같았 기 때 문이다. 그리고 창주 엄마한테서 선물로 받은 봄 스웨터도 아빠가 사주신 것이라고 거짓말 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일찍 집에 돌아와서 엄마가 퇴근하기를 기도라고 있던 미숙은 엄마한 테 창주 엄마를 만났던 일을 숨기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막상 엄마의 얼굴을 보자 그 일 을 숨 긴다는 게 마음 아팠다. 지금껏 미숙은 엄마한테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거짓 말 한 번 하기가 이렇게도 어렵다는 것을 미쳐 몰랐다. 미숙은 거짓말을 하여 마음속으로 고통을 당하 느니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꾸중을 듣는 편이 속 편할 것 같아, 엄 마한테 학교로 창주 엄마가 찾아왔던 이야기를 숨김없이 토해 내기로 하였다. "엄마... 저... 오늘 말야..." 마주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미숙은 지싯거리며 말을 꺼냈다. 지금껏 미숙은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 한테 밖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이야기해 주는 게 어느덧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왜 그 러니?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미숙이가 선뜻 이야기를 못하고 미적거리고만 있자 경옥이가 눈치를 채고 물었다. "나, 오늘 어떤 아줌마한테서 선물을 받았거든." "선물이라니? 누구한데서?" 미숙이 가 선물을 받는 일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실 미숙이는 성탄 절이나 자신의 생일날에도 지금껏 변변한 선물 한 번 받은 적이 없었다. 경옥은 그런 딸을 늘 안 쓰러워하였다. "아줌마가 학교로 나를 찾아와서 이걸 주었어요." 미숙은 책가방 속에 감추 어두었 던 스웨터를 꺼내 엄마한테 보였다. "그건 봄 스웨터가 아니냐? 비싼 것인데 이런 선물을 누가 학교까지 찾아와서 주었다는 게냐? 고맙게도... 어떤 아줌마라니?" 경옥은 다소 놀라는 표 정으로 미숙을 보며 물었다. "창주... 엄마가... " 미숙은 겨우 입을 열어 잦아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 답하였 다. "창주 엄마라니!" 경옥은 처음에 창주가 누구인지 몰라 되물었다. "아빠하고 같아... 사 는..." 미 숙은 여전히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하며 조심스럽게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미숙은 엄마한테, 낮에 아빠와 같이 사는 여자가 학교로 찾아와서 스웨털를 선물로 주고 갔다는 말을 하고 너서 다 소 겁 먹은 얼굴로 엄마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미숙은 아빠의 부인이라는 말 대신에 아빠와 함께 사는 여자라는 표현을 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으나, 그렇게라도 해 서 엄 마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오랫동안 반응이 없었 다. 그냥 게걸스럽게 밥숟갈을 떠넣고만 있었다. 엄마는 화가 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게걸 스럽게 음식을 먹거나, 아니면 아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자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미숙이도 그런 엄마의 버릇을 그대로 닮았다. "오늘 처음 만났니? 그래, 너한테 뭐라고 하시던? 뭣 때문에 너 한 테 선물을 사주었을까?" 겅옥이는 미숙에게 한껀번에 너무 많은 것을 물었다. 미숙은 그런 엄마 의 얼굴을 얼핏얼핏 훔쳐보면서 엄마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문에 미숙 은 처음 생각했던 대로 그 시실을 숨겨버릴 것을 괜히 털어놓아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 고 말 았구나 하고 후회하였다. "오늘 처음 만났어요. 그냥 뭐 엄마는 뭣하시냐, 아빠는 언제 돌 아가셨 느냐 하는 것을 물었어요." "뭐? 아빠가 언제 돌아가셨느냐고?" "그 여자는 아빠와 우리들 사이를 모르고 있었어요." "모르고 있었다고?" "그래요, 그 여자는 저를 그냥 아빠가 도와주는 불쌍 한 아 이라고만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여자가 뭐니? 그분은 네 아빠의 부인이야." 경옥은 부드럽 게, 그러나 우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미숙을 나무랐다. "하지만 어떻게 아빠 부인이라고 할 수 가 있겠어요? 아빠를 먼저 만난 건 엄마가 아냐? 부잣집 딸인 그 여자가 아빠를 가로채갔 다는 것 쯤은 저도 알아요." 갑자기 미숙이가 울먹이며 엄마한테 쏘아붙였다. "아니얘가? 가로채다 니? 그 런 말이 어디 있어?" 그러자 미숙은 사뭇 소리를 내어 울어버렸다. 경옥은 그런 미숙을 더 나무 라지도 달래지도 않고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하였다. "다른 말은 없었니?" 한참 후에 야 경 옥이가 부드럽게 물었다. "엄마와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겠다고 했어요." 미숙이가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며 여전히 울먹이며 말했다. "집으로 초대를?" 경옥은 너무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숟갈을 상 위에 놓아버렸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우리를 집에 초대한다던?" 경옥은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미숙에게 따지듯 물었다. 미숙은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멀뚱한 눈으로 엄마의 얼굴을 바라본 채 한동안 말을 못하였 다. "언 제 초대를 한다고 그랫어?" 경옥은 다시 다그쳐 물었다. "초대할 날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어 요. 그냥 집에 가서 엄마한테 여쭈어보겠다고만 대답했어요." 미숙은 엄마가 마치 화를 내고 있는 것만 같아서 풀이 죽었다. "다른 이야기는 없었고?" 잠시 후에 경옥은 한껏 목소리를 부 드럽게 가라앉히며 물었다. "중국집에서 탕수육이랑 자장면이랑 사주고는 그냥 갔어요. 엄마가 어 디에서 일을 하시느냐고 물었지만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 여자가 엄마한테 찾아갈까 봐서요. 엄마 는 그 여자 만나기 싫지? 나도 그 여자를 만나기가 싫어. 그 여자가 사준 이 스웨터도 입고 싶지 가 않 단 말야. 그리고 아담에 집에 초대한다 해도 나는 가지 않을 테야. 오늘도 그 여자와 같이 있으려 니까 괜히 울화기 치밀어오르잖아." 경옥은 미숙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녀는 미 숙에게 그 여자라고 하지 말라고 다시 타이르려다가 내버려두었다. 경옥은 미숙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미숙은 분명히 그 여자에 대해서 강한 적대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감정 은 사실 경옥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 여자에 대해서 되도록 관심을 갖지 않으려 고 노 력하였으나 그게 마음대로 잘되지가 않았다. "창주라고 했지? 그래, 그 창주 엄마 이쁘게 생 겼던? 미숙이 네가 보기에는 어땠니?" 경옥은 어린딸에게 그렇게 묻고 나서 이내 후회하였다. 어쩐지 미숙이에게 속을 보인 것만 같아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미숙이의 말을 듣고 싶었다. "엄마도 그렇게 좋은 옷에다 화장 진하게 하면 그 여자만큼 이쁠 거야. 아냐, 엄마 도 좋 은 옷을 입으면 그 여자보다 훨씬 더 이쁘겠지 뭐." 미숙은 애매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눈치를 주의 깊게 살폈다. 솔직히 미숙이가 보기에 창주 엄마는 세련되고 이뻤다. "그렇게 이뻐? 누구만큼이나 이쁜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탤런트들 중에서 누구만큼이나 이쁜데" 경옥은 그렇게 묻고 나서 자신을 향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내가 어린 미숙이한 테 무 슨 말을 듣고 싶어서 이러지, 하고 자문하였다. "하나도 이쁘지 않아. 엄마가 훨씬 이뻐, 정 말야." 어린 미숙이었지만 엄마가 그 여자의 생김새에 관심을 나타내보이자 얼른ㄴ 말을 돌려버 렸다. "거짓말" 경옥은 여전히 허탈하고도 씁쓸하게 웃음을 흘렸다. 학교에 가서 미숙을 만나고 돌아온 그날 저녁, 정매는 남편한테 미숙이 모녀를 집에 초대 하고 싶다는 말을 다시 꺼냈다. "실은, 오늘 그애를 만나고 왔어요. 아이가 아주 똑똑하던데 요. 헌데 어쩐지 가깝게 사귀기가 좀 힘들어 보였어요. 왜 불행한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경 계심 같은 것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얼른 친근감이 가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첫인상은 괜 찮았다구요. 에가 좀 붙일맛이 없어서 그렇지 착하고 영리해 보였어요. 묻는 말외에는 말수 도 적고, 암튼 사귀기 어려운 아이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같이 느껴졌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도와주고 있는 아이니까 저도 앞으로 그 아이와 친해지도록 노력하겠어요. 참, 그런데 그 아 이 가정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더군요. 당신은 제게 그애 아버지가 없다고 그랬는데 그게 아니래요." 정매의 이야기에 김원철은 눈심지를 빳빳하게 말아올린 채 잠자코 듣고만 있었 다. 김원철은 처음에 그의 아내가 미숙이를 만나고 왔다는 말을 꺼냈을 때 가슴이 철렁 내 려앉았었다. 그러나 다듣고 보니 그리 놀라지 않아도 괜찮다 싶어, 마음속으로 한숨을 몰아 쉬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니?" 김원철은 눈길을 돌리며 짐짓 관심이 없는 태도로 물었다. "따로 산대요. 아마 그애 아빠가 딴 여자하고 살림을 차렸거나, 아니면..." 정매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더 이상 추축하기가 난감해서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언제쯤이 좋겠어요?" "뭐가?" "그애, 미숙이 모녀를 집에 초대하는 것 말예요. 오늘 미숙이한테 모녀를 우리 집에 초대하겠가도 했어요. 그랬더니 엄마한테 물어보겠다고 하대요." 정매의 물음에 김원철은 대 꾸하지 않았다. 그는 순간 어린 미숙이가 얼마나 마음속으로 당황해 하였을까 싶어 안쓰럽 기 그지없었다. 불쌍한 미숙이의 모습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영리한 미숙이는 어쩌면 창주 엄마가 학교까지 찾아왔었다는 말을 엄마에게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김원철은 생각하였 다. 괜히 엄마한테 그 말을 하여 엄마를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들은 우리 집에 오지 않을 텐데..." 김원철은 자기의 생각을 입밖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그 말에 정매의 표정은 달라졌다. 그런 아내의 표정에 김원철은 아차 하고 후회하였다. "그것을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예상했던 대로 정매가 그렇게 물었다. 그는 아내의 질문에 가슴이 뜨끔함을 느꼈다. 김원철은 한참 동안이나 대답을 못하고 미적거리고만 있었다. 그러나 아내 가 그의 말을 달리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이내 마음을 놓았다. 그는 아내의 육감이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이면 아내한테 허점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어차피 원주의 일에 대해서는 모른 척 덮어두기로 하였고, 설사 아내 쪽에서 원주가 죽은 최지훈의 핏줄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한 터였다. 때문에 자신과 미숙이 모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비밀로 해두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글세, 그애 어머니는 사람들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더만. 오랫동안 맹인 생활을 해온 탓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야." 김원철은 궁색스러운 변명을 하면서 속으로 는 땀을 빼며 끙끙거렸다. "세상을 살아가자면 어려운 처지에 있을수록 이웃들과 잘 어울려 야 해요. 걔도 엄마 성격을 닮았는지 약간 삐딱하게 틀어져 있어요. 그래 가지고는 사랑을 받기가 어렵지 않겠어요? 하찮은 개도 꼬리를 치면서 주인을 따르면 귀여워해 주고 싶지 않 던가요? 그래 가지고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그래요? 아마 그러니까 그 여자 남편도 집을 나가서 딴 여자를 보았겠지요. 가난하고 약할수록 적극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 가야 할 필요가 있다구요." 김원철은 아내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이번 주 일요 일에 당신 특별한 일 없으시죠?" 정매가 물었다. 김원철은 아내가 왜 그의 일요일 스케줄에 대해서 묻고 있는지를 짐작했다. "별로... 아직은..." 김원철은 애매하게 대답하였다. "그럼 됐 어요. 이번 주 일요일에 미숙이 모녀를 집에 초대하겠어요. 그래서 그애 엄마한테 세상 살아 가는 법을 좀 가러쳐주겠어요" "세상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고? 어떻게 당신이 그런 것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그래? 세상 살아가는 법은 아무도 가르칠 수가 없는 거야. 당신이나 나 는 뭐 세상을 제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그것은 관점의 차이야. 인생관의 차이란 말야. 미숙이 어머니 쪽에서 보면 우리들의 삶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않아?"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다고요?" 정매가 날카롭게 따져물었다. "이를테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게지. 미숙이 어머니야말로 가간하고 외롭기는 하지만ㄴ 하느님 열심히 믿고, 또 불쌍한 맹 인들 위해서 봉사하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소." 김원철의 말에 정매가 잠시 할말을 잃었다. 남편의 말이 그녀의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와 깊숙이 박힌 때문이었다. 우리들 삶에 문제가 있다고... 그녀는 혼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부 인할 수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정매는 갑자기 마음이 풀잎처럼 약해져 버렸다. 어쩌면 남편의 말대로 미숙이라는 아이의 엄마 되는 여자가 정매 자신보다 더 자신만만하고 떳떳하 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매 자신이 자신의 삶을 자신 있게 세상 사람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외견상으로 보이는 물질의 풍요, 궁핍하지 않은 생활, 그것 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자문에 선뜻 대답할 건덕지가 별로 없는 듯싶었다. 생 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매는 갑자기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더더욱 미숙이 어머니를 꼭 만나고 싶네요. 어쩌면 그 여자에게서 인생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 까요." 정매가 야간 뒤틀린 감정으로 말하였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한 그녀는 자신을 질책하 는 마음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일 뿐 남편의 말을 오해한 탓은 아니었다. "당신이 그 여자한 테서 인생을 배우다니..." 김원철이 애서 웃음을 흘리는 얼굴로 아내를 보며 물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그여자의 눈으로 보면 우리들 삶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당신 내 말 을 오해하고 있구만. 내 말은 말이오. 그런 뜻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삶도 비난하거나 무시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요. 모든 사람들의 삶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오. 설마 그 삶 이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이라 해도, 깊은 내막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관점에서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거요. 왜냐하면 인생은 각자 자기가 선택하고, 또 선택한 만큼 책임도 지니까. 인생의 결과를 행복이나 불행이는 간단한 말로 평가할 수는 없지 않겠소? 행복한 삶은 성공한 삶이고, 불행한 삶은 실패한 삶이라는 가치 기준으로 인생을 따진다는 것은 잘 못 아니겠소? 그런 점에서 우리, 미숙이네 가정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거나 또, 그 사람들이 불행하니가 연민의 정을 베풀어야겠다고 억지로 생각하지 맙시다. 다만, 그들이 어려운 처지 에서 도움을 요청해 오는 일이 있을 때, 그 요청만큼만 도와주면 되는 것이오. 그것이 그들 의 삶을 존중해 주는 것 아니겠소? 그들의 자존심을 해지면서까지 억지 선심을 쓴다는 것은 결코 진정한 사랑이나 봉사가 아니라는 뜻이지. 내 말뜻 알겠소? 그러니 지나친 관심은 갖 지 말도록 합시다." 김원철의 그 말은 그의 아내가 미숙을 가까이 하려는 데에 쐐기를 박아 두기 위한 계략을 수도 있었다. 그는 아내가 미숙이 모녀를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 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코 미숙이 모녀 쪽에서도 바라지 않는 일일 터였다. "그래도 한 번쯤은 미숙이 엄마를 만나보고 싶어요. 이상하게 관심이 생기네요." 정매는 끝내 마음을 바 꾸려고 하지 않았다. 정매는 당초 생각되로 이번 일요일에 미숙이 모녀를 집에 초대하겠다 고 하면서, 김원철에게도 그날만은 자리를 함께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녀는 원주와 창주에 게도 그 이야기를 하였다. 원주는 미숙이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 모 녀의 초대에 트적지근한 반응을 나타냈으나 창주는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하였다. "미숙이 누나가 우리 집에 온다고? 그게 정말이야?" "그래. 걔 엄마랑 함께 초대할 거야." "와, 신난 다. 그러잖아도 미숙이 누나 보고 싶었는데." "창주 너는 미숙이의 어디가 좋다고 누나 누나 하면서 좋아하니? 미숙이가 그렇게 좋으니?" 정매는 창주가 미숙이를 단 한 번 만났을 뿐이 라는데도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애매하게 웃으며 물었다. 정매가 학교로 찾아가서 미 숙이한테 창주 이야기를 했을 때, 미숙이는 그냥 담담한 얼굴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미숙이 를 그렇듯 좋아하는 창주를 정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좋아요, 엄마. 처음에는 싫었 는데, 헤어질 때쯤에는 왠지 헤어지기가 싫었어요. 그리고 가끔 미숙이 누나 꿈도 꾸었걸랑 요" 그렇게 말하면서 창주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는지 버릇처럼 고래를 숙이고 혀끝을 길 게 빼물었다. "꿈까지 꾸었어?" "정말야, 엄마." "내 색시가 되는 꿈을 꾸었어." "뭐라고? 미 숙이가 네 색시가 되는 꿈을?" 정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허탈하게 웃었고, 김원 철은 밉지 않게, "임마, 미숙이는 너보다 나이가 네 살이나 더 많은데 어떻게 네 색시가 되니? 그냥 누나 지." 하고 나무랐다. "아빠, 왜 나이가 적은 여자는 색시가 될 수 있는데, 나이가 많은 여자 는 색시가 될 수가 없다는 거야? 그건 말도 안 돼." 창주가 사뭇 불만스럽게 말하자 김원 철과 정매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콩알만한 게 벌써 색시 타령이야. 너보다 두 살이나 많은 나도 가만 있는데." 그러면서 잠자코 있던 원주가 창주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고, 창주 는 앵앵거리면서 형한테 대들었다. "암튼, 아빠 생각에는 창주가 미숙이하고 친해지는 것은 좋은데 어디까지나 누나로 사귀는 것이 좋다. 이 말이다. 미숙이 생각도 그럴 거구 말야." "좋아요 아빠, 그 대신 내 색시감은 아빠가 책임지고 구해 주셔야 해요? 우리반 기집애들이 그러는데, 우리들이 장가 갈 때쯤이면 여자가 너무너무 부족해서 색시감을 구할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 반 애들은 미리 짝을 맞춰서 점을 찍어놔야 된대." 창주의 말에 온 식구 들이 한바탕 웃어댔다. 아내가 끝내 주장하여 미숙이 모녀를 일요일에 집으로 초대하기로 결정한 다음날, 김원철 은 병원에서 퇴근을 하는 대로 서둘러 미숙이네 집으로 갔다. 그날따라 그를 대하는 경옥이 와 미숙이의 태도가 딱딱하게 굳어진 듯싶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미숙이가 김원철에게 반 갑게 매달리면서 좋아했을 터인데, 이 날은 어쩐지 슬금슬금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한사코 뜨악한 표정으로 맴돌았다. 경옥이 또한 김원철을 보더니 냉갈령수러운 눈빛으로 힐끔 쳐다 보았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김원철은 이들 모녀의 분위기가 왜 이렇듯 갑자스레 차갑게 굳어지게 된 것인지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는지라, 약간 어색함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예 전에는 별로 느껴보지 못했던 거리감이었다. "미숙아, 왜들 그러냐?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느 냐?" 집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김원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미숙은 엄 마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왜들 이러지?" 김원철은 다시 경옥에게 물었다. 김원철은 얼핏 본 경옥의 표정은 바위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참을 수 없는 분노나 슬픔 같은 것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무슨 일이 있었요?" 김원철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다시 물었다. 그제야 경옥은 눈썹을 빳빳하게 세우고 김원철을 보았다. 김원철의 기억에 아직까지 경옥 이가 이처럼 날카롭게 자기를 쏘아본 일은 없었다. 그랬기에 그 눈길이 더욱 싸늘하게 느껴 졌다. "애들 엄마가 뭣 때문에 나를 만나자고 그러죠? 뭣 때문에 나를 집에 초대하겠다고 그런답니까? 또 왜 미숙이 학교에까지 찾아다니면서 선심을 쓰는 거예요?" 경옥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날카롭게 따지듯 물었다. 김원철은 그제야 경옥이와 미숙이가 뜨악한 얼굴을 하고 그를 맞게 된 연유를 어림할 수가 있었다. 그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것은 김원철 이 예상했던 일이었다. 병원에서 퇴근을 하자마자 부랴부랴 달려온 것도 이미 아내한테서 초대 연락을 받고 당황해 있을 경옥에게 전후 사정을 이해시키려는 뜻에서였던 것이다. "아, 그것 때문이로구만." 김원철은 가볍게 웃으며 안도하는 눈빛으로 경옥을 보았다. "다 른 의도는 없으니 안심해. 우리 집에 미숙이 모녀를 초대한 것은 순수하니까 말이야." 김원 철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하였다. "순수하다고요? 순수라뇨?" 경옥은 김원철의 말에 비아 냥거리듯 물었다. 그의 아내가 미숙이 모녀를 집에 초대한 것에 대해 경옥이 무엇인가 오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물론 김원철이 예상했던 것이며, 그 때문에 애시 그는 아내의 뜻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다니까. 다른 뜻이 있어서 우리 집에 초대하겠다는 게 아니라구. 그러니 오 해할 필요가 없어." 김원철이 다시 좋은 말로 경옥을 다독였다. "그렇겠지요. 허나 우리는 밥이나 얻어먹으러 다니는 그런 거렁뱅이가 아니랍니다." 경옥은 돌멩이를 집어던지듯 퉁겨 댔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누가 거렁뱅이 취급을 한다고 그러나?" 김원철도 약간 언성이 높아졌다. "거렁뱅이가 아니면요? 그렇다면 우리 미숙이가 양부 집에 초대되어 가는 건가 요? 불쌍한 아이를 돕고 사는 그런 자선가의 집에?" 경옥의 목소리가 쨍그렁 소리를 내며 날카롭게 퉁겼다. 김원철은 그녀의 그 같은 태도에 너무 놀랐다. 그는 경옥이 지나치게 과잉 반응을 보이는 것만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말해 보세요. 내 말이 틀렸나요? 당신이 부인한 테 그렇게 말했겠지요. 아빠는 죽고, 엄마는 앞을 못 보는 불쌍한 아이가 있어서 양딸처럼 돕고 있다고 말예요. 내 말이 틀렸나요? 당신이 부인한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래 요, 우리 미숙이는 아빠가 죽고 없는 불쌍한 아이죠. 그러니 부인의 동정심이 발동했을 거구 요." 김원철은 할말이 없었다. 그는 경옥의 말에 구차스럽게 변명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녀의 말이 모두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에게 분명 그렇게밖게 말할 수가 없었다. 김원철은 난감한 표정으로 미숙을 보았다. 미숙은 고개를 무겁게 떨구고 앉아서 울고 있 었다. 순간 그는 자신이 미숙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는 것을 스스 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런 자신이 싫었다. 어떤 말로도 미숙이를 위로할 수 없다 는 것을 안 김원철은 잠시 눈을 감았다. "미숙아, 아빠의 본심을 알 게다. 그리고 이런 아빠 를 이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 김원철은 잦아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하였다. 그는 자책 감과 수치심 때문에 미숙이 모녀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알아요, 아빠 마음 다 알아요. 저 는 괜찮다구요. 아빠, 제 걱정은 마세요. 정말예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미숙은 눈시울 이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김원철을 보면서 말했다. 김원철은 어린 딸 미숙의 말에 감동하였 다. 아니 감동 이전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미숙을 바라보고만 있었 다. 미숙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김원철은 미숙이의 나는 괜찮 아요. 내 걱정은 마세요, 라는 말이 머리 속에 오랫동안 맴돌며 부스럭거렸다. 그는 마음속 으로 이제 미숙이도 어느새 다 컸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미숙이는 이제 세상이 어떻게 변하 고, 자신의 환경이 크게 달라져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미안하게 됐어. 미숙이에 대해 떳떳하게 말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야, 그렇지만..." 김원 철은 말을 하다 말고 자신도 모르게 함숨을 내뿜었다. 더 이상 변명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기실 그는 변명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애들 엄마가 초대한 것이 마음에 걸리면 초대에 응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니 부담감 느끼지 말아. 시실 나도 두 사람을 집에 초대하겠다는 집사람의 의견에 반대를 했어. 그렇지만 엄마는 그렇다고 해도 미숙이만은 와주었으면 좋겠 구나, 창주가 미숙이를 초대한다니까 그렇게 좋아하더군, 너도 창주가 싫지는 않겠지?" "그 렇게 하겠어요. 저 혼자서 가죠. 저도 창주가 보고 싶구요. 아직 원주는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는데, 원주도 보고 싶어요."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구나." 김원철은 어린 딸 미숙 이한테 고마운 마음을 보냈다. 경옥은 미숙이 혼자서 초대에 응하겠다는 말에 아무런 반응 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잠자코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김원철에게 너무 심하게 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 다. 그녀는 김원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앙탈 아닌 앙탕을 부린 것 같아서 김원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김원철이 떳떳하게 미숙이의 존 재를 그의 부인한테 내세우기를 바라는 입장도 아니지 않은가. 또한 김원철의 부인이 그녀 와 미숙이를 초대한 것도 김원철의 말마따나 순수한 마음에서 일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도 왈칵 성깔을 곤두세웠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녀 자신도 가늠하기가 어려웠 다. 그녀는 왜 자신이 김원철에게 뒤틀린 심사를 폭발시켰는지 그녀 자신도 알수 없었다. "암튼, 미안하게 됐어. 다른 생각은 갖지 말고 일요일에 미숙이나 보내도록 해요. 좀 늦더라 도 내가 집에까지 데려다줄 테니 걱정 말고." "아빠 걱정 마세요 저는 꼭 갈거니까요." 경 옥이 대신 미숙이가 짐짓 얼굴을 밝게 펴 보이며 말했다. 그날 저녁 김원철은 더 오래 경옥 이네 집에 머무르지 않고 서둘러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파트로 돌아온 김원철은 그의 아내 에게 미숙 어머니가 초대에 응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하였다. "미숙이 어머니라는 분한테서 병원으로 전화가 왔었는데, 자기는 몸이 좋이 않아 초대에 응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면서, 그 대신 미숙이를 꼭 보내겠다고 하던데..." 김원철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번에는 그 의 아내한테 미안한 생각을 가졌다. "이상하네요. 내가 미숙이한테 말을 했을때는 제 엄마도 함께 올수 있도록 하겠다 던데..." "몸이 좋지 않다는데 어쩌겠어? 그리고 오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오라고 해서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여도 그건 생색이 안 나는 거 아냐? 내 생각에는 미숙이만 데려다가 저녁이나 간단히 먹여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야, 누구한테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왜, 도움을 준 사람들의 지나친 호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오해하는 경향 이 있지 않아. 아마 자손심일지도 모르지만 말야, 그러니 여보. 미숙이 어머니는 그냥 둡시 다." 김원철은 아내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말하였다. "당신 미숙이 어머니 만난 적 있으세요?" 갑자스레 아내가 묻자 그는 약간 당황했다. "글 세... 아, 있어. 미숙이가 아팠을 때 만난 적이 있었지." "개안 수술을 했다는데, 그럼 앞을 못 보던 때 만났나요?" 정매는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그러나 김원철은 아내의 미숙 모녀에 대한 관심이 크면 클수록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바짝바짝 죄어드는 듯싶었다. "글세... 그러 나까... 그때가 앞을 못 보았을 때인가...? 그렇지. 개안 수술을 한 다음에도 한 번 만난 기억 이 있구만. 맞았어. 미숙이랑 병원으로 왔었지." 김원철은 난감한 표정을 숨기려고 애를 쓰 며 어물어물하였다. "미숙이 엄마는 어때요?" "뭐가?" 김원철은 아내의 물음에 애매한 표정 을 지으며 반문하였다. "어떤 여자예요? 오랫동안 앞을 못 보다가 갑자기 눈을 뜨게 되면 사람이 좀 이상해질 것 같지 않아요? 눈을 뜬다는 것은 앞을 볼 수 없다는 것과 비슷한 충 격을 주게 될 거예요. 그 동안 어둠속에 혼자 내버려진 것 같은 불안감과 소외감 속에서 살 아왔으니 성격이 비뚤어졌을 거예요. 그런 사람은 마음의 눈도 함께 떠야 하는 건데..." "미 숙이 엄마는 이미 앞을 보지 못했을 때도 마음의 눈을 뜨고 살아온 여자였어." 김원철은 자 신도 모르게 아내를 향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정매는 끝내 남편의 제안을 무시하고 다음날 서둘러 미숙의 어머니를 만나볼 생각으로 아파트를 나섰다. 정매는 남편이 이상하게 미숙의 어머니를 싸고도는 듯한 느낌을 받고 한 번 그녀를 만나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어쩐지 미숙의 어머니라는 여자에 대해서 알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 하였다. 그것은 남편의 미숙 어머니에 대한 설명이 어딘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 아니었 다. 오랫동안 앞을 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눈을 뜨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쉽게 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여전히 소외감을 느낀 채 살아가고 있는 듯한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단순한 동정심이 발동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정매는 미숙의 어머니 맹인 도서관에 근무한다는 것 을 남편을 통해서 알아낸 후, 곧 도서관에 전화를 걸어 그곳의 위치며, 그녀의 이름까지도 정확하게 알아내고 아파트를 나섰다. 맹인 도서관은 생각보다 규모가 적었으며, 그곳에서 일 을 하는 사람들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첫눈에 미숙 어머니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미숙의 어 머니를 대하는 순간, 다시 한 번 낯선 충격과 묘한 느낌을 받았다. 정매가 생각했던 미숙 어 머니가 아니었던 것이다. 키는 자그마했으나 얼굴 생김생김이며 입성, 그리고 정매를 대하는 예의바른 태도에서 특별한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이름을 알 수 없 는 아름다운 꽃을 발견한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녀의 얼굴빛이 유난히 맑 고 고운데다가 비록 값비싸고 화려한 옷은 아니었지만, 가냘프면서도 당당하고 개성적인 분 위기를 은근히 자아내고 있었다. "미숙이 어머님이시죠?" 경옥을 처음 대하고 잔잔한 충격 을 받은 정매는 한동안 말을 걸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다가 가까스로 그렇게 물었 다. 정매를 대하는 미숙 어머니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경옥이도 첫눈에 자신을 찾아온 여자 가 바로 김원철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경옥은 설마 김원철의 부인이 직장에까지 찾아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되도록 그녀는 당황해 하는 빛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누구...신지요?" 경옥은 자신을 찾아온 여자가 김원철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산부인과병원 닥터 김이 저의 주인이랍 니다." 정매는 되도록 이면 미숙 어머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대답했다. 경옥은 잠시 멀뚱한 시선으로 김원철의 부인을 마주보고 있다가, 도서관 안에 있는 휴게실로 안내했다. 말이 휴게실이지 원탁 하나에 삐걱거리는 나무의자 두 개가 놓여 있는 손바닥만한 공간에 불과했다. "헌데 사모님께서 왜 저를 ..." 경옥은 김원철의 부 인이 자리에 앉기르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 주인한테 전화를 하셨다면서요?" "전화를요?" 경옥은 정매의 말에 안색이 달라졌다. 경옥은 김원철의 부인이 자신의 직장에 까지 찾아와서 남편한테 전화를 했느냐고 묻자 소스라치듯 놀랐다. 물론 정매가 다른 의미 로 그렇게 물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경옥은 김월철의 부인이 마치 자신과 그녀 남편의 과거 를 알고 따지러 오기라도 한 것으로 순간 착각을 한 것이다. 더구나 경옥이로서는 김원철 에게 여지껏 단 한 번도 전화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놀란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경옥은 김원철을 따라 부산으로 옮겨온 이후로, 병원에 전화를 해본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경옥은 자신을 찾아온 김원철의 부인에 대해서 질투나 시기심 따위는 갖지 않았다. 다만 경옥은 그 여자 앞에 모습을 보이고 싶지가 않은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근무하 는 직장에까지 찾아와서 남편한테 전화를 걸었느냐고 묻자,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잔뜩 움 츠러들었던터라 자신도 모르게 전화를요? 하고 목소리를 퉁겨대고 말았던 것이다. "저의 주 인이 그러시던데요. 미숙이 어머님께서 몸이 좋지가 않아서 초대에 오실 수 없다는 전화가 왔었다고 말입니다." 정매는 얼굴에 미소를 흘려 보이며 미숙이 어머니로 하여금 마음이 상 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오랫동안 소외당한 사람들이란, 낯선 사람에 대해 친화력을 보이 는 대신 불안감을 나타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네..." 경옥은 자신이 병 원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 것은 미숙이 아빠가 지어낸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의 주인한 테서 미숙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또 우리 둘째 아이가 미숙이를 그렇게 좋아한답니 다. 그래서 좋으시다면 미숙이와 미숙이 어미님을 우리 집에 초대할까 해서 미숙이한테 말 을 했었답니다.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우리가 앞으로 도와드릴 일이 있으며... 또 우리 둘째가 미숙이를 좋아하고, 우리 집 주인도 미숙이를 돕고 싶어하니까..." 정매의 이야기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엇갈렸다. 경옥은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되도록 정매의 눈길을 피했다. 그녀는 자신을 김원철의 부인 기억에 남기도 싶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헌데 저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네요. 그 대신 미숙이가..." 경옥은 낮은 목소 리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김원철의 부인이 빨리 돌아가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솔 직히 말해서 경옥은 그녀와 잠시도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김원철의 부인 앞에 부 끄러운 일도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도, 이상하게 수치심과 죄책감 같은 것도 꿈틀거렸다. "어지간하시면, 미숙이 어미님께서도 함께 오시지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러면서 경 옥은 애써 억지 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고개까지 흔들어 보였다. 정매는 마음속으로 미속이 가 엄마를 닮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미숙이처럼 그 어머니라는 여자도 쉽게 마음을 주고받 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좀심이 강해 보였다. 두껍게 닫힌 그녀의 마음을 열고 진실을 엿보기조차 어려울 것 같았다. 정매는 문득 호두처럼 단단한 껍질을 연상했다. 미숙이 어머니는 자기만의 두껍고 단단한 성을 쌓고 살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어쩌면 그런 딱딱한 분위기 때문에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매는 남자들이 란 콘크리트처럼 견고한 감정을 가진 여자나 호두껍질처럼 두꺼운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숙 엄마를 버린 남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마, 그도 미 숙 엄마의 그 견고한 성과도 같은 가슴의 벽을 무너뜨릴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이 여자를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정매가 처음 본 미숙 어머니의 분위기는 마 치 대리석으로 잘 다듬어놓은 작고 앙증스러운 조각 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런 여자들이란 쉽게 자기 도취를 하는 성격들이라 무엇인가 남들 앞에 내세울 만한 자기 세 계를 갖기를 원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불행하게 된 경우를 정매는 많이 보아왔었다. 정매는 미숙 어머니가 초대에 응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미숙이와 함께 와달라고 더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저어, 사모님께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우리 모녀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도움을 주시려고 하는 뜻은 고맙게 생 각합니다만... 이제 제 힘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거든요. 제가 눈이 보이지 않았을 때 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으나 이제는 제가 작장도 구했으니..." 정매는 미숙 어머니의 말뜻 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미숙 어머니는 자신들의 도움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 는 듯싶었다. 정매는 순간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럼, 실례했어요." 정매는 극히 사무 적으로 말하고 벌컥 일어섰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미숙 어머니를 찾아갔던 일을 후 회하였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 때문에 미숙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초대에 응해 다라고 사정 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매가 미숙이 모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이 남편의 도움을 받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미숙의 어머니가 개안 수술을 하여 직장을 나가게 된 지금에는 별로 도와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 편은 왜 그런 모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미숙 의 어머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정매의 기분은 거무죽죽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섰다가 거리에서 물세례를 받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미숙의 어머니 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졌다는 것조차도 마뜩찮게 여겨졌다. "미숙이 엄마 말예요. 사람이 왜 그래요?" 저녁에 식탁에 마주앉은 정매가 남편ㄴ에게 불쑥 말을 던졌다. 순간 김원철은 밥 숟갈을 든 채 놀란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 라, 최소한 그런 감정을 나타낼 수는 있는 거 아니에요? 이건 마치... 앞으로는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관심 끄라고 하대요." "미숙이 엄마를 만났단 말이오?" 김원철은 아내로 부터 난데없이 경옥이를 만나고 왔다는 말을 듣자 너무 놀라 한동안 당황했다. 그는 설마 아내가 경옥을 만나러 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않았다. 물론ㄴ 아내가 경옥을 만나고 싶 어한 것에 다른 뜻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터였으나, 그로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아내 가 경옥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경옥이와 김원철 자신의 관계를 모르고 있는 아내로서 는 경옥을 만난다고 해서 별다른 심적 변화가 없겠지만, 경옥의 입장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경옥에게 그 같은 아픔을 주고 싶지가 않았다. "당신 내가 미숙이 엄마를 만났다는 말에 왜 그렇게 비 맞은 동상 같은 얼굴을 하고 있죠?" 아내가 김원철의 놀라는 얼굴을 발견하고 가볍게 물었다. "내가? 글세, 나는 당신이 그 여자 를 만나러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김원철은 억지로 얼굴에 웃음을 말아올리 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여자를 만나고 나서 후회했어요." "후회를 하다니? 왜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그 여자 그렇게 예의가 없는 사람 아닌데." "그래요? 당신 미숙이 엄마에 대히서 많이 알고 계시는군요." 정매는 남편이 어딘가 미숙의 엄마를 두둔하는 것만 같아 약간 기분이 상해 일부러 찍는 소리를 하였다. 그러자 김원철의 표정이 다시 칙칙하게 굳어 졌다. "헌데 후회를 하다니?" 김원철로서는 아내가 경옥이를 만나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어 마음이 바짝바짝 죄어들었다. 아내가 퉁겨대는 말투로 짐작컨대 필 시 결과가 좋지 않은 듯싶었다. "미숙이 엄마라는 여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던데요?" 정매는 김원철이 묻는 말에는 답을 하지 않고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김원철은 그 런 아내의 말을 못 들은 척 대꾸를 하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지적이고 예쁘고. 세련 되고 또 자존심도 강하고... 도 그러면서도 당당하고... 뭐랄까, 아무튼묘한 분위기가 있는 여 자였어요. 마치 큰 사랑을 잃고 난 후에, 인생이 무엇인가를 모두 깨달아버린 듯한 여자 있 잖아요. 슬픈 사랑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예요. 그건 아마 그 여자가 오랫동안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 젖어버리게 된 것일 거예요. 만약 그 여자가 그 동안 앞 을 못 보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멋진 사랑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 여자를 버린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요. 미숙이 아빠 말예요, 앞을 볼 수 없게 된 여자를 버릴 수 있는 남자를 만난 게 그 여자로서는 불행의 시작이엇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정매는 한동안 경옥을 만나고 온 느낌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였다. 김원철은 아내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여러 차례 가슴에 화살이 박히는 듯한 아픔과 가책을 느꼈다. "어쩌면 앞을 보지도 못하는 여자를 버렸을까요? 더구나 아이까지 딸린 여자를요. 암튼 남자는 비정한 동물이라더니." 정 매는 미숙의 어머니를 버린 잠자에 대해 그녀 마음대로 상상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김원 철은 피힐 수 없는 가책에 떨었다. 정매는 마치 미숙 엄마를 버린 남자가 김원철 자신이라 는 것을 빤히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기까지 하면서 사뭇 공 격적으로 비난을 퍼부어댔다. "설사 미　이 엄마한테 큰 잘못이 있다고 해도 그래요. 세상 에... 앞을 못 보게 된 여자를 버리다니 그게 어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은 천벌을 받아야 한다구요. 세상에 그런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정매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소리쳤 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런데 당신, 왜 미숙이 엄마 일에 그렇게 흥분을 하고 그래?" "마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요. 당신 같으면 내가 눈이 멀게 되면 버리겠어요?" 아 내가 다그치듯 묻는 말에 김원철은 여전히 비 맞은 동산처럼 칙칙한 얼굴을 하고 씁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순간, 그는 만약 어쩌다가 미숙이 엄마를 버린남자가 바로 김원철 자신이 라는 것을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아내는 비록 상대가 자신의 남편일지라도 그를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이 뻔한 거라는 걸 생각하고 오싹한 두려움을 느꼈다.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 여자한테도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합디다만. 여자 가 꼭 깎아놓은 대리석 인형처럼 생겨갖구 정감이 없어 보이는데다가, 눈빛이 날카롭고 싸 늘해서 남자들이 포근한 마음으로 찾아들고 싶지 않게 생겼습니다. 남자들이란 아이나 어른 이나 똑같이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줄 모성애 같은 사랑을 지닌 여자한테 이끌리지 않아요? 그런데도 미숙이 엄마한테는 그런 포근한 느낌이 없더라구요 여자끼리라도 그런 여자는 별 로 친한 친구가 없는 법이에요. 그런 여자는 늘 외롭겠지요. 미숙이 엄마도 그렇게 보였어 요. 마치 자신의 이마에다 나는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불행하고 고독한 여자 입니다. 그렇지 만 나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라고 써붙이고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정매는 미숙의 엄 마에 대해서 함참 동안이나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김원철은 그대로 식탁에 마주않아서 그 소리를 다 듣고 있기가 싫어서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그는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물고 공허한 기분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지만, 얼핏 경옥이와 헤어지던 때를 돌이켜보았다. 지금에 와서 그는 때때로 경옥이가 그때 외 좀더 억척스럽게 김원철 자신을 붙잡지 않았을까 하고 원망 을 해보기도 하였다. 경옥이가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붙들어주었더라면 지금쯤 두 사람은 헤어져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경옥은 너무 쉽게, 마치 그렇게 되기를 기다라고 있 었기라도 한 것처럼 김원철을 놓아주어 버렸던 것이다. 김원철은 물론 자신의 잘못을 스스 로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는 미숙이 모녀 문제 때문에 마음이 아플 때마다, 얼핏얼핏 왜 그때 경옥이가 좀더 억척스럽게 자기를 붙잡아주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따름이었다. 지금도 그는 그런 생각을 해보면서, 잠시 두 사람이 헤어지던 때를 돌이켜보았 다. 그것은 참으로 돌이켜보고 싶지 않은 악몽과도 같은 과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무렵 김원철 자신은, 사랑은 달콤한 솜사탕이나 일곱 빛깔의 찬란하고 신비로운 무지개일지 도 몰라도, 생활은 냉엄한 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현실적 삶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그녀와 헤어진다는 것을 그렇게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김원철은 지금 도 그가 경옥이와 헤어지면서 그녀에게 던진 말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는 경옥에게, 자 신은 그 동안 두 다리 중에서 한 발을 진흙탕을 밟고 다른 한쪽 발은 햇살에 빛나는 금잔디 를 밟고 서 있었지만, 앞으로는 두 발을 함께 모아 금잔디만을 딛고 살아가겠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드 사람이 함께 불행하게 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행복하게 될 수 있도 록 하자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유차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지금 그는 찬란한 금잔디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비록 두 발로 생활의 풍요로운 금잔디를 밟고 있다고는 해도, 마음은 오히려 진흙탕 속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런 김원철을 경옥은 너무 쉽게 놓아주었다. 그녀는 헤어지면서 앙탈을 부리지도 않았으며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만 김원철에게, "이제 황경옥의 인생은 끝 나고 말아았군요. 그렇지만 원철 씨를 미워할 수는 없군요. 그 동안 저를 아껴주시고 돌봐주 시고 사랑해 주셨던 것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당신을 만 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잊지 않겠어요." 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그 녀의 그 말은 김원철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혀 있다. 그녀의 그 말을 떠올림 때마다 그는 호 비칼로 심장을 후벼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곤 하였다. 김원철은 경옥이가 포근하지 않은 여자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포근하고 정 감이 넘치는 여자였다. 정매가 표현한 대로 깎아놓은 대리석 인형처럼 딱딱해져 버린 것은 순전히 김원철 자신 때문이었다. 그는 경옥이가 앞을 볼 수 없게 된 몸으로 미숙이를 키우 면서, 더구나 사랑까지 잃은 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문득문 득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였다. 경옥은 어쩌면 마지막 그에게 했던 말 그대로, 그녀 자신의 인생은 끝나버렸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목숨을 지탱해 준 것은 미숙 이 때문일 터였다. "아니 당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시죠?" 정매가 거실로 나오 다가 김원철을 보고 입을 열었다. 김원철은 아내가 거실에 나타나서야 경옥에 대한 생각으 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었다. 그는 마치 과거를 배경으로 한 꿈을 꾸고 난 기분이었다. 그러 나 그 꿈의 뒷맛은 결코 활홀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다. 어히려 꿈 속의 고통스러움 이 현실로 이어졌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셨어요?" 아내가 옆에 와서 앉으며 다 시 물었다. 아내의 다그치는 듯한 물음에 김원철은 마치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멀 뚱한 얼굴이 되었다. "피곤해서..." 김원철은 말끝을 얼버무리면서 희미한 눈길로 아내를 보 았다. 아내를 보고 있는 그의 머리 속에는 경옥의 모습으로 다득 찼다. "피곤하시면 반주 한 잔 하시겠어요? 백포도주 한 잔 드릴까요?" "아니... 술보다는 커피를 한 잔 끓여 마시면 좀 나아지던데..." "당신, 저녁 커피는 싫어하시잖아요." "그래도 오늘은 한 잔 마시고 싶어." "커피보다는 포도주로 드세요. 저도 술 생각이 나는데요." "그렇다면 당신은 술을 마시고, 나는 커피를 마시면 되겠구만 그래. 두 사람이 꼭 같은 것을 마실 필요는 없지 않아?" 김원 철은 자신도 모르게 다소 비뚤어진 태도로 그렇게 말하고, 아내한테 너무했다 싶었던지 억 지 웃음을 머금어 날렸다. 그 억지 웃음이 얼마나 어설펐던지 김원철 자신조차도 그런 자신 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부라는 건 뭐예요. 부부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거 아녜요?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게 뭣때문인지 그 의미를 아세 요? 그것은 두 사람이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 속에서 하나가 되는 거랍디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 속에서 하나가 된다고? 마치 유행가의 가사 같은 말을 하는구만." 김원철은 말이 자꾸만 꼬이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그렇다고 그는 지금 그의 아내한테 불만을 퉁겨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게가 있어 보이는 성경 구절이나 무슨 잠언 같은 말 속에만 진리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준비나해!" "아냐, 꼭 엄마하고 같이 가야 해요, 엄마 딸 미숙이의 소원인데 거절하시겠어 요? 오늘만은 제발 미숙이가 하자는 데로 좀 따라줘요, 네?" 미숙이는 엄마에게로 바짝 다 가앉아서는 응석을 부리듯 졸랐다. 경옥이는 그런 미숙이를 향해 쓸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숙이는 10시도 못 되어서 경옥이에게 외출 준비를 하라고 보챘다. 그러면서 경옥이 입고 나갈 옷까지 골라주면서 예쁘게 화장을 하라고 성화를 대기까지 하였다. 경옥 은 그런 미숙이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엄마, 오늘은 엄마 생일이니까, 최고로 예 쁘게 화장을 해요." "너 참 이상하구나, 넌 엄마가 짙게 화장하는 걸 좋아하지 않잖니?" "오 늘만은 예외라구요. 엄마의 생일이니까요. 미숙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멋지게 엄마의 생일 축하를 해드릴 수 있는 날이잖아요." "네가 엄마의 생일을 축하해 주겠다고?" "그래요. 기대하세요." 미숙은 엄마의 목에 물빛 머플러를 매어주고 나서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밖으로 나왔다. 아직 11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미숙은 거듭 시계를 쳐다보며 재촉하 였다. 아빠와 약속한 시간이 되려면 아직 한 시간 반이나 남아 있었는데도, 미숙은 마음이 들썩거려 집에 들어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햇살은 눈이 부셨고 바람도 적당하게 살랑거렸 다. "먼데까지 갈 것 없이, 이 근처에서 자장면이나 먹자."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 모퉁이의 시내버스 정류장에 이르러 버스를 기다리다 말고, 경옥이 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중국집 간 판을 보며 말했다. "안 된다니깐요. 자장면으로 어떻게 엄마의 거룩한 생일 축하가 될 수 있 겠어요? 무드가 있는 근사한 곳으로 모실 테니 저만 따라오세요." "뭐? 무드가 있는곳?" 미 숙의 말에 경옥이 반문하여 쿡쿡 웃었다. "오늘은 아무 말 않고 미숙이가 하자는 대로 따르 기로 약속을 했잖아요?" "너 돈 있어?" "돈걱정은 마세요."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르겠구 나." 생일축하를 받기 위해 억지로 끌려나오다시피 한 경옥은 넉넉한 눈길로 미숙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기쁨이 충만함을 맛보았다. 그들은 버스가 도착하자 손을 잡고 나란히 차에 올 랐다. 그리고 40분쯤 후에 김원철의 근무처인 병원 모퉁이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린 경옥 은 병원건물을 보자 안색이 확 달라졌다. "설마 미숙이 너, 병원으로 아빠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니겠지?" 경옥이 정색을 하고 미숙에게 물었다. "병원에는 왜요? 엄마가 어디 아픈가요?" 미숙은 어른스럽게 수작을 부리며 아빠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 려는 듯, 경옥이보다 훨씬 앞서 병원 모퉁이를 돌아 지하도를 건넜다. 미숙은 한사코 주춤거 리는 엄마를 잡아끌고 경양식 집으로 들어섰다. 고급 양식집에 끌려 들어오다시피 한 경옥 은 식당 분위기에 어리둥절해 하며 되짚어나가려고 몸을 돌려세웠다. 그제야 경옥은 뭔가 이상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미숙은 두 팔로 엄마의 허리를 감싸안고 안으로 떠밀며, 잘생긴 나비 넥타이 종업원 청년에게 예약손님임을 알리고 룸으로 안내를 받았다. "엄마, 오늘은 모 든 걸 나한테 맡겨." 미숙이 엄마를 의자에 앉게 한 다음 어른스럽게 말했다. 김원철이 경양 식집의 룸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약속한 시간보다 5분쯤 늦어서였다. 경옥은 김원철의 모습 을 보고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숙이 쪽에서 엄마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놀랐다. "내가 좀 늦었지? 일요일인데도 길이 막혀서…" 김원철 은 미숙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가 5분쯤 늦은 것은 길이 막혀서가 아 니고, 아내와 두 아이들이 한사코 점심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을 병원 동료들과 긴한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가까스로 빠져나오느라 그리 된 것이었다. 김원철은 자리에 앉아서도 한사코 경옥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듯 미숙이하고만 말을 주고받았다. 그는 미숙이와 한참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는 미숙이와 한참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다가 종업원을 불러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아내와 아이들을 떼어놓고 서둘러 오다보니 목이 탔기 때문이다. "약 간 놀랐겠지? 이건 미숙이의 생각이야." 김원철이 경옥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냐,.엄마.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어요." 미숙이가 재빨리 아빠의 말에 이의를 달았다. "그래, 그렇 다면 미숙이와 아빠의 합작이라고 해두자. 그럼 되겠니?" 김원철의 말에 미숙은 천천히 고 개를 끄덕이며 엄마를 보았다. 그러나 미숙이가 보기에 엄마의 표정은 여전히 석고처럼 단 단히 굳어져 있었다. 미숙은 엄마가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면 어쩌나 싶어 마음이 초조해졌 다. 어떻게 해서든지 엄마의 기분을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숙이가 기특하지?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렇게 초대까지 해주고…" 김 원철이 경옥이의 경직된 표정을 의식하고 애써 미소를 날리며 말하였으나, 경옥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턱끝을 쳐들고 천장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미숙이가 큰소리로 종업원을 불러 주문했던 생일 축하 케이크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남자 종업원이 여러 가지 색깔의 작은 양초가 꽂힌 케이크를 들고 들어와 식탁 중앙에 놓았다. "엄마, 어서 불을 붙여요." 미숙이가 연필 크기의 빨간 색깔 양초와, 그보다 조금 가는 노란 색깔 양초를 엄마의 나이에 맞춰 꽂은 다음, 성냥통을 집어 경옥 앞에 놓으며 말했다. 경옥은 그제야 천 장에서 시선을 돌려 케이크와 미숙이와 김원철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어서요, 엄마. 케이 크에 불을 붙여야죠, 빨리 먹고 싶어서 그래요." 미숙이가 다시 성냥통을 집어서 엄마의 손 에 쥐어주며 말했다. 성냥통을 받아든 경옥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그녀로서는 너무 오 랜만에 김원철과 함께 자신의 생일파티를 갖는 것이 슬펐다. 또한 그런 한편 자신의 생일날 세 식구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기도 했다. 경옥은 생일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가족들이 둘러 앉아서 '해피 버스데이'를 부르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 는 파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그런 주인공이 되고 보니 어쩐지 어색하기만 하 였다. 그녀의 기억으로 지금껏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생일을 떠올리라면, 여학교때 김원철로 부터 처음으로 백합꽃을 선물로 받았던 일이었다. 그날 김원철은 그녀에게 백합꽃을 안겨주 고 나서 시내 제과점으로 데리고 가 빵을 사주었었다. 경옥은 그때 김원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김원철은 그때 경옥에게 소원을 한 가지만 말하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생일선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노라고 했었다. 그 때 경옥은 김원철에게 정말로 소원을 들어줄수 있겠느냐고 거듭 물었었다. 그러자 김원철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보이기까지 하면서 소원을 들어줄 자신이 있다고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던가. 경옥이가 생각하기에 김원철은 그녀의 생일을 위해 며칠밤 방범 야간 순찰 아르 바이트를 하였을 듯싶었다. 그러나 그때 경옥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소원을 말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김원철은 돈이 들지 않는 것이라면 더욱 자신 있다고 장담했었다. 경옥은 그 녀의 생일소원으로 김원철에게 들길을 함께 거닐면서 휘파람을 불어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원철은 이내 풀이 죽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제발 그것만은, 휘파람을 불어달라고 하 는 것만은 취소해 달라고 하였다. 김원철은 그때까지만 해도 휘파름을 불지도 못했고 자전 거도 탈 줄을 몰랐던 것이다. 경옥은 취소할 수 없다고 떼를 쓰다시피하여 김원철과 함께 송정리 둑길을 거닐게 되었고, 그에게 휘파람 부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그때 경옥이 가 김원철에게 가르쳐준 휘파람 곡은 '그린필드'였다. 그후 김원철은 경옥이보다 휘파람을 더 잘 불게 되었다. 경옥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싱긋이 웃었다. 미숙이와 김원철은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경옥은 성냥을 그어 케이크에 박힌 초에 불을 붙였 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휘파람을 불 듯 입바람을 만들어 불을 껐다. 그러자 김원철과 미숙 이가 손뼉을 쳤다. "엄마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불을 껐어요." 미숙이가 경옥이를 놀려대자 그녀는 얼핏 웃는 얼굴로 김원철을 보았다. 그녀 생각에 김원철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웃고 있는지 모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김원철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역시 경옥이한 테서 휘파람을 배우던 때의 기억이 마른 번갯불처럼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네 엄마 휘파 람 잘 부는 것 모르냐? 네 엄만 남자들보다 휘파람을 더 잘 분단다." 김원철의 말에 경옥은 갑자기 목울대가 훗훗해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아,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아직도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있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그녀는 그때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김원철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즐거운 생일파티였다. 경옥에게는 참으로 감격 적인 자리였다. 처음에는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었는데, 김원철에게 휘파람을 가르쳐주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경직되었던 감정이 흥건하게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식 으로 커피를 마신 다음, 먹다 남은 케이크를 상자에 넣어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나란히 어 깨를 마주하고 룸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김원철의 자동차에 올랐다. 다름 사 람들의 눈에 그들은 행복한 가족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러니까 김원철이 경 옥 모녀와 함께 다정하게 고급 양식집에서 나와 자동차에 오르는 모습을 놀라운 눈으로 지 켜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원철의 부인 정매였다. 정매는 그때, 남편이 점심약속이 있다면 서 서둘러 집에서 나간 다음, 부산에 사는 대학 동창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약속을 했다. 그 리고 그 친구와 함께 경양식집 '또와'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막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참 이 었다. 남편을 따라 포항에 가 있다가 일주일 전에 다시 부산으로 옮겨왔다는 동창한테 전화 를 걸어 만나자고 했더니,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하여 남편과 두어 차례 가본 적 있던'또와' 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약속시간보다 5분쯤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정매는 남편이 미 숙이 모녀와 함께 룸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발견한 정매는 처음엔 아는 체를 하려다가 얼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세 사람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 졌던 것이다. 정매의 눈에 비친 그들의 분위기는 영락없이 행복한 가족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외식을 시켜달라는 아이들의 청을 거절하고 동료들과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서둘러 나갔던 남편의 행동을 떠올리는 순간, 정매는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혔다.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정매는 그들이 층계를 내려 가자 재빨리 창 옆으로 다가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차에 오른 미숙이 엄마는 남편의 옆자리 에, 미숙이는 혼자 뒷좌석으로 가 앉는 모습이 보였다. 세 사람이 다정스럽게 차를 타고 가 는 것을 보면서 정매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정매는 가까스로 자리로 돌아와 냉수 한 컵 을 순식간에 들이켰다. 그때 친구가 들어와 마주앉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정매는 떨려오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넋을 잃은 얼굴로 멀뚱히 창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매 어디 아 프니? 왜 그러니?" 동창생이 다급하게 물었으나 그녀는 대꾸를 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녀는 동창생이 묻는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니면 그냥 건성으로 막연히 대답을 할 뿐이 었다. 정매는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녀는 친구한테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고, 휘 청거리는 마음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 다정하게 룸에서 나오는 모 습이며, 세 사람이 가족처럼 자연스럽게 차에 오르는 장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게 다가 미숙이는 마치 딸처럼 남편의 팔을 붙잡고 매달리지 않았던가. 너무도 큰 충격에 정매 는 심장이 심하게 떨렸다. 그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면서 마음속으로 아니라는 말을 거 듭 되뇌고 있었다. 설마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평소 그녀의 직감은 섬뜩하리 만큼 정확하지 않았던가. 머리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줄기를 뻗었다. 상상은 끝이 없었다. 무수한 가지를 뻗은 상상들이 모두 현실로 살아서 그녀를 난도질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참 담해졌다. 온몸에 기력이 빠지면서 아무대나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집에 돌아온 정매는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샤워를 하고 속옷까지도 갈아 입은 다음, 커피를 두 잔씩이나 끓여 마셨다. 남편은 3시가 넘고 5시가 다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한테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녀의 생각은 자꾸만 비약하였다. 그녀 자신조차도 비 약하는 그 생각들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 자신이 남편을 속이고 살아왔던 것처럼, 그녀 또한 남편한테 속으며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온몸 의 피돌기가 멎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정매는 덜컹거리는 마음으로 시계를 지켜보며 남편 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남편의 얼굴을 대하기가 두려워지 기까지 하였다. 그녀는 갑자기 남편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김원철이 아파트에 돌아온 것은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점매는 남편이 돌아온 것을 알면서도 벽을 향해 모로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선 남편이 아이들한테 엄마의 행방에 대해서 묻고 있는 소 리를 들으면서도, 그녀는 어둠이 덮여오는 방의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당신 어디 아픈거야? 아니, 불이나 좀 켜고 누워 있을 것이지, 원." 김원철이 방안으로 들어와 불을 켜 면서 말했다. 정매는 여전히 벽쪽을 향해 잠든 척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김원철은 정매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는 것이었다. "열은 없는데 그래?" 김원철 은 오래도록 그녀의 이마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제야 정매는 남편의 손을 떼내고 나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남편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 보았다. "여보, 내가 좀 늦 었지? 닥터 조가 한사코 놔주지 않아서 겨우 도망쳐 왔다니까. 아마 다른 동료들은 닥터 조 집에 가서 마작을 할거야." 김원철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정매는 그런 남편의 얼굴을 징 그러운 다족류의 벌레 바라보듯 슬프고 참담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래요? 그럼 당신도 더 계시다 오지 그랬어요?" 정매는 되도록 이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면서 말했다. 그 녀는 남편이 숨기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따져묻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너무 비참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닥터 조한테 붙잡혔다 하면 날새긴데? 그래도 괜찮겠어?" 남편이 반문하자 정매는 씁쓸하게 웃었다. 갑자기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정매는 자신의 머 리를 거칠게 몇번 뒤흔들고 나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자 김원철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가 느끼기에 아내의 기분이 매우 얹짢아 보였다. "저녁 지어야겠어요. 오늘은 파출부가 오지 않는 날이에요." 정매는 냉정하게 말하고 남편의 손을 뿌리쳤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정매는 남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두어 숟갈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냥 식탁에 멀 뚱하게 앉아 있기만 하였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마주보기조차 두려워 되도록 시선을 멀 리 던졌다. 그녀는 남편의 입에서 미숙이 모녀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기 전에는 절대로 그날 낮에 보았던 것을 스스로 입밖에 내놓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원 주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였다. "열은 없는데 어디가 아픈거지? 당신 혹시 꾀병아냐?" 밥그릇을 비우고 나서 숭늉으로 입안을 헹군 다음 김원철 이 뚜벅 입을 열었다. 정매는 남편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동안 여러차례 낮 에 경양식집 '또와'에는 뭣 때문에 갔었느냐고 따져 물으려다 애써 참았다. 그러나 그것을 참는것도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참, 닥터 조한테서 전화 왔던데요?" 정매는 한참 이나 망설이다가 남편을 곯려주고 싶은 생각에서 끝내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러고 나서 남편의 표정을 어쭙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닥터 조라니?" 김원철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아차, 들통이 나고 말았구나 하는 얼굴빛이 되었다. "마작을 하기로 했다는 닥터 조 말이에요 조금 전에 헤어졌다면서요?" 정매는 그렇게 따지듯 반문하고 나서 곧 후 회하였다 괜한 짓을 했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닥터 조가? 무슨…일로…?" 김원철은 참으 로 궁색한 표정이 되어서 한사코 정매의 시선을 피했다. 정매는 그런 남편의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전화해 보세요. 당신이 들어오기 한시간 전쯤에 전화가 왔었으니까요. 닥터 조 오늘 당직근무라고 하던데요?" 정매는 그렇게 말하고 날카롭게 남편을 찔러보았다. 김원철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괜스레 온몸을 들썩거렸다. "여보 미안 해. 실은 말야…" 김원철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는 여지껏 아내한테 거짓 말을 하여 이와 같은 곤혹스러움을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변명하지 않아도…" "아냐, 변명이 아니야. 실은 오늘…" 김원철은 말끝을 흐리면서 다음 말을 잇지 못하였다. "실은 말야… 고등학교때 친굴 만났어. 어려서부터 같은 고아원에 있던 여자 친군 데 부산에 다니러 왔다가…" 정매는 남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섰다. 정매는 남 편이 끝까지 그녀를 속이고 있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남편을 쏘아 보았다. "고아원에 같이 있었던 여자친구라고요?" "그렇다니까. 어제 병원으로 전화가 왔더 구만. 오빠네 집에 왔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정매의 날카로운 물음에 김원철은 궁색하게 웃어보이며 말끝을 흐렸다. 순간 정매는 미숙이라는 아이의 엄마가 바로 고아원에 함께 있 었던 친군가요? 하고 재우쳐 물으려다가 참았다. "당신 내 말을 못믿는구만." "못 믿긴요. 믿지요. 믿고 말고요. 언제 내가 당신을 의심해 본 적이 있었나요? 당신이 절 믿고 있듯이 저도 당신을 믿지요. 당신도 그것을 잘 아실 텐데요?" 김원철은 아내의 예민한 말에 한동안 대꾸를 못하고 멀뚱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 그 여자는 떠났어요?" "응, 나와 헤어져서 곧 장 터미널로 갔으니까." 남편의 대답에 정매는 다시 쓴웃음을 날렸다. 김원철은 아내의 쓴웃 음에서 아내가 무엇인가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순간 김원철의 뇌리에 최지훈이라는 남자의 이름이 화살처럼 박혔다. 아내가 김원철 자신에게는 최지훈과의 관계 에 대해서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고 있으면서, 자신과 미숙이 모녀와의 일에 대해서는 불신 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날 밤 정매는 남편과 같은 침대에 나란히 살을 맞대고 누워있으면서도, 결코 미숙이 모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따져묻지 않았 다. 김원철 또한 끝내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들 부부는 상대의 숨결을 가깝게 느끼고 체온을 의식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매는 정매대로 미숙이 모녀에 대한 생각 을 떨쳐버릴수가 없었으며, 김원철은 김원철대로 아내와 죽은 최지훈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 를 추적하는라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 두 사람은 자신의 결점이나 잘 못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고, 상대가 비밀을 털어놓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배신감을 느끼고 각기 불신의 칼을 날카롭게 갈았다. 정매는 만약 남편이 미숙이 모녀와의 관계가 불 륜으로 맺어진 것이라면 남편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한낱 상상이 아니고 사실이라면, 남편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남편과 미숙이 모녀와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매는 그 생각 때문에 파도처럼 몸을 뒤척이 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입을 통해서 진실을 밝혀내기는 어려운 일일 터였 다. 정매는 밤새도록 몸을 뒤척이며 골똘하게 머리를 쥐어짰다. 다음날 아침 정매는 서둘러 외출을 하였다. 처음엔 미숙의 엄마를 찾아가서 직접 따져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 것은 자존심이 허럭하지 않아 다른 방법을 쓰기로 하였다. 그녀는 미숙이를 먼저 만나서 넌 지시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숙이네 학교까지 찾아가는 게 그리 모양이 좋지는 않을 듯싶어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정매는 비열한 짓인 줄 번연히 알면서 도 남편의 서재에 들어가서 책상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혹시 남편의 서재에서 무슨 단서라 도 잡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몇 시간 동안 남편의 서재를 뒤진 끝에, 그녀는 남편이 대학시절에 공부했던 의학서적의 갈피에서 빛 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발견 했다. 그 사진은 남편과 미숙의 엄마가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둑길에서 나란히 찍은 것 이다. 작업복 차림의 남편은 교복을 입은 미숙 엄마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그 낡은 사진 을 찾아낸 정매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방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손에 들고 있던 퇴색한 사진을 찬 찬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의 두 사람 표정에서 정매는 뜨거운 감정의 교류를 읽을 수 있 었다. 그리고 두사람의 감정은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는 것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정매는 이 제 남편으로부터 다른 변명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남편과 미숙엄마와의 관계는 퇴색된 그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보았다. 이제 그녀는 남편이 미숙이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고 있는 연유를 알게 되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 간, 그녀의 머리에 미숙이의 존재에 대한 의문부호가 총알처럼 박혀왔다. 그렇다면 미숙이가 남편의 핏줄? 남편이 미숙이의 생부? 의문부호는 그녀의 머리 속에서 계속 확대되어 갔다. 결국 정매는 미숙이와 남편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예감은 여러 줄기 의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미숙이는 남편의 핏줄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서기에 이르렀다. 잠시 후 정매는 다시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의 책갈피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이제 는 자신의 비열한 행위에 대해서 모멸감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이미 남편과 헤어 질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굳힌 터였다. 남편의 책 속에서 미숙 엄마의 사진은 더 이상 나오 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책을 온통 서재바닥에 늘어놓은 채 남편과 미숙엄마가 나란히 찍 은, 퇴색한 흑백 사진을 손에 들고 침실로 돌아와 침대 위에 엎드렸다. 그녀는 한동안 분노 와 배신감과 슬픔이 뒤범벅된 감정으로 흐느껴 울었다. 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자신 을 배반한 남편과 얼굴을 맞대고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정매는 날이 어두워 질때까지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는데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 녀는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이 뜨거워 냉수만 여려 차례 들이켰다. 심한 조갈증과 함께 온 몸의 기력이 쫙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고심 끝에 정매는 남편에게 미숙 엄마와의 관계를 따 지지 않기로 하였다. 따져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매는 남편과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헤어질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녀 혼자 힘 으로 미숙이가 남편의 핏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혼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었다. 정매는 문제의 퇴색한 사진을 발견한 지 사흘 후, 미숙이가 다 니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 담임선생님과 통화를 하였다. "여기는 불우한 아이들을 도와주는 교회 봉사단체인데요. 미숙이라는 학생의 집을 방문하고 싶어서 그러니 주소 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매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 앉히고 물었고, 쉽게 미숙이가 살고 있는 집 주소를 알아냈다. 정매는 다음날 오전, 미숙이네 집을 찾아나섰다. 미숙이 엄마가 근무하는 맹인 도서관으로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미숙이 모녀가 사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집 으로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집에서 나온 지 두 시간 만에 가까스로 미숙이네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정매는 한참 동안이나 대문 밖에서 미적거리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집 안 으로 들어갔다. 혹시 미숙이 엄마가 도서관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망설였으나, 차라리 미숙의 엄마와 마주치게 되면 직접 따져보겠다는 생각으로 대문 안으로 뚜벅 들어선 것이다. 낯선 방문객을 발견하고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노파가 천천히 일어섰다. "미숙이네 아무도 없나요?" 정매는 마음을 가다듬고 수돗가로 다가서며 노파에게 물었다. 노파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있는 정매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뉘싱교? 미숙이는 학교에 갔고, 미숙이 엄마는 직장에 갔지예."라고 말하였다. "아,예. 저는 교회에서 왔는데요, 미숙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나요?" "저녁 나절에나 돌아올 낀데.… 근데 교회 에서 무신 일이싱교?" "미숙이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려야겠네요. 교회에서 미숙이네를 돕 기 위해서 왔거든요." 그러면서 정매는 미숙이네 모녀가 세들어 살고 있는 방으로 짐작되는 문간방 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방문에 열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미숙이를 꼭 만나보고 가야만 하거든요. 교회에서 미숙이를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선발해서 보내려고…" 정매는 집안에 노파 한 사람만이 있음을 알고 미숙이네 사정을 소상하게 물어볼 생각이었 다. "미숙이를 교회에서 중핵교에 보내준다꼬 했능교?" "예, 미숙이네 가정 사정이 딱하다기 에… 그 애한테는 아빠도 없고…" 전매는 '그 애한테는 아빠도 없고…' 하는 말에 힘을 주 며 얼핏 노파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노파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게 돌리 고 멀뚱한 눈빛으로 정매를 보았다. "아빠가 없다니 무슨 말잉교?" "그럼 미숙이한테 아빠 가 계신가요?" "계시고 말고예.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온다 아닙니꺼." "일주일에 한 번씩 요?" "미숙이 아빠는 병원 의사라 카이." "의사라구요?" 순간 정매는 비명을 지르듯이 큰 소 리로 반문하였다. 노파는 정매의 그 같은 목소리에 놀라 이상한 눈으로 낯선 방문객을 되작 거려 살펴보았다. "와 그리 놀라싱교?" "아, 아닙니다. 미숙이한테는 아빠가 계시지 않은 줄만 알고…" 정매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뻔하였다. 그녀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정신을 팽팽하게 가다듬었다. 주인 노파에게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 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노파의 눈에 비친 정매의 웃음은 오히려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미숙이의 아빠가 근무하는 병원 이름을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저… 할머니, 이것 좀 미숙이네 방에 들여놓고 가겠습니다." 한참 후에야 다시 정신을 수습한 정 매가 과일 꾸러미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노파는 여전히 이상한 눈빛을 풀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여 보이며 턱끝으로 미숙이네 방을 가리켰다. 정매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휘 청거리는 다리를 애써 가누며 문간방 쪽으로 걸어가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선물 꾸러미를 든 채 방문을 열고 서서 오랫동안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여학생의 자취 방처럼 아담하고 조촐하게 꾸며진 방에는 자그마한 장롱과 앉은뱅이 책상이 놓여있을 뿐 경 대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장롱 위에는 이불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한 묶음의 백합꽃이 눈길을 끌었다. 미숙이네 모녀가 살고 있는 방안을 둘러보던 정매는 갑 자기 한 곳에 시선을 못박은 채 온몸이 허물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앉은뱅이 책상 맞 은편 벽에 남편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았던 설마 하는 기대가 와그르르 무너지면서 온몸에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분노에 떨었다. 순간 정매는 방문을 그대로 열어둔 채 들고 왔던 과일 꾸러미를 팽개 치듯 방안에 던지고 대문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긴 골목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리고 큰길에 나와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집에 돌아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정매는 혼자 정신없이 거리를 쏘다니다가 밤이 깊어서야 휘주근 하게 기운이 빠진 몰골로 비틀거리며 아파트로 돌아왔다. 일말의 기대마저 허물어저버리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인과응보라는 말을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그녀 자신이 그 업보를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녀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면서 머 리 속에 미숙이의 모습을 수없이 그려보았다가 다시 지우곤 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미숙이의 얼굴을 그려볼 때마다 원주의 모습도 함께 그려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원주에 대한 비밀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처럼, 남편 또한 미숙이라는 존재를 알뜰하게 숨겨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필연적인 인과응보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파트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을 때, 그녀는 머리속이 너무 어지러워 몸을 가누기조차 힘 들었다. 그녀의 지나온 삶이 한줌의 연기처럼 흩어지면서 모든 의미를 상실해 버린 듯싶었 다.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마음이 너무 허전하여 심신이 비틀거렸다. 똑바로 서 있 을 수조차 없었다. 어디에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알뜰하게 가꾸어온 삶에 대한 꿈도 희망도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행복을 위해 고통을 참고 살아왔던 과거의 시간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지금 남편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입장으로서 는 남편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배반당했다는 생각보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체념했다. 이제는 피차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순간 그녀는 죽음을 생각 했다. 그만큼 그녀는 절망의 한가운데에 갗혀 있는 심정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뿐 이었다. 울고 싶도록 아쉽고 허무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의 철재 벽에 몸을 기대고 서서 마 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반쯤 눈을 감은 채 절망이라는 단어를 몇번이고 되씹어보았다. 그것 은 너무 쓰디쓴 고통의 즙과도 같은 뒷맛을 남겨주었다. 정매는 순간 그녀 자신이 살아왔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게 여겨지는 삶의 궤적을 통하여, 이처럼 쓰디쓴 절망감을 몇 번이나 맛보았던가 돌이켜보았다. 최지훈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처녀의 몸으로 최지훈의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이처럼 정신이 혼몽할 정도의 절망감을 맛보지는 못하였던 것 같았다. "아니, 당신 왜 이래? 어디 아픈 거 아냐?" 정매가 가까스로 몸을 가누 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자, 아내를 기다리고 있던 김원철이 문을 열어주다 말고 정매를 부 축하여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 소식도 없이 어디 갔었어? 얼마나 걱정 했다고. 당신 지금껏 연락도 없이 이렇게 늦어본 적이 없었잖아?" 김원철은 정매를 부축하 여 현관 안으로 들어서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거듭 물었다. 그러나 정매는 한마디의 대꾸 조차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뿌리치다시피 하며 침실로 들어가 옷도 갈아 입지 않고 투신하듯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느냐니까?" 김원철은 아무래도 아내 의 행동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침실로 따라 들어와서는 거듭 물었다. 그러나 정매는 여전 히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두세요. 몸이 아파서 그러니까요." 정매는 침대 위에 누운 채 고개조차 들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내쏘았다. 그러나 김원철은 방에서 나가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손으로 아내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는 밤늦게 들어온 아내가 무엇 때문 에 기력이 떨어져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신경질을 부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러면서도 그는 은근히 마음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 김원철은 아내가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미숙이 모녀 때 문에 이렇듯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하였다. "살고 싶지도 않아요." 정매는 그러면서 얼굴을 침대에 파묻고는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왜 그 래? 당신 며칠 전부터 왜 이러는 거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도 대답조차 않고 말야. 답 답해서 견딜수가 있어야지. 내가 뭐 당신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어?" 김원철이 격렬하게 들 먹거리는 아내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어르듯 말하였다. 그러 자 정매는 갑자기 얼굴을 들고 원망의 눈으로 김원철을 쏘아보았다. 그 눈길이 얼마나 싸늘 하고 날카롭던지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김원철은 아내의 그 같은 눈길에서 원망과 증오 와 한탄과 아쉬움이 한꺼번에 무섭게 타오르는 듯한 눈길이었다. 아내가 그런 눈길로 자신 을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잘못한 게 없느냐고요?" 정매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날카 롭게 따져물었다. "지난번 내가 고아원에 같이 있었다는 여자 친구를 만났기 때문이야? 당 신 그 일로 나를 오해하는거 아냐?" 김원철은 그까짓 일을 가지고 왜 아이들처럼 투정이냐 는 듯한 눈으로 아내를 보며 푸실푸실 웃기까지 하였다. "고아원에 같이 있었다는 여자친구 라구요?" "그래, 그 여자 때문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니까 그래." 정매가 다시 돌멩이를 던지 듯 물었고, 김원철은 여전히 비굴할 정도로 능청스러운 웃음을 얼굴 가득 흘린 채 슬그머니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정매는 거칠게 남편의 손을 뿌리쳤다. "정말 당신 뭣 때문에 이 러는거야?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속시원하게 말해보라고." 예기치 못한 정매의 갑작스러운 냉갈령에 김원철은 다소 놀란 듯한 얼굴로 아내를 보며 매달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러 자 정매는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녀는 미숙이 모녀의 일을 따지지 않기로 결심해 놓 고는 남편한테 도전적인 태도를 보였던 자신을 나무랐다. 캐묻고 변명하고 탓하고 울부짖는 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모든 것이 끝났어. 서로의 상처를 까발리 지 말고 그냥 덮어둔 채로 여기서 끝내는게 좋아. 정매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당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신경쓰지 말아요." 정매는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말하며 얼굴을 침대에 묻었다. 정매는 결심했던 대로 끝내 남편에게 미숙이 모녀에 대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 는 혼자 절망과 고통속에 갇혀 있었다. 혼자 번민과 절망감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마음속으로는 남편과 헤어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그렇게 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번민을 끌어안고 괴로워할 뿐이었다. 정매는 나흘째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기력이 빠진 채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밥도 먹지 않았다. 그런 아내를 대하는 김원철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처음 며칠은 아내한 테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듯 싶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일상적 으로 출퇴근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김원철은 아내가 육신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내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마음의 병이 무엇 때문인가 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무엇 때문에 심정을 끓이고 있는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 로 그녀에 대한 모든 관심을 의식적으로 거두어들였다. 그 때문에 그들 부부 사이에는 깊고 도 싸늘한 침묵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침묵은 두 사람 모두를 더욱 괴롭게 하였을 뿐이 었다. 김원철은 김원철대로 정매는 정매대로 그 괴로움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김원철 쪽에서 더 못 견뎌 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아내가 미숙이 모녀에 대한 비밀을 알아 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경우에도 아내한테 그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리라 결심했다. 침묵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그들 가정에는 냉기류가 흘렀다. 두 아이들마저도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 침묵 속에 웃음 소리 또한 사라졌다. 부부 사이의 깊고도 무거운 침묵이란 결국은 두 사람 모두에게 무서운 고통을 줄 뿐이었다. 침묵의 시간들은 삶이 아니라 죽음처럼 답답했다. 마치 어둡고 답답한 무덤 속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을 차라리 무서운 형벌이었다. 그들 부부는 그것 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먼저 그 무서운 침묵을 깨뜨리려고 하지 않았다. 정매 쪽에서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 대문에 홀맺힌 마음이 쉽사리 풀리지 않았으며, 김원철은 또 김원철대로 아내가 엄청난 과거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근거도 없이 그 자신 을 탓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은 슴기려고 하면서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는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만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더욱이 김원철은 처음 아내의 비밀을 알았을 때만 해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지금은 최지훈이 죽고 없는 마당이라,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덮어두기로 했었다. 그런데 아내가 그와 미숙 이 모녀와의 관계를 자꾸 헤집고 나서면서부터 잔뜩 심사가 뒤틀려 있는 것을 보고 그 또한 생각이 바뀌었다. 원철은 아내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의 심경은 언제 폭발할지 모를 정도로 예민해 있었다. 누구인가 자극적인 한마디만 던지게 된다면 그들은 순간에 폭발하고 말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박문호한테서 정매에게 속달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를 받 아본 정매는 크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박문호의 편지를 읽고 나서 서둘러 세수 를 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하동으로 가서 박문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박 문호가 아니면 지훈의 어머니라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그녀는 가슴 이 마구 뛰었다. 손이 너무 떨려서 스커트의 지퍼를 올리는 데에도 힘이 들었다. "저 오늘 친정에 좀 다녀와야겠으니 우리 아이들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렇게 말해 주세요" 정매는 파 출부 아주머니에게만 말하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아파트를 나섰다. 파출부가 병원으로 전 화라고 하고 가라 하였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정매가 박문호의 편지를 받자마자 허겁지겁 아파트를 나왔을 때는 어느덧 봄날의 하루해가 설핏하 게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을 빠져나가고 있을 즈음에는 어 느덧 햇살은 잠들고 하늘이 회색빛으로 두꺼워졌다. 그녀는 갑자기 숨이 차올라 안전벨트를 느슨하게 늦추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박문호의 편지 글씨들이 살아 있는 징그러운 벌레들 처럼 그녀의 몸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편지의 내용이 그녀의 심장을 아프 게 후벼파는 듯하였다. 박문호의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지훈이 어머님께서 끝내 원주를 찾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제가 아무리 사정을 해보았으나 죽기 전에 손자를 되찾겠다면서 고집을 부리시니 이제 제 힘으로는 안 될 것 같기에 이렇게 알려드리 는 것입니다. 빨리 오셔서 대책을 강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능하시다면 토요일쯤에 한 번 내려오시지요 토요일엔 저도 일찍 집에 가 있겠습니다. 정매 씨가 잘 설득을 하신다면, 지훈 어머니께서 소승을 취하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동에 오시는 데로 먼저 저한테 연락 을 주십시오. 정매는 박문호의 편지 내용을 머리 속에 굴려보았다. 그러고 나서 한숨을 몰아 쉬면서 눈을 감았다. 설마 하고 생각했던 것이 끝내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그 녀는 자신이 법정의 증언대에 오르는 장면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를 믿 었던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모두들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을 것만 같았다. 원 주의 팔을 하나씩 붙들고 지훈 어머니와 정매 자신이 힘껏 잡아당기는 장면이 머리에 떠오 르자 그녀는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그녀는 거칠게 고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버스가 하동에 도착하자 그녀는 우선 박문호의 집에 전화부터 걸었다. 마침 박문호는 학교에서 돌아와 집 에 있었다. 그의 말로는 정매가 올 것 같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곧 나가겠으니 터미널 옆에 있는 다방에서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정매는 박문호와 약속한 다방으로 들어가서 커피를 두 잔씩이나 시켜 마셨다. 갑자기 심한 조갈증으로 목구멍에 불 이 붙은 듯하였다. 커피를 두 잔씩이나 시켜 마셨는데도 목이 타 다시 냉수를 시켰다. 그녀 는 냉수를 들이켜면서 목이 타는게 아니고 마음이 타고 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박문호 가 나타난 것은 밤 9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그 사이에 그녀는 친정에 전화를 하여 두어 시간 후에 들어가겠노라고 말해두었다. "저녁은 우쨌능교?" 박문호는 마주앉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정매는 물론 저녁을 먹지 않았다. 저녁뿐 아니라 아침에 우유 한잔을, 그리고 조금 전에 커피를 두 잔 마셨을 뿐이었다. "저녁은 우쨌능교?" "먹었어요." 정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박문호에게서 자세한 경위를 듣기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었다. 정매는 박문호가 그녀에 게 부쳐온 편지의 내용에 대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물론 대충 짐작하고 있기는 하였다. 편지에서 박문호가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그녀는 보다 자세한 내용 을 알고 싶었다. "편지 받고 대강은 짐작을 했겠습니다마는, 지훈이 어머님께서 끝내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심더. 마, 지가 그렇게도 사정을 했는데도 듣지 않은 기라요. 그래 혼자 하 도 답답해서..." 박문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마치 일이 그렇게 된 것이 자신 의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지훈 씨 어머님이 우리 원주를 찾아가겠다고요?" "지 힘 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는 기라예." 박문호의 말에 정매를 한동안 잠자코 창문 쪽에 막연한 시선을 던졌다. 이제는 막다른 길에 이른 기분이었다.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원주 를 지훈이 어머니한테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더욱 괴로웠다. "참말로 미안합니데 이. 내가 그 동안 얼매나 사정을 했는데''' 그래도 내 말을 듣지 않으시니 내도 우짭니꺼. 지 훈이 어머님 아주 딴사람이 되부렀다 이거라요. 옛날 지훈이 어머닌 이 박문호의 말이라 카 믄 콩으로 금을 만든다 캐도 다 믿어줬다 아닙니꺼. 헌데 그 나이에 노망을 해삐맀는지 아 주 딴사람으로 변해 부러갖고는 이 박문호의 말이라 카믄 듣는 시늉도 안 하신다 이겁니더, 그라이 내 생각 같아서는 정매 씨가 한번 지훈 어머님을 만나보시고 사정을 해보시는 것이 으쩔까 해서..." "지훈 씨 어머님께서 몸이 편치 않다고 하시던데 요사이는 좀 어떠십니까?" 정매가 묻는 말에 박문호는 대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여물고 답답한 심정을 나타내 보이려 는 듯 서너 차례 푸푸 연기를 뿜어 날리더니, "지훈이 어머님을 만나보시는 것이 으쩌겠심 니꺼? 내 생각으로는 지금 당장에 만나보시고 결판을 내시는 것이 좋겠는데" "결판을 내다 니요?" "내 생각에는 오늘 밤 정매씨가 지훈이 어머님허고 같이 주무시는 것이 좋겠다 이거 로구만요. 내 말은 뭐냐 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설득을 해보시라 이거 아닝교 이번에 설득을 몬하시면 참말로 큰일 벌어지게 생겼다 아입니꺼. 이 일이 재판에 붙여지면 큰 난리가 아닝 교?" 박문호는 진심으로 정매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는 지훈이가 살아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지훈의 어머니에게도 그런 말을 했 다. 지훈이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랬더니 지훈의 어머니는 지훈이가 꿈 속에서 아들을 찾아달라고 울부짖더라고 하였다. "지금 지훈 씨 어머님을 만나뵈러 가겠어 요." 그렇게 말하고 정매가 먼저 일어서자 박문호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정매는 박문호와 함께 지훈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밤 10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그날 밤 친정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전화를 해주려고 지훈 어머니가 사는 동네에 이르러 공중전화가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변두리라서 그런지 공중전화 가 눈에 띄지 않았다. 박문호가 정매의 심중을 알아차리고 길 건너쪽에 있는 공중전화를 손 으로 가리켰다. 정매는 친정에 전화를 걸어 기다리지 말라고 말했다. "문호 씨는 그만 돌아 가세요." 지훈 어머니가 사는 집 앞에 이르자 정매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박문호는 정매 가 혼자서 지훈 어머니를 만나보겠다는 말에 약간 놀라는 듯 싶었다. "저도 지훈 어머니한 테 드린 말씀이 있어서 잠깐 뵙고 갔으면 싶은데요." "아닙니다. 저 혼자 뵙고 싶어서 그래 요, 그래야 오히려 일이 잘 풀리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문호 씨 말마따나 저 오늘 밤 여기서 잘 겁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설득을 할 겁니다. 내일 제가 댁으로 전화하겠어요. 자, 어서 그 만 돌아가세요" 정매가 거듭 말했으나 박문호는 좀처럼 발김을 돌려세우지 않았다. "저어... 정매 씨, 오늘 밤 말입니더. 지훈이 어머니한테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시이소 그 노인네 불쌍 하기는 해도 딱 잘라 말하시이소 원주는 지훈이 핏줄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이시소. 그래야 다시는 손자 찾겠다고 하지 않을 거라요." 박문호가 정매한테 당부하듯 말하였다. 그러자 그 녀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실소를 날렸다. 그녀는 박문호에게 그렇다면 왜 지훈 어머니한 테 소송을 하면 손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해주었느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 제 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돌아가세요." "여기까지 왔으니 지도 잠깐 들어가 볼랍니더." " 아 닙니다. 그냥 돌아가 주세요." 정매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박문호가 몸을 돌려 세우기를 기 다렸다. 박문호는 한참동안 그대로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돌아섰다. 정매는 지 훈이 어머니가 세들어 살고 있는 집의 함석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박문호가 돌아가 고도 10분쯤 지나서야 대문을 두드렸다. 집 안에서, "당신잉교?" 하는 툭박진 아낙의 목소리 가 쏘아붙이듯 퉁겨져나왔다. 정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옆방 할머니 좀 만나러 왔다고 말 하였다. 그러자 잠시 후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나며 함석 대문이 열렸다. 그녀는 집주인 아주 머니에게 간단히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지훈 어머니가 세들어 살고 있는 모퉁이 방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방문 앞에 서서 헛기침을 하면서, "계십니까?" 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인 기척이 없더니 조금 뒤 빠끔히 방문이 열리고, 지훈 어머니의 얼굴이 어둠 속에 드러났다. 지훈 어머니는 처음에 정매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밤중에 정매가 찾아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야 지훈 어머니는 정매를 알아보고 소스라치듯 놀랐다. 형광등 불빛에 비친 지훈 어머니의 얼굴이 이 날따라 찔레꽃잎처럼 희고 창백해 보였다. 얼 핏 넘겨다본 방안 분위기조차 을씨년스러웠다. "그 동안 편안하셨어요?" "으쩐 일로 이르 케..." 지훈 어머니는 약간 당황해 하는 얼굴로 정매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정매를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 는데도 스스럼없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부산에서 오는 길입니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가도 되겠지요?" 정매는 거리낌없이 지훈이 어머니를 마주보고 다가앉았다. "뭐라꼬? 여기서 자고 간다꼬?" 지훈 어머니가 약간 놀라는 눈빛으로 정매를 보며 반문했 다. "네, 왜요? 싫으세요?" 지훈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원주는 잘 있능교?" "네, 원주는 잘 있어요. 그런데 저한테 말씀 올리지 마시라니까요. 말씀 편하게 내리세요." "원주 그노마, 이 핼미 말 안 하등교?" 지훈 어머니는 여전히 정매에게 말을 내리지 않았다. "별 로... 아이들이란 다 그렇지요." 정매의 말에 지훈 어머니는 다소 섭섭한 표정을 하였다. "그 래 그노마가 내 이약을 한번도 안 하드라꼬? 보고 잪다는 말도 안 했다꼬?" 지훈 어머니의 약간 뒤틀린 듯한 그 물음에 정매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가 않았다. "요즘 아이들이란 다 그래요. 크게 기뻐할 줄도 슬퍼할 줄도 모른다니까요. 엄마 아빠에 대해서도 고마워하는 마음이 없어요. 부모란 그저 저희들이 편리하니까 필요로 할 뿐이라구요. 요즘 아이들이란 그렇게 실리적이랍니다. 그러니까 원주에 대해서도 너무 큰 기 대를 하지 마세요. 큰 기대를 하셨다간 실망만 크실테니까요. 도시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 지한테서는 냄새 난다고 한방에서 자는 것도 싫어한다나 봐요. 저희들 자랄 때하고는 많이 달라요." 정매의 말에 지훈 어머니는 잠시 슬픈 얼굴을 하였다. 정매는 그런 지훈 어머니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 원주 그노마는 그렇지 않을 끼라..." "원주라고 뭐 다르겠어 요?" "하먼 원주도 핼미같이로 늙은 사람을 싫어한다 이겅교?" "원주도 마찬가지예요. 지난 번 즈이 외할머니가 오셨을 때 외할머니하고 함께 자라고 했더니 할머니한테서 된장 냄새가 남다며 함께 자지 않겠다고 하더라니까요. 요즘 아이들 다 마찬가지에요. 저도 그런 아이들 에게서 늘 실망을 한답니다." 정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씁쓸하게 미소를 머금어 날렸다. 두 여자의 침묵 속에 밤은 무겁게 깊어갔다. 어느덧 12시가 되었다. 12시가 되었는데도 지훈 어머니와 정매는 팽팽한 감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에게 원주 관계로 소송을 제기한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고 싶었으나 어쩐지 마음이 열리지가 않았다. 지훈 어머니 앞에서 그녀의 마음은 자꾸만 약해지고 있었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 쪽 에서 먼저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러나 지훈 어머니는 예전과 달 리 별로 말이 없었다. 정매가 보기에 지훈 어머니는 옛날에 비해 말수도 줄었고, 한껏 자신 의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매가 찾아온 것에 대해서도 달갑게 생각하지 않 는 듯싶었다. "밤이 늦었는듸 고단해서 그만 자야겠고마." 한동안 말없이 천장만 쳐다보고 있던 지훈 어머니가 자리를 폈다. 잠시 후 지훈 어머니가 불을 끄고 자리에 눕더니 간헐적 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정매도 옆에 누웠다. 지훈 어머니의 앓는 소리가 자꾸만 뇌리에 파 고들었다. 정메는 어디 아프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어둠 속에 침묵이 흘렀다. 지훈 어 머니와 나란히 자리에 누워 있는 정매는 기분이 이상했다. 지난날 지훈과 나란히 누워 있을 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훈 어머니한테서 지훈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조금은 불안하고 답답했다. 지훈과 나란히 자리에 누워서 그의 숨소리를 느 낄 때 마음도 그랬었다.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었다. 그 불안한 마음이 지금 되살아난 듯 싶 었다. 정매는 벌떡 일어나 앉아 있다가 다시 누웠다. 지훈 어머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정 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훈 어머니도 잠이 오지 않은 모양 으로 깊은 숨소리와 함께 여러 차례 몸을 뒤척였다. "주무세요?" 한참 후에 정매가 입을 열 었다. "와? 잠자리가 편치 않아서 잠이 안 오능교?" 지훈 어머니가 불컥거리는 목소리로 받 았다. 다시 끈끈한 침묵이 이어졌다. "꼭 재판을 하셔야겠어요?" 정매가 지훈 어머니 쪽을 향해 돌아누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훈 어머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꼭 재판을 하셔야 겠어요?" 정매가 원망하는 말투로 다시 물었다. 그리고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아서 지훈 어머 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라믄 지가 우째야 쓰겠능교? 우쨌으면 지가 우리 원주를 찾을 수 있 건능교? 다른 방도가 있능교? 다른 방도가 있으면 말해보이소" 지훈 어머니도 한숨을 섞어 푸념처럼 말하면서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두 여자는 어둠속에서 마주보고 앉았다. 그러나 서로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화를 내고 있는 쪽은 오히려 지훈 어머니였다. 지훈 어머 니는 정매가 자신에게 따지러 온 것으로 알고 화가 난 것이었다. "원주가 크면...크면 다 해 결이 될 것 아니겠어요." "원주가 크면? 그때는 이 늙은이가 죽은 다음이 아니겠능교" 그러 면서 지훈 어머니는 다시 심장이 내려앉을 것처럼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8. 사랑을 위한 반역 벽시계가 새벽 2시를 쳤다. 괘종시계가 벼락치듯 정매의 가슴을 두들겼다. 새벽이 되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 살아났다. 새벽이 되자 지훈 어머니가 심하게 앓는 소리를 토해 냈다. 앓는 소리와 함께 끄억끄억 헛구역질까지 했다. 앓는 소리를 심하게 내는 것으로 보아 통증이 심한 모양이었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병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 었다. 정매는 불을 밝혔다. 그때 지훈 어머니는 머리를 방바닥에 처박은 채 두 손으로 가슴 을 움켜쥐고는 곧 숨길이 끊어질 것처럼 버르적거렸다. 지훈 어머니는 괴로운 듯 팔을 휘젓 기까지 하였다. 정매의 생각에 지훈 어머니가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너무 놀라 안절 부절못하였다. 지훈 어머니가 손을 휘저으며 무슨 말인가 할 것 같아,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귀를 기울여보았다. 지훈 어머니는 흰자위를 말아올리며 조금씩 입을 달싹거렸다. 정매는 지 훈 어머니의 말을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가 다급하게 주인집 아주머니를 외쳐 불렀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정매의 다급 하게 외쳐대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왔다. "아주머니, 좀 도와주세요. 큰일났어요. 사람이 죽어가요" 정매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주인집 아주머니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주 인집 아주머니는 조용히 하라고 퉁명스럽게 내쏘고는 부엌에 들어가서 물 한 그릇을 떠가지 고 지훈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매도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지훈 어머니는 여전 히 방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버르적거리며 거의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집 주인 아주머니는 서두르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녀는 물그릇을 윗목에 놓고는 장롱 서랍을 열고 작은 약병을 꺼냈다. 그러고 나서 정매에게 지훈 어머니를 안아일으키라고 하였다. 정 매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지훈 어머니를 두 팔로 안아일으켰다. 그러자 주인집 아주머니가 약을 지훈 어머니의 입에 털어넣은 다음 물그릇을 입에 대주었다. 지훈 어머니 는 힘겹게 물을 마시고 나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되얐능 기라예. 한숨 주무시고 나 믄 괜찮아질 끼고마." 주인집 아주머니가 정매를 보며 말하고 나서 지훈 어머니를 자리에 뉘이라고 하였다. "정말 괜찮으실까요?" 정매가 지훈 어머니를 자리에 뉘이고 나서 걱정스 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벵원에 가보라 캐도 이리 고집을 부리니 종당에는 큰일 치르고 말 거고마." "도대체 어디가 아프셔서 이러시죠?" "오래 전부텀 위가 아프다 카이. 벵원에는 안 가고 진통제만 먹으이 벵이 났겠나. 아마도 이 노친네, 이 병으로 오래 몬살 끼고마. 혼자서 살다가 죽으면 불쌍해서 이를 어쩔 끼고." "그런데도 여태 병원에 가보지 않았다구요?" 정 매는 지훈 어머니가 조용히 잠드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거듭 물었다. "큰 벵원에 가보라고 케도 안 듣는 기라예. 죽을라꼬 작정을 했는지 말을 안 듣는고마. 색시흐고 어찌 되는 사인 지는 모르제만도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 치르고 말 끼고마. 그라이 퍼뜩 큰 벵원으로 데려 가이소."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로는 얼마전에 하동에 있는 병원에 가보았지만 고칠 수 없다 고 했다는 것이었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돌아간 다음, 정매는 꼬박 지훈 어머니의 머리맡에 앉아서 밤을 밝혔다. 그녀는 날이 밝자 서둘러 택시부터 불렀다. 지훈 어머니는 날이 밝아 아침 햇살이 봉창에 퍼질 무렵에야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나려다 말고 짚불 스러지듯 허물 어지고 말았다. "정신 차리세요.밖에 택시를 불러놓았으니까 어서 부산으로 가야겠어요. 부 산 큰 병원에 가서 병을 고치셔야지요. 그래야 손주를 찾으시지 않겠어요." 정매가 지훈 어 머니를 안아일으키면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지훈 어머니는 눈만 말똥말똥 뜨고 정매를 쳐 다볼 뿐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택시가 클랙슨을 다급하게 울리고 있었다. 정매는 주인집 아주머니를 다시 불러 지훈 어머니를 택시에 태우자고 하였다. 주인집 아주 머니는 정매가 부산에 있는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겠다는 말을 하자,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지훈 어머니를 안아 일으켰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지훈 어머니를 들쳐업어 택 시에 태웠다. 정신이 돌아온 지훈 어머니는 택시 안에서 병원에 가지 않겠다며 손을 휘저었 다. 그때 정매가 택시 운전사한테 출발을 재촉하였다. "부산에 가셔야 원주를 만나실 수 있 지 않겠어요. 손주 만나기가 싫으세요? 어젯밤에는 제가 거짓말을 했는데요, 실은 원주가 할 머니 보고 싶다고 했어요. 이번에도 저를 따라오겠다는 것을 제가 할머니 모시고 가겠다고 했어요. 지금쯤 원주가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구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제가 왜 거짓 말을 하겠어요."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상반신을 받쳐안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제야 지훈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정매를 보면서 오랜만에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참말이가? 참 말로... 우리 원주가 헬미를 보고 싶다고 하드나? 아이고 내 새끼... 참말로 보고 싶다고 했 제? 거짓말 아니제?" 지훈 어머니가 다급하게 반말로 물었다. "참말이라니까요." 그러자 지 훈 어머니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활짝 펼쳐지며 눈시울이 펑 젖었다. 그러다가는 두 손으로 입을 감싸쥔 채 한바탕 기침을 쏟았다. "운전수 양반, 빨리 좀 가입시데이. 우리 손자놈이 이 헬미를 기다린다 안 하요." 가까스로 기침을 멈춘 지훈 어머니가 큰 소리로 말하며 택시 운전사를 재촉하였다. 그러고 나서 정매한테 원주에 대해 이것저것 다시 묻기 시작했다. 정 매는 묻는대로 대답을 해주었다. 지훈 어머니는 남해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다시 숨을 가쁘 게 몰아쉬기 시작하였다. 정매는 택시 운전사한테 속력을 좀더 내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손 주가... 이 헬미를 기다린다 카이. 내 손주가..." 지훈 어머니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중얼거렸 다. 택시는 바람을 가르며 남해고속도로를 바람처럼 달렸다. 지훈 어머니는 택시 안에서 상 반신을 정매한테 기댄 채 몽롱한 눈빛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고속도로의 아스팔트 위 에는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꽃혀내리고 있었다. 묶음으로 쏟아지는 햇살 속에 지훈이의 어렸 을 적 모습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그러다가 지훈의 모습이 어느덧 원주로 변했다. 지훈 어머 니는 눈부신 햇살 속에 가물거리며 떠오른 원주의 모습을 눈이 시리도록 지켜보다가, 택시 가 섬진강 휴게소를 지날 무렵 얼핏 잠이 들고 말았다. 지훈 어머니가 다시 숨을 거칠게 몰 아쉬며 눈을 떴을 때, 택시는 어느덧 부산 시가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 왔으니 조금만 참 으셔요." 정매가 힘겹게 상반신을 곧추세우며 눈을 뜬 지훈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내 새끼 워디 있노...?" 지훈 어머니는 허우적거리듯 손을 내저으며 솜을 헐떡거리기 시작하였다. "곧 원주를 만날 수 있을 테니 걱정 말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정매는 택시 운전사에게 다시 한 번 속력을 내달라고 부탁하였다. 잠시 후 택시는 정매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병원의 입구에서 멈췄다. 정매는 젊은 택시 운전사와 함께 지훈 어머니를 부축하여 '요셉 병 원'이라고 씌어 있는 큰 우리문 안으로 들어섰다. 지훈 어머니는 다시 숨을 몰아쉬며 원주 의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정매는 그러는 지훈 어머니에게 곧 원주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40대의 잘생긴 의사는 지훈 어머니로부터 가위질을 헤대는 것처럼 위에 통증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위내시경 검사부터 해보자고 하였다. 정매는 지훈 어 머니가 위내시경 검사를 받는 동안 의사 옆에 붙어 있었다. 정매는 의사의 표정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검사를 끝낸 의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우선 입원부터 하시지요, 그리고 나서 조직 검사를 해보도록 합시다." 한참 망설일 끝에 의사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여자처럼 얼굴이 해맑은 젊고 잘생긴 의사는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정매를 옆방으 로 안내헸다. 의사는 정매에게 환자와 어떤 관계냐는 것부터 물었다. 정매는 그냥 친척이라 고만 말했다. "조직 검사를 해보겠지만 환자분 상태가 극히 절망적입니다. 어쩌면 수술이 불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는게 좋겠습니다." 정매의 예감대로였다. 그녀 는 무슨 병이냐고 물었고, 의사는 위암이라고 말했다. 정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 시경 검사에서 체크된 것으로는 위 전체에 암세포가 퍼져 있었습니다. 이 상태로 살아 있다 는 것이 기적입니다." 의사는 그 말만을 남기고 몸을 돌려세웠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를 입 원시키고 나서 슬며시 병원을 빠져나와 건너편 2층에 있는 카페의 층계를 걸어 올라가고 있 었다. 그녀는 창 쪽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음울한 기분으로 죽음을 앞둔 지훈 어머니가 그 동안 살아왔던 고통과 슬픔의 궤적들을 더듬어보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죽음을 앞둔 지훈 어머니를 위해서 그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를 생각해 보았다. 그 해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정매는 너무 피곤했다. 졸음이 파도처럼 밀 려와 눈만 감으면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인조가죽 미니 스커트 차림의 꺽다리 아가씨가 커피를 가져와서야 눈을 뜨고 창밖의 회색빛 병원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리고 방금 주사를 맞고 잠이 든 지훈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설탕도 타지 않은 쓴 커피 로 천천히 입술을 적셨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남편 을 만나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싶었다. 더 오래도록 가면을 쓴 채 살고 싶지가 않은 것이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남편한테 고백하고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 그녀에게 어떤 가혹한 운명의 올가미가 씌워진다 해도 그것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이제부터라도 가면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가 쓰고 있는 가면은 스스로 만든 것이기에, 그녀 자신이 벗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정매는 커피를 블랙으로 두 잔이나 시켜 마신 후에야 다시 지훈 어머니의 병실로 돌아갔다. 지훈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정매는 공중전화가 있는 병원의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남 편의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 신호가 혈관 속을 파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동전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고 다이얼을 돌렸으나 통화중 신호는 계속되었다. 전화는 한참 후에야 연결되었다. "여보, 저예요. 방금 도착했어요. 오늘 일찍 돌아오실 수 있죠? 아니, 그러지 말 고 우리 밖에서 만나는 게 좋겠어요. 당신한테 할 말이 있거든요. 중요한 말이에요. 집에서 만나자고요?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끊어요." 그녀는 힘없이 송수화기를 제자리에 걸어놓고 도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였다. 얼마 후 에 그녀는 다시 동전을 넣고 천천히 다이얼을 돌렸다. "원주 집에 왔구나. 그래 엄마야. 엄 마 지금 병원에 있는데 말야... 아니, 아빠 병원이 아니고 아파트 앞에 있는 병원. 그런데 원 주야, 아파트 앞에 있는 요셉 병원 앞으로 나올 수 있겠지? 그래, 그럼 병원 앞에서 만나 자." 정매는 전화를 끊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모든 사실을 남편한테 고백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자 명치 끝까지 차오르던 답답함이 일시에 사그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병원 앞 에 서 있다가 원주의 손을 잡고 다시 지훈 어머니의 병실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미적거림 없 이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발걸음이 가벼워지기까지 하였다. 엄마 손에 이끌려 병원 안으로 들어서는 원주는 무엇 때문에 병원에 가야 하느냐면서 거듭 물었다. 병실이 가까워 오자 정 매는 원주를 세우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동안 원주의 얼 굴을 올려다보았다. "원주야, 엄마 말 잘 들어라. 지금 병원 안에는, 언젠가 터미널 앞 식당 에서 만났던 외갓집 동네 할머니 있지, 그 할머니가 있단다. 그 할머니가 죽을 병에 걸려 살 수 없게 되었단다. 그 할머니한테 가족이라고는 원주 너만한 손자가 하나 있는데, 지금은 여 기 올 수가 없거든. 손자가 찾아오면 병이 나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원 주가 대신 할머니 손자 노릇 한번 해줄 수 있겠니? 그 할머니는 불쌍한 분이시란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라는 거 너도 알지?" 정매가 원주의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사정하듯 말했다. "그 할머니 진짜 손자는 왜 여기에 올 수 없는데?" "멀리 떨어져 있거든. 원주야, 엄마 말대로 네가 할머니 손자 노릇 좀 해줘라.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정매의 부탁 에 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매는 그제야 일어서서 원주의 손을 잡고 걸었다. 그들 모자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을 대, 지훈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나 거의 죽어가는 듯한 몰골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병실에 누워있는 초췌한 지훈 어머니의 모습에서 정매는 창백한 죽음의 그림 자를 볼 수 있었다. 짚불처럼 스러져버릴 것만 같은 지훈 어머니의 몸에서 유일하게 생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빛나는 눈빛 뿐이었다. 온몸의 기력이 눈에 쏠려 있는 것만 같았다. 지훈 어머니는 유일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강한 눈빛으로 원주를 발견하더니, 팔에 링 거 주사바늘을 꽂은 채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이구, 내 새끼. 원주가 왔고마." 지훈 어머니 가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반기자, 원주는 약속과는 달리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당황해 했다. 그러곤 기분 나빠하는 표정으로 정매를 올려다보았다. 원주는 처음엔 엄마와 약속한 대로하려고 했다. 그런데 언젠가 터미널 앞 식당에서 만난 적이 있는 시골 할머니가 주사바늘을 꽂은 채 벌떡 일어나며 껴안을 듯 달려들려고 하자, 자기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 고 말았던 것이다. 원주는 시골 할머니의 입에서 울부짖음처럼 튀어나온 어이구 내 새끼, 하 는 말도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원주야, 할머니한테 인사드려야지." 정매는 한사코 뒤로 물 러서려고 하는 원주의 팔을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그제야 원주는 마 지못해, 그러나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로 한껏 상반신을 뒤로 자빠름히 젖힌 채 잦 아 들어가는 목소리로, "할머니..." 하고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내 새끼... 헬미한 테 가까이 좀 오그라." 지훈 어머니가 다시 울부짖듯 말했다. 그러나 원주는 여전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원주는 엉덩이를 빼며 병실에서 뛰쳐나가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는 수 없이 정매가 원주를 끌다시피 하여 지훈 어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러곤 쇠갈퀴처럼 앙상한 지훈 어머니의 아귀에 원주의 손을 갖다댄 후, 그녀의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지훈 어머니는 원주의 손을 힘껏 쥐었다. 그러자 원주는 손을 빼려고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정매가 그들 둘의 손을 한꺼번에 움켜잡고 있었기 때문에 원주는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자, 자리에 누우셔야지요." 잠시 후, 정매가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있던 팔에서 힘을 빼고 지훈 어머니를 침대에 뉘이며 말했다. 그러자 원주는 도망치듯 병실문 쪽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지훈 어머니는 원주의 그런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사바늘이 꽂혀 있지 않은 오른팔을 휘저으며 원주의 이름을 계속 불렀댔다. "친구들 이랑 노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와서 저러는가 봐요. 오늘은 그만 돌아가게 했다가 내일 다 시 데리고 올께요." 정매는 그렇게 말하고 원주를 향해 그만 나가보라고 턱짓을 하였다. 원 주는 잠시 미적거리다가 병실을 나갔고, 원주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지훈 어머니의 울부 짖음 같은 목소리도 이내 잠잠해졌다. 얼마 후에 지훈 어머니는 다시 잠이 들었으나 정매는 병실을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끝에 엉덩이를 불안스레 붙이고 걸터앉아서 숨소리조차 없이 잠든 노인의 초췌한 얼굴을 한참동안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평소때보다 한 시간쯤 앞당겨 병원을 나온 김원철은 차를 몰고 병원 앞 큰길로 나왔다. 그러나 그는 퇴근하는 대 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던 아내와의 약속을 떠올리면서도 집 쪽으로 차를 몰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그에게 하고 싶다고 한 말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이미 헤아리고 있는 터였다. 그는 얼마 전에 아내의 고향 친구라는 박문호를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후들거렸다. 온몸의 피돌기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오른발에 힘을 주었다. 자동차는 무섭게 질주하였다. 그는 두 차례나 신호등의 빨간불을 무 시하고 미친 듯 달렸다. 흥, 이제 와서 고백을 하겠다고? 뭐 원주를 참기 위해 소송을 해? 김원철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김원철은 한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그의 집과는 정반대 쪽인 미숙이 모녀가 살고 있는 동네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과, 미친 듯이 과속을 하 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제야 그는 급히 길 한켠에 차를 세우고 차창 문을 열었다. 갯바람 이 조금은 머리를 식혀주었다. 미친 듯 차를 몰아서인지 마치 소주 두어 잔을 들이켰을 때 처럼 머리 속이 얼얼하면서 후끈거려 왔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물고 깊숙하게 연기를 들 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뿜었다. 그는 아내로부터 고백을 들은 후에 어떤 말을 할것인지 생각 해 보았다. 아내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헤어지자고 할까? 아니면 머리끄덩이를 휘어잡고 내동댕이를 칠까? 이 더러운 것, 나를 배신했으니 천벌을 받아라 하며 뛰쳐나와 버릴까? 아 니야, 이 더러운 배신자야, 네년한테만 과거가 있는 줄 아느냐, 나한테도 경옥이라는 여자와 미숙이라는 숨겨둔 딸이 있다. 네가 나를 배신했듯이 나도 너를 배신한 거다. 왜 나만 손해 보고 살겠느냐고 쏘아붙일까? 김원철은 줄담배를 피우면서 생각을 굴렸다. 그러다가 그는 너무 괴로워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뿌리치고 혼자 어디 론가 사라져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기실 그 자신이 아내한테 잘한 것도 없었다. 아내가 비난받기 전에 그 자신부터 비난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김원철은 날이 어둑해져서야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는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스테레오를 크게 틀고 미숙이 모녀가 사는 동네로 접어들고 있었다. 미숙이 모녀는 저녁을 먹고 있다가 김원철이 방문을 열고 들 어서자 반가움보다 놀라움을 나타내며 일어섰다. "미숙아, 이 짐 보퉁이들이 뭐냐?" 김원철 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모녀를 바라보다 말고, 방안에 이삿짐 보퉁이들이 가득한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아빠, 우리 이사가요." 미숙이가 숟가락을 상 위에 놓으며 투정을 부리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사를 가다니…?" "그렇잖아도 조금 전에 병원에 전 화를 했었는데… 일찍 나가셨더군요." 경옥은 한사코 김원철의 시선을 피하며 마치 큰 잘못 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이사를 가다니? 어디로 가 는데? 집주인이 방을 빼래?" 김원철은 미숙이 옆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여물었다. "우리 광 주로 이사 가. 난 가기 싫은데 말야." 미숙이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뭐? 광주로?" 김원 철이 경옥을 쏘아보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갑자기 배신감에 가슴이 들끓어오르는 듯하였다. 언젠가 경옥이 그에게 부산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경옥의 그 말에 은근히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흘려듣고 말았었다. 그런데 경옥 이 막상 부산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이삿짐까지 싸놓은 것을 보자, 웬일인지 견딜 수 없는 허망함과 배신감까지 드는 것이었다. 김원철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왜 갑작스럽게 부산을 떠나려고 그래? 그러고 이런 일을 혼자서 결정하다 니 말이나 돼?" 김원철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경옥은 그 의 불만스러운 다그침이 싫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었어요. 마침 광주에 맹인 들을 위한 점자 도서관이 새로 생기게 돼서요." 경옥은 고개를 무겁게 떨군 채로 잦아 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세 사람의 가슴을 답답하게 죄어왔다. "언제 떠 나기로 했는데?" 한참 후에 김원철이 경옥을 보며 물었다. "내일 새벽에요. 이삿짐 센터에서 트럭이 오기로 했으니 걱정말아요." 경옥은 되도록 부드러운 태도로 말하려고 애썼다. "내일 새벽에?" 그러면서 김원철은 신경질적으로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면서 다시 경옥을 쏘아보았다. 경옥은 고개를 더욱 깊숙하게 떨구었다. "아빠, 나는 이사가기 싫어. 아빠랑 멀 리 떨어져 살고 싶지 않단 말야. 엄마한테 이사 가지 말라고 해줘." 미숙이가 이때다 싶은 표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놓았다. 그러자 고개를 떨구고 있던 경옥이 미숙을 향해 눈 을 흘겼다. 김원철은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신경질적으로 연기를 뿜 어댔다. "밖에 나가서 이야기 좀 하지." 김원철이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짓이기듯 비 벼끄고 일어나며 말했다. 경옥은 김원철을 따라 방을 나섰다. 김원철은 골목을 걸어나가면서 다시 담배를 피워물며 희끄무레한 어둠 속으로 경옥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잠시 후 김원철이 자동차를 세워둔 약국 앞 공터 모퉁이 카페에 앉았다.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어색 한 얼굴로 앉아 있기만 하였다. "갑자기 왜 그래? 왜 떠나려고 그래?" 커피 한 잔을 비우고 나서야 김원철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경옥은 커피 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경옥은 할말이 없었다. 입을 여는 순 간 울음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것으로 김원철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혀 왔다. 그래도 마지막에 이렇게라도 마주앉아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생각했다.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의 그런 감 정을 김원철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경옥은 이제 먼 훗날 늙어서 죽기 전에 꼭 한번만 더 김원철을 만나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때 모두 쏟아놓으리라 마음먹었다. 죽기 전 마지 막 만나게 될 그때를 위하여 지금은 아무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왜 갑자기 헤어질 생각 을 했어?" 김원철이 물었으나 경옥은 잔잔한 미소만을 흘릴 뿐이었다. 저는 아무하고도 헤 어지지 않아요. 저한테는 이별이라는 것이 없어요. 눈을 다시 뜬 지금,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영원히 제 가슴 속에 아름답게 안기게 되었다구요. 앞을 못 보게 되었을 때, 제게서 떠나버 렸던 모든 것들이 다시 돌아왔어요.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 영혼만 남게 된 후에도 저는 제가 보았던 이 세상 모든 것들, 그리고 제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잊지 않을 거예요. 모든 것들을 제 생명의 일부로 생각하며 살겠어요. 그러니 제게는 이별이 없어요. 경옥은 마음속 으로 그렇게 말했다. "정 그러면 미숙이는 두고 가는 게 어떻겠어…?" 김원철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미숙이는 당신 딸이니까 언젠가는 당신한테로 돌아가겠지요. 그전에 부인한테 미숙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부인이 우리 집까지 찾아 오신걸 보면, 이 미 우리 모녀와 당신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 눈치예요. 부인한테 미숙이의 이야기를 밝히고 나서 미숙이를 두고 가라고 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어요? 언제든지 부인한테 진실을 털어놓 은 다음에 제게 연락을 주시면 미숙이를 보내겠어요." 경옥은 미숙이에 대한 말을 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말을 마치고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감원철은 할 말을 잊은 채 담배 연기만을 빨아댈 따름이었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오디오에서 흘러나 오는 옛노래와 함께 거칠게 엉켰다. "우리 걱정은 마세요. 전…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눈 을 다시 뜨고부터 사는데 자신이 생겼어요. 미숙이 잘 키울게요. 그리고 가끔 당신한테 보낼 테니 잘해 주세요. 이젠 됐어요. 내일 새벽 일찍 떠나기로 했으니 그만 들어가 봐야 해요. 아직 짐을 덜 싼 게 있어서… 이사 마치는 대로 병원으로 편지할께요. 자, 그만 일어서요" 그러면서 경옥은 천천히 일어서서 카운터로 걸러나가 커피값을 계산하고 먼저 층계를 내려 섰다. "하루만… 하루만이라도 더 머물러 줄 수 없겠어? 내일 하루만이라도 미숙이랑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 이삿짐센터에 전화하면 되잖아." 김원철이 뒤따라나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매달리듯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당신과 미숙이가 아주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미숙이는 아빠가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혼자서 당신을 찾아올 거예요. 미숙이는 이 제 다 컸어요. 미숙이한테는 내가 좋게 말하겠으니 그만 가보세요." 경옥이는 냉엄하게 잘라 말하고 몸을 돌려세워 버렸다. 김원철이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몇 번 불렀으나, 그녀는 끝 내 뒤돌아 보지 않고 어둠이 육중하게 덮인 골목안으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김원철은 한동 안 공터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자신의 자동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간신히 시동 을 걸어놓고는 차를 움직일 생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오랫동안 운전석에 앉아 있기만 하였다. 어둠이 싸인 골목에서 금방이라도 미숙이가 뛰어나올 것만 같아 차마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원철은 반 시간쯤 자동차 안에 그렇게 망연히 앉아 있었다. 김원철은 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 길에 포장마차에 들러 취하지 않을 만큼 소주를 들이켰다. 그는 아 파트 문 앞에 이르러 한동안 부저를 누르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늦었군요." 정매는 남편에 게 무슨 일로 늦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흔적이 뚜렸했다. "아이들은 벌써 자나?" 김원철은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나가 외박을 하고 돌아온 아내의 행동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여태 기다리다 이제 막 잠들었어요." 김원철이 묻고 정매가 담담하게 말했다. 김원철이 침실로 들어서자 정매가 술병과 유리잔 두 개를 대나무 쟁반에 받쳐들고 따라 들어왔다. 그제야 김원철은 낮에 그의 아내가 병원에 전화를 걸어 할말이 있으니 밖에서 좀 만날 수 없겠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되 살아났다. "웬 술이야?" 김원철은 석고처럼 굳어진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우리 술 한잔 해요." 그러면서 그녀는 침대 옆 탁자에 쟁반을 놓고는 두 개의 앙증스러운 크리스털 술잔에 술을 부었다. 그 사이에 김원철은 양복 저고리를 벗고 침대에 걸터앉아서, 얼굴에 칼날처럼 푸르고 결연한 빛을 띠고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아내를 조심스럽게 바라 보았다. "당신이 먼저 하겠어요… 아니면 제가 먼저 꺼낼까요?" 정매가 술잔을 들며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김원철은 여전히 아내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정매는 얼굴을 찡 그리며 독한 양주를 입 속에 털어넣다 말고 갑자기 기침을 쏟아냈다. 김원철은 그런 아내를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 이제 피차 가면을 벗는게 어때요? 이제는 진실을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나요?" 장매가 기침을 멈추며 말했다. "가면은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고, 부끄러움과 약점을 가리는 거야."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그렇지. 우리는 서 로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그것을 감추었을 뿐이니까. 우리 가정을 위해서 는 당신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니까. 물론 나도 그래. 그러니 우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게 좋겠어. 과거는 과거의 시간 속에 묻어 두는게 현명하다고 생각해. 우리 가정을 위해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기로 하자고. 과거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현재와 미래까지도 아 름답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 않아? 그렇다고 과거를 잊어버리자는 것은 아니야. 과거를 서로 인정하되, 그 과거 때문에 오히려 내일이 상처받아서는 안된다는 말이지. 그러니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도록 합시다. 미숙이 모녀는 내일 새벽에 무산을 떠나기로 했어. 그러니 미숙이 모녀 일이랑… 원주 문제랑은 거론을 하지 말자고. 당신과 나는 마음이 그렇게 강한 사람들 이 아니지 않아? 그러기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거야, 그러나 시행 착 오를 겪은 삶의 궤적들을 다시 들추어내서 뭘 어쩌겠어. 그러니 우리 서로 과거를 용서하자 고 과거를 인정해 주면서… 서로를 용서하면서 사는 거야. 나도 당신을 용서했으니, 당신도 나를 용서해 줘. 우리에게는 아무 변화도 있어서는 안 돼. 우리 서로 용서하며 소중한 가정 을 지켜나가도록 하자고. 이 가정 안에서 행복을 찾도록 합시다. 제발 우리 따지지 말고 당 신이 알다시피 나는 뿌리가 확실치 않은 고아 출신 아니야? 그러기에 나는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어. 우리 더 이상 따지지 말고 이 가정을 끝까지 지 켜나가자고. 우리 원주와 창주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해." 김원철은 길게 이야기하고 나 서 술잔을 거푸 두 잔씩이나 비웠다. 정매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떨구었 다. 어쩌면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육신이 파도의 포말처럼 산산이 분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알고 있었구나. 남편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구나. 정매는 마음 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에게 있어 그날 밤은 그들이 살아온 생애만큼이나 길 었다. 부끄러움과 회환과 고통으로 얼룩진 기나긴 밤이었다. 그들은 부끄러움과 고통을 견디 기 위해 술을 마셨다. 그러나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아침 이슬처럼 투명해졌다. 투 명해진 마음으로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여러 가지 색깔로 치장된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그 눈으로 다시 상대를 보았다. 상대의 모습 속에 자신이 들어앉아 있었다. "여보, 우리 밖으로 나갑시다." 김원철이 말하며 일어서자 정매도 따라 일어섰다. 그들은 약 속이나 한 듯 아무 말 없이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고즈넉하게 잠든 거리를 함께 걸었다. 그 렇게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상큼한 바다의 향기를 냄새맡았고, 오케스트라 연주 같은 파도소리를 들었다. 어느새 바다가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그들은 밤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원철이 정매의 손을 잡았다. 순간 정매의 가슴이 덜컹했다. 전율 같은 떨림이 혈 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울컥 눈물이 복받쳐오르면서 그녀는 꿈속 처럼 황홀경에 빠졌다. 처음 경험한, 새롭고도 낮선 떨림이었다. 답답했던 가슴이 바다처럼 트여오면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갑자기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여보, 용서해 주 세요. 제가 함께 죽고 싶은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에요." 정매가 어둠 속에서 남편을 쳐다보 며 촉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여보 상처가 됐건 영광이 됐건 우리들의 과거는 모두 저 바닷속에 던져버리자구. 우리에게는 과거는 무덤이야. 우리한테는 오늘과 내일이 있을 뿐 이야. 끝이 없고 시작만이 있을 뿐이야. 앞으로는 하루하루를 처음 만나는 마음으로 살아가 기로 해. 나 역시 어떤 경우에라도 당신과 함께 죽고 싶어." 김원철은 그렇게 말하며 두 팔 에 힘을 주어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는 드넓은 바다를 통째로 포옹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 이 뿌듯하게 벅차올랐다. 정매는 남편의 가슴으로 파고들며 파도처럼 격렬하게 흐느꼈다. 그 때 갑자기 바람과 파도가 숨을 죽였다. 잔잔해진 바다 위로 조용하게 평화의 새벽이 열려오 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정매는 여느 날과는 달리 미명의 어둠이 허물을 벗기도 전에 잠에 서 깨어났다. 그녀는 그날이 공휴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큰 소리를 질러가며 요란스럽게 아이들 이름을 불러 깨웠다. 그녀는 바다 쪽으로 나 있는 모든 창문을 활짝활짝 열어젖히고 귀가 시리도록 파도소리를 들었다. 황홀함 정도로 감미로웠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파도소리 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날마다 보아온 바다도, 하늘도, 햇살도 , 바람까지도 낯설 도록 새롭게 느껴졌다. 정매는 바다 위에 부서지는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뻐개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었고, 쇼팽의 피아노곡도 듣 고 싶었다. 샤워를 끝낸 그녀는 아침을 짓기 전에 커피물부터 끓였다. "엄마, 얼른 아침밥 줘요, 아침밥 먹고 아빠랑 시골 할머니 병문안 가기로 했잖아요." 원주가 눈을 비비고 방에 서 나오며 엄마를 재촉했다. 정매는 빙긋이 웃으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날따라 커피향이 음악처럼 짜릿하게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정매가 커피잔을 들고 창가에 서서 바다의 뒤척임 속에 과거의 시간들을 내던지고 있을 때, 화장실에서는 쏴아 하는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화장실에서 나온 창주가 작고 따뜻한 손으로 슬그머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엄마, 오늘 미숙이 누나 이사 가는 데 가기로 했지?" 창주가 엄마의 손을 잡고 흔들며 물었다. "참, 그렇구나. 시골 할머니 병문안도 가야 하고, 미숙이네 이사가는 데도 가봐야하고… 서 둘러야겠다." 정매는 웃는 얼굴로 원주와 창주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바다의 일렁임은 더욱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그 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꽂혀내렸다. <끝> 작가후기 고통스러운 가면의 삶에 대하여 소설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소설을 쓸때마다 나는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간단하게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은근히 마음속으로 고민을 하 게 마련이다. 내가 이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되풀이하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소설 쓰기가 점점 더 두려워지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나는 스스로의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구 하지 못한 채, 나는 무엇 때문에 소설을 쓰는가 하는 또 다른 의문 속으로 나 자신을 함몰 시키고 만다. "소설이란 형식적으로는 산문으로 된 창조적 이야기이며, 창조적 삶의 내용을 보여줌으로 하여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생의 개안을 도와준다." 라는 말만으 로는 완전하지가 않다. 그리고 나는 이 같은 말을 떠올릴때마다, 과연 내 소설은 사람이 사 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용기와 희망을 제공해 주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 다. 내가 소설을 쓰는 순간순간마다 소설의 사회적 기능이나 작가의 역사적 사명감 따위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을 쓰는 동안 나 자신은 소설 속 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쓰는 소설 속의 인물들과 진실되고 진지하게 만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쓰는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 면서, 기쁨보다는 끊임없는 고통과 번민을 겪게 되고, 또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애정 과 중오심을 동시에 느낀다. 작가는 결국 소설을 쓸 때마다 또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나 행복한 삶이 아닌 고통스러움으로 시작하여 고통스러움으로 끝나는 삶이다. 다만 소설을 완성하고 나서야 회한의 긴 한숨과 함께 고통은 비로소 끝나게 되며, 새로운 고통의 삶을 다시 준비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원 제목은 '가면의 춤'이다 오래 전에 부산일 보에 연재한 소설로, 나름대로는 본격소설과 대중소설의 벽을 허물어보겠다는 생각을 하면 서 썼다. 대중소설에서도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개인의 삶을 사회문제로 확대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주변에는 '가면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소 설의 주인공 오정매도 그들 중의 하나다. 이 여인은 가면을 쓰고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아 가고 있다. 하나의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여 양심을 속이지 않고 진실 하게 살아가려는 모습이고, 또 하나의 삶은 현실적인 행복이라는 덫에 갈린채 자신에게 주 어진 운명을 거부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어떤 모습이 진실이 며 가면인지를 분간할 수도 없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삷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 는 진실한 모습을 갖고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자신의 운명대로 살아가는 진실한 모습을 갖고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이웃과 세상은 물론, 자신까지도 철저하게 속이고 배반하는 가 면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본래의 자기 모습보다는 자신까지도 속이는 가면의 삶에 더 충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여 가면의 사 회, 가면의 역사속에서 우리들 모두 한데 어울려 정신없이 '가면의 춤'을 추고 잇는 것인지 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가면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들 자신이 가면을 쓰고 가면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는 사실이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가 이 고통스러운 가면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1998년10월 문순태